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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사이로 Oct 29. 2021

맥가이버는 아니더라도

집을 고치면서 정말로 신났던 몇 개의 순간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뒷마당 수돗가에서 물이 나오는 걸 확인했을 때였다. 수풀집은 오랜 시간 폐가로 방치되어 있어서 상하수도 배관이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당연히 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공사가 한창이던 어느 날, 뒷마당에 우뚝 선 부동전*이 나를 맞아주었다. 보기에는 흙바닥에 그냥 세워둔 쇠봉 같았는데, 거기서 물이 나올 거라고 했다. 의심의 손길로 수도꼭지를 돌리는 순간, 세찬 물줄기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의 희열을 잊을 수가 없다.

(*부동전 : 마당 같은 외부에 설치한 수도는 한겨울에는 동파 위험이 있다. 부동전은 수도관 안에 물이 머무르지 않게 하여 동파를 방지하는 수전이다. 시골집 외부에 있는 수돗가를 부동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시골 폐가를 고쳐 살겠다며 나선 나를 많이 걱정했다. 나는 걱정 말라며 큰 소리를 쳤지만, 속으로는 나 역시도 이 폐가가 정말 사람 사는 곳이 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걱정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걱정은 공사를 진행하면서도 쉽게 그쳐지지 않았다. 그런 걱정을 씻어주는 물줄기였다. '이제 물도 나오는데, 사람 못살겠어' 하고 안심하게 해주는 물줄기.

 

마당의 수돗가는 시골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공간이다. 손빨래도 하고, 텃밭에서 수확한 채소도 씻고, 한여름에는 손과 발을 씻으며 무더위도 식히는 공간이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살던 시골집 추억도, 수돗가에 얽힌 게 많다.


여러모로 애정하는 이 부동전은, 참 좋은데 수도꼭지가 하나라 영 불편했다. 수풀집엔 앞마당에는 화단이, 뒷마당 텃밭이 있다. 이 두 공간을 오가며 물을 써야 해서, 긴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릴호스를 수도꼭지에 항상 연결해둔다. 그래야 도르래에 돌돌 말린 긴 호스를 들였다 줄였다 하며 자유자재로 물을 쓸 수 있다. 그런데 그 호스를 연결한 채로, 수도 바로 앞에서 물을 쓰려면 꽤 귀찮아진다. 손 한 번 헹구자고 릴호스를 분리했다가 다시 연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기가 영 귀찮을 때는 집 안으로 들어가 물을 써야 한다. 텃밭의 흙들은 온 집안에 후드득 흘려가면서.

 

그러다 오늘, 두 갈래 수도꼭지를 사다 연결했다. 양 쪽 모두에서 물이 콸콸 나온다. 이제 연결된 릴호스를 빼지 않고도 물을 쓸 수 있다. 신세계다!

 

수풀집에 살기 전, 서울집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나는 여지없이 바로 전문가의 손을 빌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골에서는 누군가의 손을 재빨리 빌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서툴고 느리지만 나의 손으로 하나둘씩 해 나가고 있다. 망하더라도 일단 시도는 해본다. 그러니 내가 나의 필요를 세심하게 살피고, 작은 불편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기억하게 된다. 


언제부턴가 나는 무언가를 대행해주는 서비스들에 익숙해졌다. '편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나 같은 근로자에게는 시간이 곧 돈'이라는 핑계로. 그래선지 나는 익숙한 일들로 가득한 회사를 벗어나면, 한 없이 무능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잘할 수 있는 회사 일에 지독하게 매달리고 제 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고를 반복했다.

 

사실 수도꼭지를 바꿔 끼우는 일은 전문가의 손을 빌리는 게 더 빠르고 정확할 테고, 시골집을 돌보는 사소한 기술은 어쩌면 앞으로 인생에 큰 쓸모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의 필요를 내가 살핀다는 것, 그 필요를 느리지만 스스로 충족시키며 살아가고 있다는 자신감은 내 인생에 좀 쓸모 있는 거 아닐까. 

 

고작 수도꼭지 하나 갈아 끼우고서하는 웅장한 생각들. 수풀집에서는 항상 생각이 웅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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