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류분석과 만나다.
임신 초기, 하혈로 인해 퇴사와 함께 산부인과에 입원을 했고, 퇴원 후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너무나도 밋밋하고 심심했었다. 언제나 한 두 가지 이상의 일과 과제를 안고 살았던 나였는데, 갑자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에 적응이 어려웠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나는 육아종합지원센터 홈페이지에서 여성개발센터에서 열리는 '교류분석' 교육을 발견하게 되었다. '교류분석'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집 밖으로 나가서 뭐라도 배우며 시간을 보내자는 마음에 얼른 교육 신청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교류분석을 배우기 위해 모인 열명 남짓한 여성들과 한 자리에 앉아 교류분석이라는 상담이론을 차근차근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강의를 맡아주신 분은 한국교류분석상담학회의 초대 회장이신 인제대 사회복지과의 이영호 교수님이셨다. 교수님께 교류분석 상담이론의 개관과 자아상태, 교류패턴, 인생태도, 스트로크, 인생각본, 심리게임 등을 차례차례 배우면서 이 이론이라면 내가 원장이 되는 데 있어 부모교육이나 부모상담으로 도움이 크게 되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다. 사람을 좋아하며, 모든 사람들을 좋게 보고 싶다. 능력에 차이가 있더라도, 성향의 차이가 있더라도 웬만하면 덮어두고 잘 지내고 싶다. 부족한 면을 찾아 고치려 하기보다는, 좋은 면을 찾아 더 빛나게 가꾸는 것을 돕고 싶다. 이 신념으로 힘차게 살아가고 있으나, 종종 나의 의지는 주변 환경이나 내 마음 같지 않은 타인에 의해 꺾이고 상처입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신념 또는 자아에 대한 회의가 들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린 듯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교류분석 상담이론의 철학은 내 신념에 대한 허가와도 같았고, 흔들리더라도 다시 일어나 한 길로 나아가도록 힘을 주는 격려와도 같았다.
교류분석 상담이론의 철학은 인간은 누구나 긍정적인 존재이며,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자신의 삶을 자발적으로 새롭게 결정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세 가지 철학이 좋기 때문에 교류분석을 좋아한다. 내가 교육 현장에서 일하는 동안 나에게 '사람은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결코 10년 이상 그 자리에 머물지 못했을 것이다.
[교류분석(TA)의 철학 3가지]
1) 인간은 긍정적인 존재이다.
2) 인간은 누구나 사고할 수 있다.
3) 인간은 자신의 삶을 재결정하고 새롭게 변화할 수 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사람을 구분하기보다, 세상에는 옳은 행동과 옳지 않은 행동이 있다고 이해해 보면 어떨까? 초임교사 시절에 내가 많이 혼란스러웠던 부분이 바로 이 점이었다. 평소 '나는 좋은 선생님이야.' 하는 신념을 갖고 있었지만, 종종 아이들에게 엄하게 규칙을 이야기하고 규칙에 대한 이해를 강요할 때면 '나는 나쁜 선생님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죄책감이 들었었다. 지금 다시 그런 상황을 겪는다면 '내가 너무 엄하게 규칙을 안내한 건 아닐까? 나는 좋은 선생님이잖아? 그러니 따뜻한 말로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교류분석의 첫 번째 철학인 인간의 긍정성은 이렇게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인정과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대문이라 생각한다.
두 번째 철학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뇌발달의 문제를 겪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교류분석에서는 말한다. 아이들은 10개월 즈음부터 사고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약 18개월이 되면 아주 완강하게 떼를 쓰며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발달과업이나 경우에 따라 아이들은 자기주장을 억압당하고 능동적인 실험을 제지당한다. 그리하여 어떤 아이들은 '차라리 생각하지 않는 편이 안전해.'라고 믿게 되고 적절히 타인에게 의존하여 성장하기로 마음먹는다. 성인이 되어서도 지금-여기의 상황에 적절하게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어려우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문제들을 적절하게 해결하지 못하여 삶의 난관에 자꾸만 부딪히게 된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넌 생각이 있니? 없니?"하고 비난하거나, "이렇게 해보는 게 어때?"하고 잔소리인지 조언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말들을 쏟아낸다. 자동적으로 '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구나?'하고 상대를 깎아내리는 것이다. 생각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잘 생각해 보자. 너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을 넌 분명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너 자신을 가장 잘 아는 건 너지. 그러니 넌 할 수 있어!"하고 격려해 주는 것은 어떨까? 돕는답시고 섣불리 조언을 내뱉는 것은 상대방의 생각하는 능력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리라. 우리는 중증 뇌손상이 없는 한, 생각할 수 있다. 누구나!
세 번째 철학은 지금껏 살아온 방식이 내 삶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지 못했다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새롭게 결심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눈물 나게 멋진 말이다!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을 최대한 끝까지 미루는 아픈 습관이 있다. 이 습관을 고친다면 지금보다 더 인정받는 내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일을 미루는 동안 느껴야만 하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어렸을 때부터 의무적으로 또는 규칙적으로 해야 하는 과제들이 특히 힘들었다. 특히 일기 쓰는 것과 하루하루 분량이 정해져 있는 학습지를 푸는 일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겠지만, 내 안의 죄책감이 컸다. 지금도 무언가를 미루고 있을 때 죄책감을 느끼지만, 내 의지는 그 부정적인 감정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고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고 답답하다. 어떨 땐 심지어 내가 그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무튼 나는 이 습관을 고치기로 마음먹었고, 요요현상을 자주 겪긴 하지만 또 힘을 내서 새롭게 노력하고 애를 쓰기를 반복하고 있다. 언젠가는 이 미루기 습관의 터널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저 멀리 빛이 보이지만 한참을 더 달려야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멈추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터널 밖에 있는 나를 축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야.', '사람은 안 변해.' 하는 신념을 갖고 있었더라면 일찌감치 미루기 괴물에게 승복하고 손해 보는 삶을 살고 있었을 것 같다. 이렇듯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 옳은 선택을 할 수 있고, 노력하면 원하는 변화에 가 닿을 수 있다는 것이 교류분석의 세 번째 철학이다.
나는 이 세 가지 철학이 좋아서 교류분석 이론에 푹 빠지게 되었다. 남을 돕기 위해 배워보겠다던 처음의 마음은 나 자신을 돕기 위해 배움을 놓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바뀐 지 오래다. 내 삶의 꼭지마다 내 의지로 선택한 일들의 기억과 추억과 성과가 깃들기를 바란다.
교류분석 상담이론은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네 가지 영역을 분석한다. 자아상태(성격)의 구조와 기능을 분석하고, 의사소통(교류패턴)을 분석하고, 인생각본을 분석하고, 심리게임을 분석한다. 이 분석의 틀을 배움으로 인해 나는 나 자신과 타인의 성격을 이해하는 도구가 생겼고, 대화의 이면에 깃들어 있는 심리를 파악하는 눈이 생겼고, 도움이 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세대를 거쳐 대물림하지 않는 법을 알게 되었고, 상대방이 기획한 막장 드라마로의 초대에 응하지 않는 방법도 터득하게 되었다. 얼마나 가성비 좋은 공부인가!
내가 교류분석을 만나게 된 것은 우리 아이의 공덕이 컸다. 임신과 함께 일을 잠시 멈추었고, 그 시간에 교류분석 상담사 공부와 교류분석 부모훈련(TAPT)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간의 배움으로 말미암아 아이도 잘 키울 수 있었고, 나 자신도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누구나 자기 밥그릇은 가지고 태어난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 아이는 자기 밥그릇으로 교류분석 공부를 갖고 우리에게 찾아온 것 같다. 일만 하며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살았던 나를 멈춰 세운 것도 아이였고, 배움을 바로 실습해 볼 수 있도록 건강하게 곁에 있어 준 것도 우리 아이였다. 아이를 통해 새롭게 거듭났고, 거듭남으로 인해 아이는 잘 자랐다.
사십춘기를 격렬하게 치르겠다 마음먹은 나는, 그때처럼 멈추어 보고자 한다. 그때는 아이가 나를 멈추게 해 주었지만, 이제 나는 나 스스로의 힘으로 멈추고자 한다. 이번에는 무엇을 만나게 될까? 그리고 어떠한 성장을 하게 될까? 나의 성장이 기대된다-
다섯 장의 시로 된 자서전
Portia Nelson
1
나는 길을 따라 걷네
거기 길 옆에는 깊은 구멍이 있네
나는 거기에 빠지네
나는 당황하고, 나는 무기력하네
그것은 나의 잘못은 아니지
길을 찾는데 평생이 걸리네
2
나는 길을 따라 걷네
거기 길 옆에는 깊은 구멍이 있네
나는 그것을 안 본 척하네
나는 다시 거기에 빠지네
내가 똑같은 그 장소에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잘못은 아니지
빠져나가는데 여전히 오랜 기간이 걸리네
3
나는 길을 따라 걷네
거기 길 옆에는 깊은 구멍이 있네
나는 그곳을 보네
그런데도 또 거기에 빠지네
그것은 습관이지
나의 눈은 열리고 내가 있는 곳을 알게 되지
그것은 나의 잘못
나는 곧바로 빠져나오지
4
나는 길을 따라 걷네
거기 길 옆에는 깊은 구멍이 있네
나는 그것을 돌아서 걷네
5
나는 다른 길을 걸어가네
나는 이제 다른 길을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