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잘 발견될 준비
관자놀이와 눈아래깨에 복숭아색 블러셔를 둥글리고 마스카라를 공들여 올려붙이다가
신상 립틴트로 입술 위를 메워본다.
머리를 단정히 빗고 꽃무늬 잔잔한 시폰 원피스와 긴 카디건을 느슨하게 걸쳐 입는다.
그리고 침대 아래 상자에서 검은색 메리제인 슈즈를 두 발에 꿰었다.
모든 준비 완료.
새벽 한 시, 잘 밤에 왜 이 야단이냐고..?
나도 그러하다. 잘 준비...
아니, 잘 발견될 준비.
[이런 얘기 조심스럽지만, 이율이 님...]
건강검진 이상소견이 있다고 불려 갔던 그 병원에서 의사는 주저했다.
그의 짧지 않은 침묵은 내게 오만가지 메시지를 흩뿌렸다.
무슨 얘길 듣든 덤덤하리라..
내 엄마를 앗아갔던 그 병의 인자가 나를 덮친 모양이다.
깡촌출신의 개천용 아빠는 엄마 병간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처음부터 병약한 엄마가 마뜩지 않았던 할머니는 분노에 휩싸인 채
내게서 엄마도 빼앗아버렸다.
할머니에게 엄마는 아들을 잡아먹은 마녀쯤 됐고
엄마 반, 아빠 반의 나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할머니는 평소엔 엄마에 대한 분노를 내게 퍼부었다가
밤이 되면 강소주에 취해 날 끌어안고 울며 불며 죽은 금쪽아들을 추억했다.
할머니는 버스를 네 번이나 갈아타고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어린 나는 잘 못 알아들었지만 당시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었나 보다.
수년이 흘러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나는 깡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스무 살, 서울로 떠나는 터미널에서 고모는 그제야 엄마의 납골당을 알려줬다.
나와 강제분리됐던 그 해 말, 결국 돌아가셨다고 했다.
어렵게 입을 뗀 의사는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라고 했다.
내게 일말의 가능성이 있었다면 이거 저거 금지령을 내렸겠지만
의사는 다 해보고 죽으란 소리를 저렇게 선한 얼굴로 한다.
맞다. 스물아홉 번째 크리스마스까진 맞이해 봤지만
서른 번째 크리스마스는 없다는 소리다.
의사의 말은 음소거로 들렸고 나는 그 어떤 질문도 하지 못한 채 병원을 나섰다.
집으로 향했지만 내 발길은 백화점을 향해있었다. 유령 같은 걸음으로...
잔꽃무늬 시폰 원피스를 골라 입으니 판매원은 과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내가 입게 될 수의란 걸 모르는 판매원은
'좋은 데 가시나 봐요.', 했다.
좋은 데... 란다. 좋은 데.
엄마, 아빠, 그리고 할머니...
거기 좋은 데 맞아요?
벌써 일주일 째다.
오늘도 한껏 꾸민 채 나만의 잔잔한 꽃무늬 수의를 입고 침대에 누웠다.
선고는 받았지만 정작 갈 때가 언제인지는 모른다.
1인가구 예비망자의 신분.
그러니 잘 발견될 준비를 할 밖에.
머리맡에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려댄다.
이 시간의 벨소리라면 발신자를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누군지 아니까.
내가 다니는 콧구멍만 한 디자인 회사의 서대표.
그녀는 또 만취상태일 거고
언제나처럼 불륜남과 한참을 즐긴 후에 굳이 날 깨워 대리운전 해달라 요청할 것이다.
오늘만은 대꾸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내 얼굴을 남편에게 확인시키며 회사일로 늦었다 할 게 뻔하다.
두 번 다시 그 더러운 알리바이에 동원되지 않을 것이다.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언제나 그렇듯 잠들지 못한 채 이리저리 몸을 뒤틀어 본다.
회사에도 사직서를 내야 하는데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내일은 제출해야지.
일.
신.
상.
의.
사.
유.
로.
그때, 창 밖에선 요란한 일렉기타 소리가 들렸다.
허어.. 이 밤에...??
스르륵 일어나 나는 창을 가로막은 암막커튼은 소심하게 젖혔다.
그물스타킹에 핫팬츠, 과한 사자펌 머리, 라이더 재킷을 입은 여자가
일렉기타 연주를 하고 있다.
자신만만한 연주와 과한 헤드뱅잉, 이 동네 밤잠 다 깨우고 신고당할 판이다.
'락스타야, 뭐야...'
나는 소심하게 우물거렸다.
이게 나다. 방 안 혼자 있어도 나 조차에게 웅얼거린다.
그 와중에 나는 그녀가 부러웠다.
난 단 한 번도 저런 '미친 삶'을 살아보지 못했다.
남들 시선 신경 쓰느라. 아니, 더 정확히는 온 사방천지의 눈치 보느라..
저런 사람도 있긴 있구나..
그녀의 오버액션에 비해 동네의 반응은 지나치리만큼 고요했다.
1층 할머니는 사소한 생활소음도 못 견디는 분이다.
배달맨들의 발걸음 소리, 택배상자 내려놓는 소리까지 문제 삼는 그 할머니가
지금 쯤 창문 열고 쌍욕을 내지를 법도 한데 여전히 세상은 성내지 않는다.
나 홀로 깨어 콘서트 구경하듯 멍하니 보고 있는데 사자펌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렸다.
멀리서도 그녀의 선글라스가 번쩍 빛났다.
깜짝 놀란 나는 황급히 암막커튼을 내렸다.
휴우....!! 설마 날 본 건 아니겠지?
몇 분이 흘렀을까... 밖의 요란한 음악소리가 멈췄다.
이상한 밤이다.
아까보다 더 소심하게 암막커튼을 1센티 벌려보는데
창 밖엔 사자펌 그녀가 두둥...!!!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반이나 덮은 선글라스에는 공포에 질린 내가 투영됐다..
"꺅....!!"
"잠깐 좀 들어갈게."
나는 작은 주먹으로 유리창을 틀어쥐며 낯선 이의 방문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잠금장치를 단단히 마감한 채 암막커튼을 닫아버렸다.
"다 알고 왔어."
여전히 들리는 그 목소리-
두꺼운 유리창에 막혀 그녀의 목소리는 둔탁하고 아득하게 들렸다.
"도.. 도대체 뭘 알....!!!!"
그러다 심장이 마구 요동친다.
여기가 3층이란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왜 그녀가 저기 있단 말인가. 어떻게 있단 말인가...
그때, 암막커튼이 활짝 젖혀지며 사자펌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길, 들어와? 왜? 어떻게?
내가 머뭇대는 사이 그녀는 집주인처럼 내 좁은 원룸을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침대에 걸터앉았다.
"다 알고 왔다니까."
그녀는 저벅저벅 내게 다가와 선글라스를 홱 벗었다.
그녀의 얼굴을 본 나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
내 얼굴로 내 목소리로.. 그녀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