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다다 Aug 18. 2021

예술의 세계, 서핑의 세계, 자유의 세계

똑같은 파도는 절대 오지 않는다

매일 그림일기를 그립니다. 그림의 형식은 아주 제멋대로이지만요. 일기를 글로 쓰면 결국 읽는 데 시간이 걸리고 뭔가 색채감이 다 사라진 밋밋한 기록이 될 것 같아, 그림을 그려보기로 했습니다. 올해 내 맘대로 인생의 계획이었으나, 매일매일 잘 그리지도 못하는 그림을 그리지는 못했습니다. 열흘 정도 지나면 그림을 그리며 뭘 했지 생각하는 나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루를 정리해보고 일주일을 정리해보니 아주 잘 살았다 싶습니다. 최대한 열심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네, 싶습니다. 돈은 요새 주식이 잘 안 되니 못 벌었는데, 그래도 하고 싶은 것 했구나 하면서요.

 


오늘도 일어나 요가하고, 사다놓은 오이와 양념으로 만든 오이무침에 해놓았던 라따뚜이며 감자햄볶음 같은 것을 먹고 집안을 좀 정리하고 화분에 물도 주고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다 저녁으로 역시 냉장고에 있던 재료로 조개바질파스타를 해먹고 내일 방문하기로 한 친구를 위해 복숭아잼을 사러 갔다 왔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배가 불러 바닷가를 걷다 보니 1만보를 채우고 집에 와 이웃 친구와 반찬을 나누고 (그 친구는 집에서 보내온 열무김치와 깻잎지를 주고 저는 며칠 전 담았던 양배추절임과 이웃에서 받은 옥수수를 주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뭘 하고 싶은 거지 적어보니,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깨달았습니다.

 


인생의 고민을 한 문구로 정리하자면, 예술과 노동 사이였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자녀로 태어나 사랑은 받았으나 노동이라는 짐을 대물림 받을 수밖에 없는데, 나는 이 노동을 성스러이 여기기에는 호기심과 반골기질이 넘쳐, 세상은 왜 이런가, 사람들은 왜 그럴까, 이런 생각을 하며 살고, 누군가 보기에는 잘했는데 싶은 대학원까지 졸업했으나, 이런 기질과 현실이 겹치며 내가 생각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삶, 9-6의 삶이 아닌 다시 내 인생을 짜보기로 한 이 지점에서, 나는 잘 하고 있구나, 스스로 평점을 내렸습니다. 왜냐면 나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이요. 오늘 주식이 안 된 건 안 행복하고, 몇몇 안 행복 요소가 있으나, 오늘도 바다를 보러갈 수 있고, 어제는 자전거를 타고 경포까지 다녀왔고, 아직은 어쨌든 경제적으로 누군가에게 힘겨움을 고백하지 않아도 되고,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어, 내 시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제는 유명하다는 서핑올림픽 경기중계를 보다 인생의 파도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그래서 마음껏 할 수 있는 대로 살기 위해 서핑을 구경하러 갔습니다. 들어야 할 수업이 있어 줌으로 수업을 듣기 위해 귀에 이어폰을 끼고 강의를 들으며 서핑하는 것을 보았는데, 내가 갈 수도 없는 깊이의 바다에서 파도를 기다리고 그 파도 위에 서서 바다를 만끽하는 사람들을 보며, 신기하고 멋있고 즐거웠습니다. 절대 여기에서 살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일들이죠. 수업 내용도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들으며 이런 식으로 서핑을 볼 수 있다니, 이건 정말 행복이다 싶었습니다.  



세상에는 서핑을 하는 사람과 서핑을 구경하는 사람이 있듯, 예술을 하는 사람과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예술대를 졸업한 사람이지만, 예술은 누가 하는가, 왜 누구는 예술을 하고 누구는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는가, 내 주변에는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데, 왜 세상은 이렇게 돼버린 거지, 이런 고민들이 가득해, 그 사이를 갈팡질팡했고, 어느 순간 예술가들이 결국 귀족이구나 싶은 그런 느낌이 가득해지며, 노동의 세계로 들어가야지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삶이요. 그 노동이란 21세기 대한민국의 배운 애들이 하는 그런 노동이지요. 그러나 그것도 노동인 이유는 자기 의지와 상관 없이 키보드를 치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회사의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그렇지 않으면 스트레스나 어떤 제제를 받는 그런 세계인 거죠. 내 의지가 아닌 회사의 의지, 자본주의의 자본을 위해 모인 집단의 구성원이 되어 움직이거나, 그게 마음에 안 들어 공공복리를 위해 일한다는 집단에 들어갔으나 거기라 해도 결국 인간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부조리가 기득하고, 내가 그것들을 다 모른 척 하고 얻고 싶은 것은 뭔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어 여기는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아니구나 싶어 다시 그곳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술가도 뭣도 아닌, 경력으로 따지거나 학벌이나 이런 것을 들이대면 예술가인가 뭔가 알 수 없는 이도 저도 아닌 떠돌이가 되어 강릉에 와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정말 그렇게 되니까, 나는 예술가야 하면 좋겠지만, 저는 누군가의 마음에 감동을 남길 정도의 예술작품으로 누군가의 심부를 찌르지 못했습니다.



원래는 시를 좋아했으나, 마르께스 같은 작가가 돼야지하는 포부와 그 대학사회의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더해지며 소설 전공으로 전향했으나, 써놓은 시들이 꽤 있어, 올해도 그 시가 누군가 읽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사회에서 판단한다면, 나 혼자 책 한 권 내고 그만 그 시인들의 세계에 편입하겠다는 노력은 그만둬야지 하다, 시집을 보면, 그래 내가 이 정도가 못 되니 세상이 그런 판단을 하는 거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에서 저는 노동과 예술 사이를 계속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가장 절실한 내 고민이요. 왜 그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는가. 80년대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21세기에 배운다고 배워봐도 결국 노동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고, 거기서 남겨진 나는 뭐가 되지 그런 이야기를 계속 했는데, 어떤 날 보면 그건 그냥 푸념인데, 또 어떤 날 보면 이 시대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이 아닌가 싶어, 내가 잘못한 건 아니다, 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주 아픈 사람도 있고, 아파서 죽는 사람도 있고, 아파도 사는 사람도 있고요. 저는 아파도 사니까 아파도 사는 얘기를 썼던 것 같은데, 물론 시란 아주 아픈데 사는 사람 이야기이지만, 아주 아프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아파도 사는, 아주 보통 사람이 되어 아주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식으로서의 생각과, 누구나 감동할 줄 아는데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뒤범벅되어 있으나, 또 어찌 보면 친구들은 그래도 회색도시가 좋다는데, 네온사인이 좋다는데, 나는 그걸 좋아하지 않고, 어떤 권력을 향유해도 행복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이것이 바로 기질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냥 자유를 향유할 때 행복한 사람인 거죠.  



자유로운 모든 사람들이 예술가가 되는 건가요? 자유, 예술가, 이 모든 단어들이 품고 있는 품이 너무 넓어, 예라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거기 어디 즈음의 이야기를 품고서 이걸 어떻게 하지 하며 강릉에 살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주식으로 어떻게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볼까 했는데, 요새는 쉽지 않고, 이 또한 초기자본이 많고 적음에 엄청난 차이가 나나, 그래도 오늘도 잘 먹었고, 내일도 잘 먹을 수 있습니다.  



계속 답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학이 아니라 답은 잘 나오지 않고 아마 이러다 끝이 나는 어떤 이야기들일까 싶기도 합니다. , 나는 누구인가, 어떤 직함은 나를 규정할 수 있나, 그 안에서 편안해지는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 그렇지 않은, 그래서 피곤하지만 그래도 나름 자기 행복을 찾는 중인 사람도 있다는 것, 이런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여기서 이런 고민을 하던 사람이 있었다고 남기고 싶은 욕심일까요? 아니면 공감을 얻고 싶은 걸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