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두란 Jul 12. 2024

3. 코에서 자꾸 담배냄새가 났어-

코로나19로부터 어린이집 지키기

  어린이집에는 이제  돌을 지난, 아장아장 걷고 장난감을 열심히 입에 가져다 넣어보는 아가들부터 한창 떼를 쓰는 서너 살의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코로나19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보호하며 집단생활을 운영한다는 것은 매일매일이 살얼음판이고 두려움이었다. 터질 것이 터졌다.

  2021 늦여름,  아이가 아팠다.  보건소에서 나와 줄을 서서 코로나19 검사를 받았고, 검사 결과 여럿의 원아와 부모가 양성으로 확인되었다. 어린이집은 당장 시설폐쇄 명령을 받았고 지자체의 소독 지원과 함께  휴원에 들어갔다.


  휴원 중에도 매일매일 고열과 사투를 벌이는 아이들의 부모님과 전화를 주고받으며, 안타까움과 추가 확진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당시에는 확진자에게 꼬리표처럼 번호도 붙여졌었고, 생활시설에 보내져서 철저하게 격리를 했었다. 삶이 멈추고, 사람 사이에 원망이 싹트고, 서로가 멀어졌던- 또는 서로가 더욱 간절해지고, 애틋해지고,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던 시간이었다.


  우리 어린이집에 파견을 나오시던 시니어 일자리 할머니께서도 확진이 되었고, 원아와 가족의 확진 수의 합도 10명을 훌쩍 넘었다. 자택에 격리되어  현황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위로드리고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매일매일 마음 졸이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상 추가 확진 소식이 들리지 않을 무렵, 자꾸 담배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윗집에서 누군가가 집에 격리되는 바람에 담배를 안에서 피시나 하고 생각했다. 창문을 꽁꽁 닫고 여기저기 냄새가 이동할 만한 공간도 들락날락거렸지만, 냄새는 내 코를 자꾸만 따라다녔다. 남편에게 물어도 당신은 그 담배냄새가 도통 나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혹시, 나도 코로나?', 떨리는 마음으로 자가키트를 해보니 아주 희미하게 분홍색 선이 두 줄로 보였다. 올 것이 왔구나-




  보건소에 연락을 하니 평소에 먹고 있는 약이 있는지 물으셨다. 고혈압, 고지혈증, 갑상선기능저하, 간보호제- 매일 먹는 약이 많다고 하니,  봉투를 찍어서 보내 달라고 하셨다. 약봉투를 전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나는 고위험군이라 생활시설이 아닌 병원으로 이송이  예정이란다. '우리 아기는?'  걱정보다  번도(니큐에서의 17일을 제외하고) 떨어져   없는   반이  아들과 보름 가까이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하지만 코로나19 시절, 내가 거스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커다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캐리어에 최소한의 짐을 챙겼다. 하얀 옷으로 무장한 분이 소독기계를 가지고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가장 먼저 나를 향해 하얀 소독기체를 뿜으셨고, 남편과 아이, 그리고 집 전체를 차례로 소독하신 다음 나를 앞세우셨다. 그렇게 나는 남편과 아이를 뒤로 하고 하얀 차에 타고 1시간 거리의 병원으로 옮겨졌다. 하얀 차에 타 자리에 앉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한 참 울고 정신을 차려 주변을 돌아보자 나보다 먼저 차에 태워진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부자 관계로 보이는 두 사람이 내 맞은편에 있었는데, 너무나 부러웠다. 그렇게 병원으로 이송된 나는 혼자 6인실에서 지내는 운이 따랐고, 확진과 함께 병원에서 격리되어 지내는 동안 미열조차도 없이, 건강하게 시간을 그저 흘려보냈다.


  2019년 1월, 출산 이후 이렇게 길고 완벽한 휴식은 처음이었다. 혼자의 몸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심지어 아프지도 않고 병원에서 주는 밥을 먹으며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지냈다. 우리 아들은 출산과 함께 큰 수술을 몇 차례 했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조리원이라는 것도 경험해 보지 못했고, 아이가 세 번의 수술을 마치자마자 워킹맘이 되는 바람에 제대로 쉬어보지를 못했었다. 사실 핑계라는 걸 안다.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아끼고 귀하게 여겼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쉬었을 거라 생각한다. 바로 일을 구하러 나가지도 않았을 테지- 무튼, 나는 코로나19 덕분에 푹 쉬었다. 예정된 퇴원일이 다가오자 나는 간호사님께 코로나 검사를 다시 한번 할 수 있는지 물었다. 검사를 해 볼 순 있지만, 어차피 아직은 양성이 나올 것이고 퇴원 후에도 당분간 양성이 나올 거라고 하셨다. 그래도 검사를 부탁드렸고, 나는 퇴원 전에 음성임을 확인했다. 자, 이제 다시 돌아간다! 나의 삶터로, 나의 일터로!


가을이 온 것도 모르고 병실에서 코로나와 단 둘이 긴 시간을 보냈었다.

  실려 올 땐 친절하게 하얀 차로 모셔졌지만, 돌아가는 길은 알아서 가야 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병원 문을 열고 나오자 햇볕이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나를 반겼다. 늦여름에 병원에 들어왔는데, 바깥은 이미 가을이 와 있었다. 노랗게 물들어 떨어진 벚나무 잎사귀들이 선선한 가을바람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동안 남편과 아들은 다행히 감염되지 않았고, 힘든 격리 생활을 꿋꿋이 하고 있었다. 육아기술이 월등하게 높아진 남편, 엄마가 없어도 아빠와 긴 시간을 잘 보내준 아들, 매일매일 반찬과 간식을 문 앞에 두고 가셨을 시어머니. 모두 한 마음으로 긴 시간을 버텨냈다.


  휴원이 해제되고 일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코로나19 감염은 심심찮게 발생되었지만, 더 이상 확진자에게 번호가 붙여진다거나 어린이집이 시설폐쇄가 된다 거나한 등의 크나큰 격리는 없어졌다. 모두가 적응하고 있었고, 불안을 안고도 살아내는 방법을 터득해가고 있었다. 그렇게 또 성장하고, 튼튼해져 갔다.


  

이전 02화 2. 멈추어 섰을 때, 내가 만난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