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학교의 같은 반 엄마 중에 워킹맘은 한분 있었다. 대부분 전업맘이었고 그래서 엄마들은 하루의 시간을 아이에게 맞춰서 움직였다. 엄마들은 공통적으로 아이교육에 하늘을 치솟을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놀이학교는 수업 프로그램이 무척이나 다양했다. 영어수업은 하루에 반을 넘게 할애했고 그 밖에 한글, 수학, 과학, 체육, 장구, 바이올린, 한문, 줄넘기, 태권도, 마술, 댄스, 요리 등등 일주일 동안의 수업프로그램은 정말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많았다. 이 많은 수업을 시키면서도 엄마들의 교육열은 채워지지가 않았기에 하교 후에도 추가로 다양한 학원을 보내면서 교육에 열을 올렸다. 불타는 교육열은 워킹맘도 예외는 아니었다. 워킹맘은 어린 반엄마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나보다 1살 많은 언니였다. 성격도 좋았고 아이를 위해 열심히 일과 집안일을 병행하며 아이가 혹여나 엄마가 일을 한다는 이유로 반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반모임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언니였다. 나는 반에서 워킹언니가 가장 좋았다. 엄마들의 수많은 말들에도 잘 휩쓸리지 않았고 항상 중립을 지키는 언니였다.
워킹언니는 반 엄마들이 보내는 학원들에 관심이 많았다. 나 역시 내 귀는 창호지 귀였기에 지금이 아니면 늦는다는 엄마들에 말에 홀려서 여러 학원을 보내고 있었고 어느 날 워킹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포비야, 포뇽이 태권도 학원 보낼 생각 없어? 태권도 학원 다니면 애들 키도 크고 체력도 키워진다는데 우리 워킹이랑 같이 보내보는 게 어때?”
“어머 그래? 키도 크고 체력도 좋아진다고? 그럼 바로 보내봐야겠네!”
“그럼 미안한데 우리 워킹이도 같이 데리고 가줄 수 있을까?”
“응응 그래. 내가 날짜 잡아서 워킹이랑 포뇽이 같이 한번 데리고 가볼게!”
난 흔쾌히 응했다. 아이 둘 데리고 학원가는 일쯤은 쉬운 일이라 생각했고 워킹이도 나와 안면이 있었기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아이들은 아직 6살밖에 안된 어린 나이라는 것과, 남의 아이는 어떤 경우에도 훈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교 후 포뇽이와 워킹이를 태우고 난 태권도 학원으로 향했다. 둘을 태우면서부터 싸움이 일어났다. 내가 이쪽에 앉을 것이라고, 아니라고 내가 이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도 안 되는 일로 투닥거리는 아이들을 겨우 진정시키고 운전을 시작했는데 뒤에서 워킹이가 갑자기 가방에서 슬라임을 꺼내서 놀기 시작했다.
반짝거리고 끈적거리는 슬라임은 뒷좌석 가죽시트부터 바닥, 유리까지 범벅이 되어갔고 난 워킹이에게 슬라임은 내려서 가지고 놀자고 타일렀지만 워킹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태권도 학원까지 가는 길은 구만리 같았다.
겨우 도착한 태권도 학원에 아이들을 들여보냈지만 난 다른 엄마들처럼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태권도 학원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정신이 없었다. 초등학생들은 서로 비속어를 쓰며 날려 차기를 하고 있었고 어린 친구들은 쟤가 나를 때렸다며 울고 불며 뛰어다녔고 선생님들은 수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으셨다. 난 몸이 작은 포뇽이가 누군가에게 치이기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하며 지켜봤다.
6살짜리 아이들에게 태권도 수업은 그냥 지칠 때까지 뛰어놀자였다. 이미 지친 포뇽이가 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자 갑자기 워킹이가 쪼르르 포뇽이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포뇽이 얼굴을 손가락으로 잡고 늘리기 시작하는데 어찌나 찰지게 늘려대던지 난 우리 포뇽이 얼굴이 곧 수제비를 떠야 하는 밀가루 반죽이 된 것 같았다. 포뇽이 얼굴은 주물럭이 된 채 벌건 손자국으로 뒤덮였고 워킹이는 얼굴반죽으로만 그치지 않고 포뇽이 머리까지 잡고 흔들어댔다. 포뇽이는 울며 내게 뛰어왔고 워킹이는 그 모습을 보고 깔깔거리며 웃어제꼈다. 포뇽이는 다시는 태권도학원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워킹언니에게 이 구구절절한 얘기들을 다 할 수도 없었던 나는 포뇽이는 태권도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했고 언니는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워킹언니는 한번 학원 동행을 함께한 이후로 평일에 모이는 반모임 때마다 워킹이를 내게 부탁했다. 포뇽이도 가는 모임인데 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언니는 워킹이가 다 커서 손이 갈 게 없다고 항상 말했지만 고작 6살 아이가 다 컸을 리는 만무했고 엄마가 없는 자리에선 더더욱 손이 많이 갔다. 키즈카페에서도 워킹이는 포뇽이완 다르게 무척이나 활발하게 놀았고 그 활발함의 끝은 언제나 사건사고였다. 난 워킹이와 동행할 때마다 포뇽이보다 워킹이를 쫓아다니느라 진이 빠졌다. 워킹이 동행은 내게 점점 더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고 아무 생각 없이 나 스스로 들어간 강제 공동육아 늪에서 어떻게 빠져나와야 할지 밤에 잠이 안 올 정도였다.
다음 반모임도 곧 연이여 잡혔다. 자주 가던 키즈카페에서 하원 후 만나기로 했고 난 이번엔 워킹엄마에게 얘기를 하지 않고 포뇽이만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못 데리고 가겠다는 말은 도저히 하기가 어려워서 이런 식으로 조금 거리를 두면서 나중에 워킹언니에게 얘기를 해볼 생각이었다. 이날 아침 포뇽이를 등원시키는 길에 골수녀를 마주쳤다.
“포비언니! 이따 하원하고 포뇽이랑 키즈카페 오시죠? 오늘도 워킹이랑 함께 오나요?”
“아 그게 오늘은 내가 좀 힘들어서 포뇽이만 데리고 가려고 해”
“아 그러시구나. 하긴 매번 워킹이 데리고 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죠. 잘 생각하셨어요!”
“응응 그럼 이따 하원하고 만나!”
골수녀와의 가벼운 대화를 마치고 곧 하원시간이 돼서 난 포뇽이를 데리고 약속된 키즈카페로 향했다. 오랜만에 조용히 포뇽이랑 단둘이 가자 마음도 편했고 스트레스도 내려가는 것 같았다. 조금 빨리 도착한 편이라 다른 엄마랑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골수녀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런데, 골수녀의 양옆엔 그녀의 딸뿐만 아니라 워킹이도 함께 등장하고 있었다.
‘니..니가 왜 거기서 나와..????’
난 벙찐마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고.. 골수야, 워킹이도 데리고 왔네??”
“네 언니! 언니가 힘드시다고 해서 제가 워킹언니에게 연락해서 언니 사정 말씀드렸잖아요 호호호. 전 별로 힘들일이 없어서 워킹인 제가 오늘 데리고 온다고 했어요 방긋방긋”
뭐.. 뭣이라고?? 그.. 그럼 난 뭐야. 새 된거야? 나 완전히 새됐어??
난 너무 당황스러워서 뭐라고 말도 나오지 않았고 방긋거리는 골수녀의 얼굴을 잡아 뜯고 싶다는 생각뿐이 들지 않았다. 오늘 모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포뇽이만 데리고 온 내 행동과 내가 따로 조용히 하려 했던 말이 골수녀 마음대로 전달해 버린 ‘언니가 힘드시다고 했다’라는 한 문장 때문에 워킹언니에게 난 한순간에 상종 못할 여자가 돼버렸다. 이가 갈리고 코가 갈렸다. 내가 뭘 갈든 상관없이 골수녀는 모임을 즐겼고 내 얼굴만 울그락불그락이 됐을 뿐이었다.
난 이날 워킹이를 전혀 케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나와 보냈던 시간이 많은 워킹이는 이날도 여전히 화장실을 갈 때도 무언가가 필요할 때도 내게 와서 말을 했고 난 그럴 때마다 "골수야! 워킹이가 부른다!" 라며 포뇽이 이외에는 다른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골수녀는 상당히 귀찮은 표정이 역력했다. 워킹이가 다가올 때마다 이유도 묻지 않고 떠밀 듯이 친구들이랑 놀라며 등을 돌렸고 키즈카페에서 아이들 저녁을 먹일 때에도 자신의 딸 말고는 워킹이 저녁은 전혀 챙겨주지 않았다. 난 개인적으로 워킹이가 마음이 쓰였지만 골수녀가 할 일이기에 눈을 감아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뒤 난 워킹언니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고자질을 했다. 나 유치한 여자 아닌데 유치해야 살 수 있고 나 고자질하는 여자 아닌데 이미 판을 벌어졌으니 그 판에 충실해야 했다. 그동안 워킹이를 돌보면서 있었던 고충을 얘기했고 언니한테 쉽게 이런 말들을 꺼내기가 어려워서 오늘 같은 일이 생긴 것 같다고. 솔직하게 힘든점과 미안한 점을 얘기한 후 오늘 골수녀의 행동에 대해서도 얘기를 꺼냈다. 그녀처럼 워킹이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고 뭘 먹든 관심을 갖지 않아도 상관없다면 앞으로 골수녀에게 쭉 워킹이를 부탁하시라고. 난 전혀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인 후 워킹언니와의 통화를 끝냈다.
이후 그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후론 골수녀가 워킹이를 데리고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워킹언니는 이 후로 본인이 참석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면 워킹이를 누군가에게 부탁하지 않았다. 가끔은 내가 너무했나라는 생각도 들고 별일도 아닌데 그냥 내가 쭉 데리고 다녀줄걸 그랬나 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다시 돌이켜봐도 아직 어린 6살 아이에겐 엄마 없는 키즈카페나 친구집 방문은 아니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호의를 가지고 한 일이라고 해도 아이문제에 대해선 예민할 수밖에 없는 게 엄마들이다. 아무 생각 없이 워킹이를 맡아준 건 섣부른 행동이었고 힘들면 힘들다고 제때 말하지 않고 문제를 피하려 했던 것도 나의 실수였다. 하지만 워킹언니도 아이를 쉽게 타인에게 부탁해 버리는 건 아쉬운 행동이었다. 워킹맘의 고충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 고충을 타인의 손을 빌어 해결하는 건 언젠간 문제가 발생한다. 육아문제는 내 가족 안에서 해결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정당한 비용을 들여 그에 맞는 사람에게 아이를 맡겨야 한다. 아이친구 엄마는 친구의 엄마이지 내 아이를 잠시 맡아주는 시간제 이모가 될 수는 없다.
오늘도 조용히 되뇌어본다. 유치하고 비겁하고 얍실한 골수녀가 언젠간 크게 뒤통수 맞는 일이 생기기를. 그때가 온다면 내 튼튼한 팔뚝을 잔뜩 부풀려서 나도 크게 한방 내리쳐버리겠다. 불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