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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라는 건가, 여기는.

by 루펠 Rup L Mar 13. 2025

내가 사는 빌라 근처에는 공원이 하나 있다. 언덕에 위치한 그 공원은 구석에 운동기구가 여느 공원처럼 몇 개 있기는 하지만 사용하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저 사람들, 특히 위쪽에 있는 빌라촌에 사는 사람들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기 위해 급히 지나갈 뿐이다. 그래도 노숙자나 담배 피우는 학생이 없는 조용한 곳이어서 나는 가끔 공원 입구 쪽에 있는 벤치에 앉아 글을 쓰기도 하고 내리막길을 내려다보면서 스케치를 하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직 쓸 거리가 생각나지 않아 노트를 꼭 껴안은 자세로 멍하게 앉아 있는데 공원 밖 아스팔트에 노트로 보이는 것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뭘까, 노트가 맞는지 플라스틱으로 된 다른 무언가인지 궁금해하며 쳐다보다가 그냥 가서 보면 되지 내가 지금 뭐 하는 건가, 싶어 벌 일어나 벤치에 노트를 두고 일어나 터벅터벅 걸어갔다.
다가가서 보니 그건 노트가 맞았다. 노란 앞표지를 넘기자 <민서빈>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뒤표지는 젖어 있어서 찢어질까 싶어 넘겨보지 못했다.
앞표지 이후를 휘리릭 넘겨 보니 빼곡한 글씨가 눈에 띄었다. 하나하나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간간이 <피에르 유치원>이라는 단어들이 눈에 띄었다. 무슨 내용을 쓴 건지도 관심이 없고 왜 거기에 있는지도 궁금하지 않았지만 피에르 유치원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 유치원은 노트가 떨어져 있는 곳에서 스무 발자국이면 가는, 공원 바로 앞이었기 때문이었다.
똑똑, 유치원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사람이 돌아다니는 것 같은 소리는 안에서 계속 났지만 아무도 응답이 없었다. 쿵쿵, 조금 큰 소리가 나게 세게 두드렸더니 잠시 후 안쪽에서 조금 더 요란하게 걷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떤 할머니가 문을 빼꼼 열고 얼굴만 내밀었다.
"무슨 일이세요?"
"저... 이거..."
내가 노트를 내밀자 할머니는 노트를 바로 받지 않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게 뭔지, 그걸 내미는 게 무슨 뜻인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아, 민서빈이라는 사람 것 같은데, 피에르 유치원이라는 말이 쓰여 있어서요."
할머니는 내 발음이 이상했는지 내 말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는 것 같았다. 다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노트를 받아 들고
"알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문이 닫히기 직전에 급하게
"읽지 않았어요."
하고 말했지만 할머니는 들은 척도 않고 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다시 벤치로 돌아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오리 모양의 신기한 모양의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딱히 글로 쓸 만한 것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 아랫동네의, 중고 LP를 매입해서 틀어주는 카페나 가볼까 하고 일어났다. 거기 주인은 가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커피값을 받지 않기도 한다. 일어나기 전에 작품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자존심 상하는 절차가 필요했지만 지난번에는
"글을 참 따뜻하게 쓰시네요."
라는 말을 들었기에 딱히 나쁘진 않은 경험이었다.
한참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선 채로 구름을 보고 있자니 나사 같은 소용돌이었던 구름이 그냥 원통형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흥이 깨진 나는 그 카페나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 카페에 가려면 걸어가도 되고 20번 버스를 타고 다섯 정거장 지나 내려도 되었다. 그리고 버스 정류장은 피에르 유치원을 지나 한 블록 내려가면 있었다.
피에르 유치원을 지나는데 아까는 보지 못했던 BMW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유치원 정문을 지나려다 시동이 걸려 있어 혹시 유치원 입구로 나가려나 하고 머뭇거렸지만 전혀 움직임이 없어 그냥 어린이집 입구를 지나쳐 걸었다. 그때 승용차의 운전석 창문이 열리고 어떤 여자가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 순간적으로 든 생각은
"왜 차 안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
였지만 남 일이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 여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공원에서 글 쓰시는 분인가요?"
딱히 할 말이 없던 나는 그냥
"공원에서도 쓰고 집에서도 쓰고 카페에서도 쓰죠. 꼭 공원에서 쓰는 건 아닙니다."
라고 말했다. 그 여자는 내 말을 듣지 않는 게 틀림없는 자세로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바로 낚아채고 말했다.
"제가 민서빈이에요."
"아, 예."
그때 나는 감사 인사라도 하려는 줄 알았지만 여자는 그저 선글라스만 벗고 나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선글라스를 썼을 뿐이었다.
별 말이 더 이상 없기에 나는 꾸벅 목례만 하고 걸어서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긴 대화를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곧 여느 때처럼 구름이 조금 낀 밖보다 더 어두침침한 조명이 켜진 버스가 왔다. 하얀색이었는데 한 번도 세차를 하지 않은 건지 단순히 색이 바랜 건지 군데군데 얼룩이 있는 누런색이 된 버스였다.
내가 버스에 올라타고 보니 모두 앉아 있었지만 내가 앉을 자리없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서 있는데 어떤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손잡이를 잡고 섰다. 그 자리에 얼른 가서 앉을까 말까 고민하는데 일어선 사람이 눈치를 챘는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바로 빈자리로 냉큼 가서 앉았다. 방금까지 자리에 앉아 있다가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 준 사람이 내가 앉것을 확인하고 나자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옆에 앉아 있던 건장한 청년이 움찔했을 정도였다.
"여러분, 지금 인간은 절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향해 둘러보았다. 앉아 있는 사람들 모두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 사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인터넷 다들 쓰시죠?"
다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여러분, 파시스 아시죠?"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파시스라면 우리나라 최고의 의류 브랜드인데. 노이즈 마케팅을 하려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제가 파시스 창업멤버입니다!"
어? 얘기가 다르다. 창업멤버라면 아리사와 뒤터 체른, 우시남뿐일 텐데, 저 사람이 뒤터 체른? 우시남?
"저는 뒤터 체른입니다."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이 동네 버스에? 그가 버스를 탄 이유는 끝까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일어서서 연설을 한 이유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파시스는 옷감 하나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들여 염색업자부터 섬유 공업사 등 모든 사업자들을 일일이 불러 시험하고 인터뷰하고 그 노하우를 기반으로 디자이너를 섭외하는 과정을 거쳐 왔습니다. 그래서 명품부터 생활복까지 인기를 끈 것입니다. 경쟁이요? 경쟁에서 살아남는 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결국 협업입니다. 다 같이 살아야지요!
그런데 여러분, 그 협업의 시대가 끝난 것 같습니다. 그럴듯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정말 관용어로 끝나지 않는, 우리가 맞서야 하는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옷감과 실은, 그리고 염색 기술과 디자인은 이제  더 이상 전문가들이 세세히 고르고 고심해서 선정하는 게 아니라 아무나 선택하라고 업자들이 인터넷에 성의 없이 올려 버립니다. 개개인은, 심지어 전문가들조차 사진만 보고 품질을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이렇게 비전문가들이 취미 삼아 실과 바늘을 들고 취미 삼아 바느질을 해 보게 되면서, 사람들의 눈이 많이 낮아졌습니다. 형편없는 물건을 만들어 팔아도, 자기가 직접 만드는 것보다 나으면 구입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수준의 하향 평준화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전문가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인류 문화 수준을 끌어올리던 흐름이 말입니다! 이제! 깨져 버린 겁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이 버스에서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서 나는 뒤를 돌아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 창밖을 보는 사람들만 있을 뿐, 열댓 명 중 그를 바라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 사람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기에 나름 씁쓸했다. 그는 인터넷을 탓하고 DIY를 탓하고 있었다. 나는 꿈이라는 자각은 없었지만
'아니지, 아직 여기AI는 한참 남은 미래인데 벌써부터 위기의식이라니 그건 너무 설레발이지'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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