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의미

by 루펠 Rup L

그때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고민은 스무 살 즈음에는 필수라고 생각한다. 중고등학교 시절도 상관은 없지만 사춘기가 지나는 그 시기에 인생에 대한 고민이 겹치면 너무 많은 방황을 하게 되기 때문에 스무 살 즈음 자유로워졌을 때 충분한 시간을 좌절하거나 짓눌리지 않은 상태로 고민을 해야 한다. 그때 고민을 하면, 해답이 나오지 않더라도 그 해답이 나오지 않은 것 또한 일종의 답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갈 수 있다. 그때 나는 성당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전례부에서 때로는 때로는 복사 활동도 하면서 열심히 성경을 읽었다. 가톨릭 서적들과, 때로 개신교 서적도 많이 읽었다. 사후에 대해 확실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확실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천국에 대한 것은 성경에 의해 정의되지만 성경은 교회가 인준한 서적일 뿐이다. 교회가 증거가 없어 인준하지 않은 다른 책에 있는 내용이 오히려 진실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교회는 성령이 인도하신다는 ‘믿음’에 근거해서 모든 것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내린 결정이라고 해도 스스로의 양심에 비추어 보다 소극적으로 결론을 내렸을지도, 양심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야말로 교회 조직의 이 세상에서의 권력 우위를 위해 몸 바친 사람이 전혀 없을 수 있느냐 하는 의심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심지어 증산도 도전까지 읽더라도, 누군가 그렇게 이야기했다, 어디의 전통이 그렇게 전해진다 같은 것 외에는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 고통이 있으니 신도 없는 것이다, 같은 결론은 내지 않았다. 톨스토이처럼 그때도 막연하게나마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시기가 갑자기 온다는 것은, 휴거와 같은 지구적인 행사가 열린다는 게 아니라 개개인의 입장에서 나 자신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에 와서야 그게 그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만큼 매우 혼탁하고 불확실한, 하나의 아이디어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실 언제 그날이 올지 모른다는 말은 개인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흔히 하는 말이 아닌가.

신부님과 걸으면서 즉석에서 고해성사를 하겠다고 할 만큼 열심이었지만, 어느 날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조금 거리를 두어 보자고 생각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그날로 성당을 비롯해서 가톨릭학생회 활동도 모두 중지했다. 성경도 덮었고,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을 읽었을 뿐이었다. 혹시 성사들은 우리나라에서 절기와 명절을 지내듯이 유럽의 풍습을 그대로 받은 것이 아닐까, 등 당시 유행하던 물병자리 예언서 같은, 혹은 자이가이스트 같은 영화에서 나온 말들을 듣고 갈등이 머릿속에서 마구 일어났다.

기존의 종교들의 총합이 기독교라는 주장은 재미는 있었지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그런 것은 일종의 사상적인 진화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단계를 거쳤기 때문에 로마가 기독교를 수용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방향의 아이디어였다. 오히려 내가 발을 디디고 가톨릭을 공격하는 어떤 말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땅을 원했다. 베드로, 즉 반석을 원했다.

베드로는 말 그대로 반석, 바위였다. 그에게 발을 디디면 안 될 것이 없다. 그가 한 것처럼, ‘주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는 말을 조그맣게 되뇌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것이 변화되었다. 순식간이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이 1초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1초도 안 되는 시간조차 소비하지 않고는 만들어지지 않는 그 말이 완전히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밀가루 떡이 예수님의 몸이 되듯 베드로의 고백을, 1초 정도 되는 길이의 그 말을 1초 정도 되는 시간이 걸려서 입 밖으로 온전히 나와 ‘말’이 되는 순간, 나는 그런 설명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것이 믿음이다. 믿는 것이다. 증거가 있어야 믿는 것이 아니다. 사기꾼을 믿는 것도 증거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믿음은 어떤 것도 증거로 만들어 준다. 증권 시장에서도 허다하게 보는 것이 아닌가. 신앙에 증거를 찾으면 영원히 믿을 수 없다. 믿으면, 모든 것이 신앙의 증거가 된다. 사기꾼에게 사기당해서 돈을 바치는 것이 나쁜 이유는 돈과 시간을 잃기 때문이다. 단순히 잃는 것이 아니라 넘겨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앙은 나를 약해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강해지게 한다.

그 고민의 시간 동안 많은 책을 읽었다. 종교 서적도 읽었고, 과학 교양서도 읽었다. 경제에 대해서도 공부했었다. 그야말로 인생을 단단하게 만들 방법이 무엇인가를 찾아 헤맸던 것 같다. 신앙에 기대려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흐물흐물했기에, 기반이 있더라도 온전히 세울 수 없을 것 같았기에 뿌리부터 기둥까지 세울 수 있는 뭔가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결론은, 나는 내 인생을 살아야 하고, 신앙 또한 나의 신앙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드로가 단단하게 기반을 세워 주더라도 줄기를 세우는 일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결국은, 인생을 기대야 하는 곳은 찾지 못했다. 그런 것은 없다. 인생은 어디에 기대어 세울 수 없다. 인생을 세워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고, 그것이 삶이다. 단지, 인생 전체가 무너지지는 않으리라는 기본적인 확신만 있으면 된다. 그것이 종교일 수도 있고 가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때서야 인생에서 모든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단지 답을 찾으려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생에 큰 용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이후로 이것저것 시도하면서 신앙에 열심이었다가 다시 성당 문지방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가를 반복했다. 이런저런 기도문을 매일 외워보기도 하고, 묵주 기도에 열심을 보이기도 했다. 한때는 성경을 매일 읽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삼종기도도 빼먹지 않기도 했다. 준주성범을 열심히 읽어 보기도 했고 성체조배를 매일 하기도 했다. 심지어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 기도뿐이기는 하지만 성무일도를 바치기도 했다. 결론은 나에게 맞는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열심한 시간은 일초 일초가 내 신앙을 잃지 않게 한다. 다시 허술해지는 그 시간들은 신앙을 잃고 무너지는 시간이 아니다. 열심했던 시간들은 내 인생의 세포를 단단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내 인생은 곧게 일어선다. 인생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인생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 인생에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확신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여전히 나는 내 인생으로 실험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 실험은 죽을 때까지 이어질 수도 있고, 그전에 답을 찾고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다가 하느님의 나라를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런 것이 궁금하지 않다. 어떻게 되든지, 내 인생은 흐물흐물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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