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와 이미지

by 루펠 Rup L

빈프리드 게오르그 제발트의 <현기증, 감정들>에는 사진들이 많이 나온다. 자료 사진이라기에는 흑백이어서 원본 사진을 다시 찾아보게 되는 면이 없잖아 있지만 그럼에도 그 사진 자체로 글을 보조하는 충분한 역할은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원에 들어갔다고 하면 그 정원 입장권을 찍은 사진, 어느 건물에 들어갔다고 하면 그 건물 사진이 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의 사진 이야기가 나올 때는 그 사진이 나오기도 한다. 글자의 배치를 보면 반드시 그 사진이 그 자리에 들어가야 한다고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그 사진들이 글의 일부인 셈이다. 처음부터 글자처럼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한글 프로그램을 사용하다 보면 그림 속성에 들어가서 <글자처럼 취급>이라는 설정을 하게 되는데,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마치 글자처럼 반드시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것이 문학에 이미지가 들어간 사례일 수는 있겠지만 삽화의 기능을 사진으로 대신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특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문학에서 사진과 컬래버레이션을 한 예시라고 보아야 하나? 편집자가 그 자리에 똑같은 장소의 컬러 사진을 넣는다면? 혹은 원래는 컬러였는데 편집 과정에서 흑백이 되었다면? 아니면 해상도가 떨어졌다면? 글자는 최초의 원서보다 번역본이 언어와 출판사의 사정으로 글자체가 더 가늘거나 굵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사진도 좀 더 뭉개져도 할 말이 없지 않을까? 글자는 그 모양 자체로 뭔가를 하지 않지만 사진은 그 외모로써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에 문제가 조금 달라진다. 그 사진을 문장들의 어느 정도로 존중해야 하는지도 그중 하나이다.
원서는 찾아보아야 하겠지만, 한글판에서는(충분히 원래 해상도대로 출판할 수 있는 기술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진들을 몇 번 보고 나서는 마치 판화 같다는 생각을 했다. 1800년대 판화도 사진에 못지않은 해상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글자만 간신히 나온 티켓 사진을 보면 그 판화들의 해상도에 달하는 세밀함조차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마치 정사각형을 예시로 보여주자면

정사각형 정사각형
정 사 각
형 정 사
각형정 정사각형 정
사 각 형
정 사 각
형 정사각형 정

위 모양과 아주 해상도가 낮은 주사위 모양 판화 혹은 흑백 사진과 차이점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위 그림은 정사각형이 모여 만든 정육면체라는 점을 글자로 표시하고 있는데 글자 대신 점을 찍어도 어느 정도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매우 작은 크기로 인쇄하게 되면 글자가 뭉개져서 그냥 그림으로 보일 것이고. 그리고 그만한 크기가 된다면 초보자가 고무판을 깎아 만든 판화라도 비슷하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글자의 배열로 뭔가를 표시한다는 것은 핸드폰 문자로 각종 그림을 보내는 것이 유행이었던 Short Message Service 시대에는 나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책으로는, 그러니까 장문의 정보를 전달하는 용도로는 단지 주의만 흐트러뜨리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런 면에서는 위 도형은 다음과 같이 표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정육면체)

대다수의 사람들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대상이라면 위와 같이 통용되는 이름을 대는 것만으로도 상상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렇지 않다면, 사진이나 그림을 삽입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 책에서처럼 단순해진 흑백의 사진이라면 간신히 모양만 구분할 정도가 되려면 정보량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검은 부분을 모두 한 가지 글자로 채울 수도 있고 점으로 이루어진 그림이 될 수도 있다. 타자기에 종이를 이리저리 끼워가며 그림을 그리는 영상이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각종 글자를 이용해서 풍경 그림을 그리는데, 종이를 조금씩 위치를 바꿔가서 획을 겹치게 하기도 하고 방향을 돌려서 효과를 주기도 했다. 엄밀히 말하면 타자기의 글자판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뿐, 엄밀히 말해 알파벳이 새겨진 도장들을 찍어서 그림을 그리는 것과 다르지 않고 단지 타자기를 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지만 신선한 아이디어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이런 고민들이 생기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림처럼 글 역시 최초로 우리에게 닿는 감각은 시각이기 때문이다. 그림과 글자의 틈이 생각보다 많이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이다. 타자기로 그리는 그림은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도구로 그림을 그린다는 상징성에서, 글의 일부로 들어간 사진은 시각만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시각을 통해 받아들여진 다음 해석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글의 일부가 된다는, 그러면 해당 내용 안에 그 사진을 설명하는, 혹은 관련 있는 글이 있을 것이므로 사진 역시 일종의 해석을 한 번 더 거치게 된다는 상징성에서 중요하다. 글과 동등한 사진이라는 것은 백과사전에서는 오래전부터 사용한 방법이지만 정보를 전달한다는 하나의 목적에서만 동등했던 백과사전과는 달리 줄거리 설명, 혹은 추억의 일부로서의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글을 읽는 것은, 글을 쓰는 것은 한 단계를 절대 숨길 수 없다. 문장으로 만들고 문장을 상상으로 만드는, 우리 뇌에서만 할 수 있는 과정. 여기에 그림을 넣는 것으로 문장을 상상으로 만드는 과정을 도울 수는 없다. 누구나 느꼈겠지만 그건 돕는 것이 아니라 상상을 덜어 상당 부분 부하를 줄여줄 뿐이다. 상상의 폭을 좁히기 때문이다. 상상의 폭을 좁히는 것을 도와준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책에서의 사진들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책의 일부인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 사진들을 제외하고는 그 책을 도저히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책을 쓸 때 마음은 어땠을까? 기억의 공유인가? 기억의 공유라면 최대한 그 기억에 가깝게 상상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 사진들은 목적에 맞게 그 자리에 배치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진들을 통해 한 번 상상이 고정되면 그 책을 읽을 때뿐만 아니라 떠올릴 때도 그 상상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동일한 것을 보는, 그 사진을 중심으로 상상의 동심원을 공유하는 셈이다.

중간에 가려던 방향으로 돌아와서 판화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아주 작은 잉크방울들이 모여서 만든 그림이 있다. 그 잉크방울들이 만드는 점을 점점 줄이면 점묘법이라 불리는 형태의 작은 점들이 모여 거시적으로 하나의 모양을 이루는 그림이 된다. 거시적으로도 요소들을 모아서 그 요소별로 다른 모양으로 표시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요소들마다 이름을 붙여서 그림 안에 배치를 한다. 그리고 그 이름들은 그 요소들의 크기에 맞게 채워진다. 여기까지 하고 나면 마치 글자를 가지고 만든 그림처럼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내가 글을 쓰는 도구 상 위 글자-그림보다 잘 표현할 방법은 없지만 얼마나 잘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위의 그림에서 해바라기와 줄기들, 잡초들이 눈에 띈다. 실제로는 줄기가 글자의 크기로 인해 너무 두껍게 표현된 감이 없지 않다. 사실은 전체 문단(저것도 문단일까?)도 더 커야 하고 해바라기라는 글자가 채워지는 공간도 훨씬 넓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저것만 보아도 어느 정도 상상이 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그리고 저 그림을 다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듬성듬성 잡초가 나 있는 땅 위로 해바라기 네 그루가 눈에 띄었다. 왼쪽에 한 그루가 떨어져서 고개를 들고 있고, 나머지 세 그루는 약간의 간격만 있을 뿐 거의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파랗디 파란 여름 하늘 아래에 이 모든 것들이 빛나고 있었다.)

태양을 그리는 것을 깜빡해서 빛나고 있다는 말은 사족같이 되기는 했지만 사진이나 그림의 해상도가 단순화되고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글자 단위를 삽입하고 나면 이것을 바탕으로 다시 말이 되는 문장으로 환원시키는 과정을 보고 싶었다. 사실이다.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보고 싶었던 것이다. 사진이 글의 일부가 되는 것은 정확성을 위해서라기보다, 상상보다 우리 자신(독자)을 향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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