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와 편안한 글쓰기

by 루펠 Rup L

'백지'
백지상태라는 말이 있습니다.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상태를 백지상태라고 하지요. 놀라거나 당황했을 때 사고가 정지되는 것을 표현합니다. 말 그대로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옛날, 종이 한 장 놓고 무엇이든 써야 했을 때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이 종이가 내 머릿속처럼 하얗다.'
이제는 시대가 변해서 글을 작성하는 곳이 반드시 하얀 종이는 아닙니다. 워드프로세서를 열면 종이를 흉내 낸 그림을 보여주고 거기서 가장자리 마진을 조정하고 인쇄되는 것과 동일한 모양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종이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아마 글을 쓰기 직전의 느낌은 메모장 프로그램을 열거나 워드 프로그램을 열거나 거기서 거기일 겁니다.
마찬가지로 휴대폰으로 글을 쓸 때도 백지라는 느낌은 없습니다. 제 경우에는 전자책으로도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기 때문에 전자잉크여서 액정 배경이 옅은 올리브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색인데 마치 유리 뒤에 갱지를 받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이 모든 것이 글을 쓰기 위해 마련된 종이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종이와는 달리 설정이나 색이 여러 가지다 보니 그 압박감이 굳이 하얀색으로는 다가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특히 쓰고 싶은 말이 생기면 그제서야 글을 쓰려고 주섬주섬 준비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창을 열어 놓고 '어떡하지?'라거나 '뭘 써야 하지?', 또는 '뭘로 채우지'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고, 다만 '시간이 지나고 글을 의무로 써야만 하게 되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날이 오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은 가끔 듭니다. 그런 때 글을 쓰려고 컴퓨터든 뭐든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커서가 깜빡거리거나 하는 것을 어떻게 보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궁금하지는 않습니다. 워낙 억지로 뭔가를 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압박감을 상상하는 것은 저와 맞지 않습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오랜만에 '리미트리스'라는 영화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맞는 영상 효과 때문에 몇 번을 반복해서 보다가 애더럴이라는 마약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는 그 영상 효과가 마약 미화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잘 보지 않게 되었는데, 주인공이 글을 쓰지 못하다가 그 약의 효과로 글을 미친 듯이 쓰게 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약의 효과를 강조하다 보니 전후 대조가 극적으로 나타났는데, 사실 글을 쓰는 장면은 그래픽까지 곁들여져서 현실감이 떨어지는 반면, 글을 쓰지 못하는 장면은 말 그대로 워드 프로그램을 띄워 놓고 깜빡거리는 커서만 보다가 한 줄 적다가 다시 백스페이스를 눌러 다 지워버리고 계속 화난 듯 깜빡거리는 커서의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농구공을 가지고 놀다가 나가서 술을 사 마시기도 하는, 정말 영감이라고는 자취도 없는 작가를 어디서 찾아내어 몰카를 찍은 것 같은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가끔 보고서를 쓸 때 화면을 그렇게 쳐다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머릿속에서는 목차를 정하고 있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실제로 빈 문서에 깜빡거리는 커서입니다. 그렇게 쳐다보면서 간혹 '만약 머릿속에 목차를 정하고 있지 않다면, 아예 뭘 써야 할지 모른다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보고서는 형식과 목적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에세이나 소설과는 다릅니다. 보고서가 써지지 않으면 항목의 세부사항이나 목적 둘 중 하나가 확실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반면, 자유롭게 써 내려가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건, 생각이 멈추었다는 뜻일 뿐입니다. 생각을 잘 따라가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초에 쓰려던 방향이 글을 쓰면서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것도 개성인지라 처음부터 끝까지 골격을 잡아야 글을 쓰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는 오히려 더 쓰지 못합니다. 한 부분이 끝나고 다음 내용을 채워야 하는 부분에 도달하면 '앞부분과 이 부분을 여기서 어떻게 연결하지?' 하면서 고민하는 사이에 생각이 끊어져 버립니다. 그 상태가 저로서는 백지상태에 가장 가깝습니다. 커서는 깜빡거리는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보이지 않고...
어쩔 수 없이 그럴 때는 그 글은 끝입니다. 더 이상 쓸 수 없습니다. 저에게 있어 글쓰기는 생각의 도구이기도 하다보니 '결국 남는 건 글이다' 같은 말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완성된 글보다 중요한 것이 그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온 생각들입니다. 글만 완성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기술적으로 칼을 대는 건 저에게는 오히려 독으로 느껴집니다. 보고서를 쓸 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항상 그렇다기보다는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쓰는 글'들이 그런 것일 뿐, 반드시 완성된 글이 나와야만 하는 상황일 때는 또 그 상황에 알아서 맞춰서 하겠지 싶습니다. 그냥 제가 '저는 글쓰기를 좋아합니다',라고 할 때의 그 글쓰기가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도구로서의 글쓰기인 것뿐입니다. 자유로워지면 백지는 더이상 압박이 아니겠지요. 마치 전쟁을 하는 장수에게 넓은 들판이 수많은 전투를 치러서 빼앗고 지켜야 할 목표로서 묵직하게 다가오지만 나그네에게는 이리 가도 좋고 저리 가도 좋은, 기분 좋은 풍경이 있는 땅, 그 정도에 머무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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