아무리 건강한 식단을 지속하고, 건강하고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가지고, 매일 운동을 해도, 정신적으로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즉, 나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면) 건강한 식단이고 뭐고 오레오오즈에 우유 왕창 부어 3그릇은 먹고 싶고(요즘 생각나는 내 최애 음식) 운동이고 뭐고 일단은 누워서 쉼이 필요한 상태가 된다.
하지만 반대로, 아무리 내게 정신적인 스트레스 요소가 없다고 해도(불가능하겠지만..) 생활습관이 규칙적이지 못하고, 온갖 가공식품으로 끼니를 대체하고 있다면, 정신은 몸에 따라 피폐해져간다. 아무 일 없는데도 우울하고 불안하고, 또 외로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다이어트를 한다는 것, 혹은 제목을 보고 들어온 사람들처럼 다낭성 난소 증후군과 싸우는 여정 그 자체는 곧 '나를 알아가는 여정'이다.
얼마 전 상담을 받았을 때, 상담사 선생님께서 이런 말을 해주신 적이 있다.
00씨의 마음에 와닿지 않는 말은 하지 않는 게 더 나을수도 있는 공허한 언어인 거예요. 00씨는 적재적소에, 딱 그 말이 필요한 상황에 00씨에게 가장 와닿는 말을 해줄 수 있어야 해요. 남들이 다 하는 말은 전혀 소용없어요. 00씨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인 본인이, 그 말을 해줄 수 있어야 해요.
내가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위로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이 무엇을 할 때 좋아하고, 무엇을 할 때 슬퍼하는지에 대한 정보 하나 없이 그 사람을 적절히 위로해줄 수 있나?
절대 그럴 수 없다. 무슨 말을 하든 그 사람의 마음에 끝까지 가서 닿지 못하는 오로지 공허한 말들 뿐일거다.
나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자녀가 어릴 때 바빠서 한 번도 제대로 시간을 보내본 적 없는 부모가 사춘기가 된 아이와의 관계에서 큰 어려움을 느끼듯이, 우리는 필요할 때 내 옆에 있어주지 않았던 존재가 나에게 거는 말을 진심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지난 번에 올렸던 글을 마지막으로, 나는 결국 건강한 생활을 포기하게 됐다. 문제는 정신적 스트레스였다.
나는 나와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할 지 잘 몰랐다. 마치 자식과의 관계가 어색한 부모가 자식과 단 둘이서 보내는 시간에 무엇을 해야할 지, 어떤 대화를 나누어야 할 지 허둥대며 어쩔 줄 몰라하는 것처럼.
나는 나를 아예 처음보는 타인처럼 여기고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잘은 몰랐다.
인생은 성공과 실패가 아니기에, 그리고 인생에는, 죽기 전까지는 계속 새로운 배움과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피드백만 있는 것이기에 만약 한 번 넘어졌다면 '아, 이러저러해서 내가 잠시 넘어졌구나. 그럼 앞으로는 이러저러하게 시도해볼까?'라는 마음가짐으로 나를 일으키면 되지만, 그 때의 나는 내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실패했다는 것은 끝을 의미했다.
하지만 평생 나쁜 상태로 머물러있는 사람은 없다. 살기 위한 의지가 있다면,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방법을 찾는다.
나는 나를 알아가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식사일기도 썼고, 그냥 일기도 썼다. 어떤 일이 있고, 어떤 절망이 있든, 나는 살아가기 위해 나를 알아가려 했다. 너무나 힘들 땐 그냥 뛰었다. 뛸 땐 괜찮았지만, 뛰고 나서는 괜찮지 않은 마음상태가 계속 지속됐다. 그 때는 힘들었지만, 그 때의 내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고맙다.
그렇게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다보니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빠져나와보니, 그렇게 어렵게만 느껴지던 건강한 식단, 몸을 활기차게 만들기 위한 노동이 아닌 운동 등이 전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여유를 되찾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래서 나는 계속 좋은 상황에 있고, 발전하는 방향으로 항상 살아가냐는 것이다.
절대 그렇지 않다. 나도 중간중간 자기혐오에 휩싸인다. 마치 그것이 가장 쉬운 길인 것처럼 말이다.
마음을 끌어안고,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정도의 희생이 항상 따른다. 그렇지만 나는 그게 싫고 귀찮았다. 언제까지 그 노력을 이어나가야 하는 것인지? 내가 죽을 때까지? 언제 나는 나를 완전히, 온전히 사랑한다는 결말에 다다르게 될지?
희망은 없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사랑의 정의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 그런 사람은 나르시시스트이거나 신이겠지. 인간은 아닐 것이다.
완벽하다는 것은 어차피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것이고, 현실의 삶에서는 영원히 보이지 않는 이데아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항상 완벽을 쫓았다. 그러니까 나는 행동보다 항상 생각이 가득 차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완벽에 다다를 때까지 나는 어떤 일련의 행위를 거쳐가야 하는지. 어떤 계획을 수립하고 그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불안요소를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지. 어떻게 그 불안요소들을 하나하나 찾아갈 수 있는지.
진짜 사랑은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고 모든 불안요소를 찾아내 A부터 Z까지의 대안을 짜주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설령 넘어진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순간 그 사람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머리로 '사람은 그래, 완벽할 수 없지'가 아니라 그 사람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낌으로 느끼고 아무런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사랑.
그래서 나는 그 과정 중에 있다. 나의 마음은 종종 과거로 회귀한다. 그렇지 못한 순간이 많다.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해서 하지 못하고, 또 다시 불안요소를 찾아 하나씩 제거하려고 하고, 책상 의자에서, 그 빠져나오지 못할 구멍에 갇혀 하루종일 계획만 짜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렇게 하면 완벽해질거야. 이렇게 하면 아무것도 나를 불안하게 할 수 없어. 라는 헛된 망상에 다시 나를 가두는 것이다. 그 생각은 망상이라는 것을 나도 안다. 하지만 어떤 회로가 만들어진 것처럼 가장 쉬운 방식대로 나는 행동하고, 생각한다.
그냥 하는게 두렵다. 하지만 근육을 키우기까지 과정이 항상 순탄한 것은 아니고, 어떤 고통이 잇따르는 것처럼 그냥 하게 되는 뇌의 어떤 회로를 만드는 데에도 어떤 고통이, 내가 겪어보지 못한 어떤 고통이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훈련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 갑자기 나도 모르는 방식으로 쉬워지고 아무 노력없이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겠지.
그래서 나는 다이어트에 너무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저 나를 알아가기로 했다. 이렇게 하다보면, 언젠가는 나도 다낭성 난소 증후군이라는 진짜 지독하고 짜증나는 증상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하면서. 좋은 소식은, 최근 한 번 자연생리를 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는 소식이 없지만(약 2달째).
잘 먹고, 잘 자고, 가끔 재밌게 운동하면서 지낸다면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여기서 이겨낸다는 것의 정의는 완전히 벗어나는 게 아닌(어차피 다낭성 난소 증후군은 완치가 없는 병이다), 그냥 내 오랜 친구처럼 여기면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 쯤으로 내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