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승주 Oct 11. 2024

한강의 여름에는 수박이 달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을 기념하며.

한강의 자전소설 <침묵> 중


작가 한강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대단하고 기쁜 일이다. 자연과학과 의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노벨상을 받았다고 하니 한참 멀리 있는 거장처럼만 느껴진다. 서점에서 작품을 통해 만났을 땐 소박한 사람이라고 느껴지더니. 사람의 마음이 이토록 간사하다.


아무쪼록 기쁜 일이라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그의 소식을 더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한강 작가가 딩크를 그만두게 된 계기"라는 제목의 게시글이 있어 눌러보았더니, 위와 같은 글이 있었다. 예쁜 글이었다.

   '역시나 소중한 건 '지금 여기'에 있구나. 그도 그 순간을 발견한 게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내용이었다.


세상에는 온갖 나쁜 소식밖에 없다. 사람들은 회의적인 말만 한다. 세상의 가치는 저 끝에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것의 한줌도 가지지 못한 것 같다. 한강이 이야기한 '터널'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이 시기와 질투, 이 혐오와 경쟁, 이 수많은 갈등들. 그 터널을 생각해 보면 나는 이 터널을 무사히 넘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그 터널을 넘지 못하고 그냥 거기서 그만두기로 결정하기도 한다. 나조차 그렇다면 사랑스러운 나의 핏줄에게 그 터널을 걸어가도록 할 수 있겠는가. 낮은 출생률이 문제다, 문제다 이야기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왜 다들 그러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다 한강은 남편의 말 속에서 어떤 중요한 가치를 찾은 것 같다. 삶의 가치란 손 닿지 못할 저 먼곳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텔레비전 너머로 들려오는 절망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여름에 수박이 달다. 비는 차갑고, 눈은 더 차가운데 포슬거리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 밤공기는 폐 끝까지 차디차다. 꼭 세상이 "나 이제 차갑게 굴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지하철의 사람들은 정신이 없다. 누군가는 인상을 쓰고, 누군가는 키득거리며 웃고, 또 누군가는 깊은 고민에 빠져있는 것 같기도 하다. 가게의 종업원은 밝게 웃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애써 웃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순간들을 얼마나 알아차리고 살아가는 걸까? 저 멀리 있는 승진이 아니라, 저 멀리 있는 투자 대박이 아니라, 저 멀리 있는 학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마주할 수 있는 그 모든 소중한 것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사실 지금 이 순간 마주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는 건 우울증을 치료하는 다양한 인지치료에 거의 대부분 포함될 정도로 아주 중요한 마음 습관 중 하나다. 사람의 마음은 힘들 때 항상 과거나 미래에 머물기 마련이다. 집중력은 흐려지기 마련이다. 일상 속 행복들은 눈에 안 들어오기 마련이다.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방법이 '지금 여기'에 벌어지는 일들에 집중하는 연습이다. 나의 신체에 집중해 보고, 나의 호흡에도 집중해 보고, 먹는 음식이 어떤 촉감이고 어떤 느낌인지 집중해보는 것. 커피의 씁쓸한 맛에도 집중해 보고, 사랑하는 이의 표정과 눈동자에도 집중해 보고, 나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들 또한 거리를 두고 알아차려보는 것. 그리고 조금씩 내가 정말로 가치롭게 여기는 것들로 초점을 옮겨가며 그러한 일들에 집중해 보는 것. 이러한 습관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울과 불안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삶의 의미를 되찾게 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을 되찾게 한다.


몇 년 전이었던가, 아끼던 동생 중 하나가 제법 깊은 우울증에 빠져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의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인지치료에 대해서도 깊은 지식이 없었다. 하지만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나름대로 깨우친 삶의 의미가 떠올라 그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준 적이 있다.

   "너, 한 겨울에 자판기에서 300원짜리 율무차 사먹어 본 적이 있니?"

   "자판기? 요즘도 자판기가 있나? 최근에는 없는데. 왜?"

   "그냥. 내 말이 생각나면 한번 사 먹어봐. 다른 생각하지 말고. 아, 이 추운 겨울에 이 자판기에서 나오는 율무차에는 이런 맛이 나구나. 겨울 바람을 맞는 율무차는 금방 식어버리구나. 식어버린 율무차는 또 다른 맛이 있구나. 겨울 바람이 이렇게 차구나. 차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라고."


그렇게 허무맹랑한 조언을 하고 나서 며칠 뒤, 그 동생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마셨어. 율무차. 고마워. 정말 고마워." 율무차 덕분이었을까. 그 친구는 깊은 무기력에서 벗어나 다시 학업에 정진했고 지금은 아주 훌륭한 의사가 되어있다.


삶의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여행이 즐거운 것은 여행지가 좋아서가 아니다. 파인다이닝이 맛있는 것은 그 음식이 10배씩이나 맛있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그토록 행복하지 못한 것은 그 멋진 집과 차, 좋은 직장과 졸업장을 가지지 못해서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지금 여기'에 있다. 우리 인간은 '지금 여기'라는 이 소중한 가치를 항상 죽기 전에 깨우친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한강은 그렇게 출산을 결심했다. 노벨상 수상이 발표된 어제 저녁에는 그 아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 한강에게 더 기쁘고 소중한 것은 노벨상이 아니라, 하나뿐인 그 해 그 가을을 보내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노벨상 수상, 축하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울증은 질환이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