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어르신인 앞집 할머니와 읍내에 다녀왔습니다. 할머니께서 맛있는 밥을 사 주신다고 하셔서요. 사실 저는 사 먹는 밥보다 할머니댁 집밥이 더 맛있지만, 또 할머니의 마음이 그렇지 않으신 거겠죠.
차를 타고 읍내로 나가는 길엔 할머니와 근황을 나누었어요. 며칠 전, 서울에 다녀오시며 이야기보따리를 가득 채워 두셨더라고요.
이번 서울 방문은 얼마 전에 새 집으로 이사한 딸네 들르기 위함이었는데요. 딱 이틀 밤만 주무시고 내려오셨더라고요. 딸은 계속 더 있다 가시라고, 가실 거면 모셔다 드린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요즘 한창 돌보는 깻잎 밭이 마음 쓰여 더 있으실 수가 없으셨대요. 결국 따님이 자고 있는 새벽 시간을 틈타 도망치듯 나오셨다고 합니다.
"일찌감치 준비해 갖구, 자는 새 살곰살곰 나왔지. 문 소리 날깨비 살짝이 하면서이?" 혹시 문 소리에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 딸이 깰까 봐 살금살금 하셨다는 부분에선, 기억 속 잠든 딸이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추시더라고요.
탈출(?)까지는 무사히 이루어졌는데, 문제는 지하철역에서 발생했어요. 예전 딸네는 여러 번 방문해서 익숙한 데다, 지하철 호선이 하나만 지나는 곳이었는데요. 이번에는 이사 후 첫 방문이라 낯설기도 하고, 여러 호선이 지나는 환승역이었던 거예요. 거기에 지하상가와 연결된 복잡한 구간이요. 터미널에 가려면 환승이 필요한데, 출입구가 너무 많아 헤매시다 여기저기 물어보셨나 봐요. 어떤 이가 오른쪽으로 가라고 해서 갔더니, 거기선 또 왼쪽으로 가라고 하고, 왼쪽에선 다시 거기가 맞다고 하고. 그렇게 헤매시다 결국 차를 놓치셨대요. 어렵게 금산에 도착해서는 또 집으로 오는 버스를 놓쳐 다시 한참을 기다리셨고요. 그렇게 출발한 지 한 나절이 훨씬 넘어서야 집에 도착하신 거죠.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힘들더라고요. 젊은 저도 그런 상황이면 힘들고 짜증스러웠을 텐데, 할머니는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우셨을까요? 그런데 할머니는 웃으시더라고요. "인쟈는 내가 확실하게 알았지. 어느 짝으로 가면 되는가. 담번에는 내가 잘 올 수 있지." 하시면서요.
그 사이 읍내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할머니는 갈비탕을 사 주고 싶어 하셨지만, 저는 고기를 먹지 않아 순두부찌개를 먹겠다고 했어요. 할머니는 갈비탕으로 저는 순두부찌개로 뜨끈하게 속을 채우고, 설빙에 가서 생딸기빙수도 먹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잔뜩인 곳에 늙은이가 와도 괜찮냐고 물으시며 웃으셨어요. 저는 속으로, 마음만은 할머니가 제일 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해가 밝을 때 나섰는데 마을에 돌아오니 캄캄한 저녁이 되었습니다. 대문 앞에 할머니를 내려드리며 밥도 맛있었고 오늘 재밌었다고 말씀드렸어요. 대문을 닫고 들어와 이 글을 씁니다. "나도 오늘 너무 재밌었어." 돌아온 할머니의 인사를 떠올리면서요.
*제목으로 사용한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지 않고'는 사무엘 울만의 '청춘'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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