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와 다섯 손가락

글 쓰는 환경의 변화와 그렇게 써진 글에 대하여

by 루펠 Rup L

전면 전체가 화면이 되기 전의 휴대폰은 뭔가를 입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키패드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저는 어쩔 수 없이 천지인 키보드를 사용했습니다. 제 휴대폰은 천지인 키보드였지만 휴대폰 제작사에 따라 각각 한글 자모를 숫자 패드의 범위 안에서 조합해서 사용할 수 있는 자체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주 초창기 PCS 휴대폰에서는 무조건 커서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자음과 모음을 선택해야 할 때도 있었지만 곧 휴대폰 보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그런 꼼수 아닌 꼼수가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손에 한 번 익으면 양쪽 엄지만 가지고 글을 써야 하는 특성상 다른 제작사 휴대폰으로 교체하기 힘들어진다는, 제작사 측에서의 전략도 있었을 것입니다. 휴대폰을 바꾸면서 한글을 입력하는 속도가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불편을 감수하기보다는 아무래도 같은 회사 제품을 계속 사용할 가능성이 높아지겠지요.
터치 스크린이 나온 건 휴대폰에서 인터넷 브라우저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때와 맞물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첫 터치 스크린 휴대폰으로 트위터를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때는 인터넷을 하면서 속도 때문에 페이지 별 용량도 계산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트위터에서 그래픽 같은 것을 로드하지 않는 기능을 가진 모바일 브라우저를 수소문해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키패드가 있다가 없으니 눈으로 보지 않고 글자를 입력하는 것은 일단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화면이 터치 스크린이 아니라 손톱으로 눌러 주어야 했기 때문에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입력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오타 방지를 위해 화면에 띄워준 키보드를 눈으로 보면서 입력을 해야 했고 영문은 각 키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입력하는 예전 키패드 방식으로는 너무 불편했기 때문에 쿼티 키보드로 이미 변경했던 터라 한글도 쿼티 키보드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단, 그 시기는 아이폰으로 휴대폰을 교체한 후에 찾아왔습니다. 그전에 사용하던 엘지 아르고폰은 터치할 때 손톱으로 누르는 게 정확도가 떨어지는 것 같아 핸드폰을 구매할 때 상자에 들어 있던 터치펜을 썼는데 그러다 보니 그 터치펜으로 한글을 쓸 때는 쿼티 키보드를 띄워서 누르는 것보다는 천지인에서 작성하는 것이 훨씬 편했습니다. 쿼티는 아무래도 터치펜 하나로 종횡무진하며 치기에는 힘드니까요.
아이폰으로 바꾸고 나서는 현재의 휴대폰처럼 말 그대로 터치만 하면 되는 정전식이어서 엄지로 치기에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처음 사용하면서는 오타가 날 수밖에 없긴 했지만 익숙해지자 곧 천지인 키패드를 사용할 때 수준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제가 원래 글을 빠르게 작성하지는 않는 편이라 남들보다 느린 대신 오타가 적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정말 빠르게 치면서 오타는 저보다 적은 사람이 제 주위에도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두 엄지로 쿼티 키보드를 가지고 글을 쓰는 것과 블루투스 키보드를 연결해서 열 손가락으로 글을 쓰는 것은 사실 저에게는 속도 면에서 큰 차이가 없습니다. 터치 키보드라고 해서 딱히 빨리 치는 것도 아니고 물리 키보드라고 해서 분당 타수를 올리려고 노력한 것도 아니니까요. 그냥 도구일 뿐이라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구 욕심이 있다 보니 키보드가 몇 종류가 있기는 합니다.
단, 차이가 있다면 엄지로 작성하는 것의 문제는 아니고 터치 키보드라서 생기는 문제인데, 화면에 쓸 때는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곧잘 오타가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시선이 계속 키보드를 향해야 합니다. 어차피 빠르게 쓰지 않아서 오타를 방지하는 효과는 탁월하지만 그 때문에 신경이 분산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할 얘기가 있어서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상관이 없지만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는 글쓰기를 하는 데는 방해가 많이 됩니다. 평소 빠른 편이 아닌데도 일부러 더 천천히 글을 써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오타를 막기 위해 천천히 입력하는 만큼 터치 위치에 신경 쓰느라 생각이 느려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둘이 얼마나 조율을 절묘하게 해내든지 간에 자연스럽게 글을 쓴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휴대폰으로도 종종 글을 씁니다. 생각나는 주제가 생가면 에세이를 쓰지 않더라도 주제만이라도 메모를 합니다. 그러다가 생각의 가지가 뻗어 나오면 얼마까지는 같이 메모하지만 그 이상이 되면 그냥 양손으로 제대로 잡고 집중해서 작성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신경이 조금이라도 덜 쓰이는 방법을 고민했더니 결국 신경이 쓰이는 것이 오타 때문이었고, 어차피 키보드를 쳐다봐야 하는 거 키보드의 크기를 키우면 보기 더 편해져서 오타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 휴대폰 터치 키보드는 좌우로는 최대 크기이고 세로로는 더 길게 늘였습니다. 시선을 피해 위아래로 잘못 눌리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인데, 원래 눈에 다 들어올 만한 속도로만 손가락이 움직여서인지 실제 효과는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고민을 전혀 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물리 키보드를 사용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물리 키보드를 내려놓고 그 위에 양손을 올려놓으려면 지하철 같은 장소는 좀 그렇고 카페나 식탁 정도는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엄지 외의 손가락들이 촉각을 동원해 뛰어듭니다. 열 손가락이 모두 동원되어 글자를 찍어내고 두 눈은 화면에 가 있고 손가락이 새로 입력한 글자와 그 앞에 작성되어 있는 글의 내용을 조합하어 다시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 사용합니다. 남들 눈에는 빠르지 않지만 멈추지 않고 한 글자, 한 글자 손가락이 조금씩 여기저기서 까딱까딱하면서 화면에도 검은 글자가 속속 들어찹니다. 엄지 둘이 움직이면서 글을 쓸 때도 화면만 보면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원되는 손가락부터 다른 것이 현실입니다.
둘의 차이를 최소화하는 것이 제 의식의 최대 임무입니다. 무의식은 계속 생각의 가지를 키워 나가 주어야 합니다. 매번 글 쓰는 환경이 같을 수는 없으니까요. 다른 환경, 다른 도구가 능률을 떨어뜨리거나 생소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는 있으나 의식이 이런저런 조건들을 모두 합쳐서 좋은 분위기인 것'처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아니면, 무의식 입장에서는 매번 좋은 환경인 것처럼은 만들어주지 못하더라도 비슷한 분위기만이라도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엄밀히 말해 중간 과정이 어찌 되었던 나오는 글은 비슷해지는 결과는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이동 중에 작성하는 글의 분위기가 조금 더 가벼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정도의 차이뿐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글은 키우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씨앗에서부터 싹을 틔우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글에 심어 그 싹과 글이 함께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놔두면 손가락만 휘둘러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고민을 한다고 좋아지지도 않습니다. 마치 비료를 많이 주거나 물을 많이 준다고 식물이 크게 자라나거나 작물의 소출이 늘어나거나 하는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 것과 같습니다. 농부가 똑같이 한다고 했는데도 매년 비닐하우스에 사용한 비닐의 브랜드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면 누구나 뭔가 이상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부수적인 조건은 계속 바뀌더라도 일조량이나 강우량 정도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질 뿐 대체적으로 수확의 질과 양이 일정하다면 그 농장은 거래할 만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것입니다.
제 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글을 쓰는 도구 같은 부수적인 것 때문에 글의 분위기나 길이가 천차만별로 다양하게 오락가락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반복적인 실험과 연습이 만들어낼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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