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동글동글하다가 조금만 다듬으면 글로 표현할 만큼 꺼끌꺼끌하게 만들 수 있을 듯한 생각이 있다. 그 생각은 풍경의 형태일 때도 있고, 영화처럼 일종의 흐름일 때도 있다. 자연을 모사한 그림도 작가의 스타일에 따라, 그 자연의 계절과 시간대에 따라, 배경의 재질에 따라, 사용한 재료에 따라, 재료를 칠하는 데 사용한 도구에 따라, 작가가 결정한 색채의 정의에 따라 제각기 다른 모양과 느낌이 되듯이, 글도 수많은 그 순간의 조건에 따라 천차만별의 형태를 띠게 된다. 자연도, 순수한 생각도 그 안에 있으면 틈 없이 이어지는 부드럽고 그 자체로 하나인 무엇인가이지만 사람이 그것을 옮기면 어딘가엔 틈도 있고 깎아지른 경계도 있으며 하나의 요소가 또 다른 요소와 별개의 개체인 것처럼 취급될 수도 있다. 그것을 읽고 '자연과 비슷하다'거나 '내 생각과 비슷하다'라고 하는 것은 작가와 감상자가 세상을 보는 방향이 유사하다는 점 외에 무엇을 뜻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과 관계없이 작가가 독자에게 느꼈으면 하고 요구하는 것을 느끼는 것은, 오히려 의도를 작품에 잘 녹인 것이니 잘 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와 비슷한 생각을 찾아 읽고, 내 관점과 비슷한 그림을 찾아서 보는 것은 어쩐지 그냥 내 일상과 비슷할 것 같지 않은가? 내 관점과 다른 의도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오히려 내 사유의 생활에 해롭지 않은 물결을 일으키는, 조금 더 삶을 생에 가깝게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생각을 한다. 그리고 생각을 어떻게 다듬을지 고민을 한다. 어느 방향으로의 의도를 담을 것인가. 이때의 다듬는 과정은 마무리 붓질이라기보다는 부드러운 부분을 정으로 쳐서 뾰족하게 만드는 과정에 가깝다. 다듬는데 부드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뾰족해지는 이유는, 사람의 의도는 화살표 모양으로 방향을 가리키도록 되어 있어서 곡선이 없기 때문이다. 직선도 없고 경계도 없이 부드럽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두리뭉실한 글은 아무것도 담지 못한다.
이제 방향을 잡았으면 머릿속에서 잘 만들어진 작품을 현실로 꺼내올 차례이다. 수첩을 꺼내고 불펜을 든다. 이제 글을 쓴다.
글을 쓰는 일은 어렵고 재미있다. 생각을 정리했다고 생각을 했지만 그 뼈대에 덧붙일 마감재가 계속 생각에 이어 붙는다. 당연한 일이다. 화살표 자체로 온전히 서 있을 수 있는 건 미래가 아니라 막연한 하늘을 가리키는 것뿐이다.
글을 다 쓰면 다시 읽을 기회가 있다. 가장 지루한 부분인데, 키보드로 다시 옮겨 쳐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키보드를 쓰면 참 좋을 텐데 불행히도 나는 손글씨를 써야 머릿속을 헤집지 않고도 생각을 잘 따라가는 타입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키보드로 글을 옮기면서도 간혹 수정할 때가 있다. 이 과정이 지루한 만큼, 글을 쓰거나 맞춤법 검사를 하는 건 그대로 '글을 쓴다', '맞춤법 검사를 한다'라고 말하지만, 종이를 펴놓고 키보드로 옮기는 건 '작업'이라고 부른다.
어제는 오전 내내 세 편만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고치기도 하고, 글씨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도 간혹 있었다. 어제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시선' 하나뿐이었는데도 세 편밖에 작업을 끝내지 못했다.
글쓰기와 작업에 들어가는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 투자인지 매몰인지 모르겠다. 적어도 투기일 수는 없으니 다행인 걸까. 그리고 재미있다. 작업이 지겹기는 해도 싫지는 않다. 지금까지 '지겨운데 좋아하는 일'이라는 게 있을 수 있다는 건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다. 그만큼 글쓰기의 세계는 지금의 나에게도 생소하다.
나중에는 지겨움의 끝판왕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바로, 글을 분류하는 일이다. 800편을 쓸 때까지 미루어 두려고 하는데 실제로는 800편씩이나 되는 걸 다시 읽고 분류할 것을 생각하면 까마득하기도 하다. 그래도 글은 계속 쓰겠지. 글을 쓰지 않아도 생각은 계속하는데 그건 단지 글을 쓰지 않으면 생각이 제자리를 맴돌기 때문이다. 글을 써야 생각에 진전이 생긴다. 똑같은 밥을 계속 먹는데, 계속 먹기만 하고 생각에는 진전이 없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그렇게 글을 쓰면서 생각이 계속해서 새로운 곳에 발을 디디는 것을 보는 재미가 오늘도 또다시 볼펜을 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