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든 백만가지 생각
2022. 11. 4. 금요일
너를 떠나기 위해 40일 전부터 준비했고 아니 그 훨씬 전부터 나는 너를 떠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미안하지 않았다.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헤어질 것을 알고 있었고 내가 떠날 것을 너 또한 알고 있었다. 네가 먼저 내게 딱 1년만 함께 하자고 했으니까.
내가 너를 처음 봤을 때, 너는 텅 비어 있었다. 한동안 누구도 만나지 않았던 것 같았고 오랜 시간 품속에 아무도 두지 않은 것 같았다.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존재였다. 하지만 너의 눈이 탁 트인 세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다른 무엇보다 너의 눈 때문에 너를 선택하였다.
너를 만나고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너의 온기를 다시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때마침 하던 일이 한두 주 미뤄지면서 너와 만날 시간이 많아서 좋았다. 나는 친구들과 만나는 것이 좋고 저녁은 거의 매일 약속이 있었는데 너와 만난 후엔 너와 있고 싶었다. 나의 부모님도 너를 좋아했던 것 같다. 한번도 내가 소개한 이를 좋아한 적이 없는데 너를 만났다고 했을 땐 너를 지켜주라 했었다. 너의 온기를 살려주라고 하셨고 너의 배를 채워주라고 하셨다. 친구들도 널 좋아했다. 너와 얘기하고 너와 밥을 먹고 너와 술잔을 기울이고 너와 차를 나누고 너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렇게 약속한 1년을 넘어 2년이 되었다. 나는 너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바빴고 너는 그런 나를 그저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때 너의 제안,
나는 그 동안,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너는 애초에 나를 계약의 상대로만 봤지 애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침이면 너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언젠가는 보지 못할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밤, 지쳐서 돌아온 그 밤, 너무나 일그러진 너를 보고 내가 문을 닫고 돌아서던 그 밤, 그래도 내가 너를 보지 않으면 누가 너를 보겠나 싶어 다시 문을 열었을 때, 싸늘해진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때 생각했다. 내가 너를 더 좋아하겠다고. 그런데! 뭔가 달라졌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만큼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좀 미안한 일이지만, 난 쉽게 질려한다. 내가 프리랜서인 이유도 그 중 하나다. 한 조직에서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는 것이 힘든 사람이다. 너를 만나고 3년이 됐을 때 너의 호의는 이미 잊었다. 너는 나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여기 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그 때는 온 세상이 아플 때였고 네가 아픈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이제 너를 떠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너는 더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안다. 나도 그런걸. 나도 준비되지 않았을 때 누군가 떠난다고 하면 아픈걸. 정말 물리적으로.
나는 살면서 가장 별스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 대충 어떻게 흘러갈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으면서도 휩쓸려갔고 나.라는 인간은 지하 깊숙이 스스로 동굴파고 들어가는 짓을 하게 됐다. 어떤 느낌인지 예전에 비슷한 느낌을 겪어봐서, 어떻게 딛고 올라가야 하는 것인지 아는데도 불구하고... 행할 수 없음에 좌절했다. 그 때와 지금이 뭐가 다른지에 대해 고찰도 해보았다. 또, 왜 굳이 올라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다시 자문하고 그것을 반복을 하다가...
나를 위해,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는 믿고 싶지 않은) 신이 나를 창조한 이유,
어떤 포지션에 서 있어야 하는 나를 위해,
지하에서 어느 선까지 올라가기 위해,
가장 빠른 방법으로 너를 떠나기로 하였다.
네가 내게 잘못한 것은 없다. 나는 너와 함께 풍요로운 40대를 보냈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지, 무엇을 못하는 사람인지 알았다.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내 부모가 얼마나 예쁜지, 내 동생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다. 그리고 나는 얼마나 실없는 관계를 만드는 사람인지 쓰잘 떼기 없는 물건, 취미, 신념, 가치 등등을 안고 살았던 사람인지를 알게 됐다. 네가 아니었다면, 너의 품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던 것이다. 너의 품에 있어서 생각할 수 있었고 너의 품이어서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4년 6개월이 조금 넘었다. 어쩌면 너를 떠난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나는 조금 기력을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너를 떠나면서, 내가 너를 처음 봤을 때의 너처럼, 내 마음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이 느낌은 왜일까? 나는 너를 떠나도 온기가 식지 않을 자신은 있는데 왜 이리도 허전할까?
매일 아침, 따뜻한 밥을 주던 너, 힘겨운 하루를 보낼 한숨을 받아주던 너, 땀 흘리고 돌아온 나를 씻겨주던 너, 루틴같은 화장을 하는 내게 와서 예뻐져라 주문을 외워주던 너, 정신없이 바쁜 나의 일상에 늘 커피와 차를 내어주던 너, 아파서 기어다니던 나를 부축해주던 너, 아무것도 하기 싫어 멍하게 누워있던 나를 받쳐주던 너, 심심하다고 종종거리면 내가 좋아하는 마블과 SF소설과 철학적 의문을 쏟아내던 너,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반찬과 김치 냉장고가 채워지던 너, 대본을 쓰다가, 책을 읽다가 덕지덕지 포스트잇을 붙여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온 몸을 내어주던 너....,
1209호.
아마도 다시 내가 너의 이름을 어디선가 쓸 날은 없겠지만 너를 만나 행복했고 너를 만나 나를 이해했다고 고백하고 간다. 나는 너를 기억할 것이다. 너를 추억할 것이다. 부질없이 “사랑해요”처럼 흔한 말이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다. “고마웠다” 아니,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