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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두란 Jul 12. 2024

4. 살아줘서 고마워-

아들의 수술로 깨달은 것들

  아이가 태어나 신생아실에 있을 때, 간호사실에서 아이 태변이 나오지 않는다고 연락이 왔다. 곧 남편이 호출되어 갔고, 우리 아이는 항문이 막혀있다는 소견과 지금 바로 대학병원으로 전원 하여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우선 아이의 상황에 대해 알아볼 여유도 없이 전원이 가능한 병원부터 찾아야 했다. 남편이 아이를 안고 인근의 대학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수용 가능한 자리가 없다고 받아주지를 않았다. 계속하여 애를 쓰던 중 인근 도시의 병원에서 자리를 만들었으니 얼른 아기를 데리고 오라고 하였고, 사설 구급차를 불러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갔다.


  아이는 곧바로 장루를 만드는 수술을 받았고, 대학병원 신생아 중환자실 한편에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부모에게 허락되는 면회시간은 하루 30분이었고, 우리는 15분씩 번갈아가며 매일 면회를 갔다. 살아내  것이 고맙고, 조금이라도 일찍 아이의 아픔을 알고 조치를 취해주지 못했던 것이 미안했다. 17일간의 집중치료가 끝나고 아이를 집에 데리고   있었다. 아이는  먹고  자랐다.

  다음 수술은 직장-항문 성형술이었다. 수술을 위해 백일 정도까지 5kg을 만드는 것과 매일매일 장루를 잘 관리해 주는 것이 우리의 임무가 되었다. 장루주머니의 가스를 수시로 빼주기 위해 장루주머니가 옷 밖으로 잘 나오도록 배냇저고리마다 옆구리를 트고 손바느질로 감치기를 하여 수선을 하였다. 이틀에 한 번 통목욕을 시키며 장루판과 주머니도 새것으로 갈아주었다. 동그랗게 말려 나와있는 아이의 대장을 보는 것이 처음에는 너무나도 마음 아팠지만, 어느새 그 마저도 감사하고 예뻐 보였다. 그렇게 백일이 되고 집에서 손 수 차린 백일상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는 입원 가방을 쌌다.



  아기를 데리고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서는 승용차 한 대를 채울 만큼의 짐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주 아주 아주 긍정적인 나와 남편은 불안이 우리를 떠미는 순간이면 더 꼼꼼하게 준비하고 챙기면서 앞으로의 수술과 입원 생활을 대비했다. 두 번째 수술은 처음 퇴짜를 맞았던 병원으로 전원 되어 진행했다. 어린아이에게 적합한 수술 시설과 병동이 있었고, 우리 집에서도 훨씬 가까웠다. 두 번째 수술도 잘 되었고, 아이에게는 드디어 항문이 생겼다. 직장에서 멈춰있었던 길을 항문까지 만들었지만, 바로 그 항문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세 번째 수술까지 기다리며 일상으로 돌아와 아이를 키웠다.


  아이는 곧 뒤집기를 시도했고, 그때마다 장루가 터지거나 셀까 봐 가슴조리며 아이의 성장을 응원해야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장루를 닫는 수술을 했고, 아이의 항문에서 처음으로 뽕! 하고 방귀가 나왔다. 그 소리를 우리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병상에서 들은 아이의 생애 첫 방귀 소리에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기뻐했다. "야! 너, 드디어 정말! 개통되었구나!" 지금도 우리 아들은 방귀만 껴도 엄마아빠에게 칭찬을 받는다! "방귀를 뀐다는 건 정말 건강하다는 거지!" 시간이 지나자 변을 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항문 발진과의 전쟁이 이어졌다. 헤가와 관장, 변비약 투약 등 마음대로 되지 않는 변과의 싸움이었다.


  그래도 예정된 세 차례의 큰 수술을 잘 마치고 나니 마음의 짐이 많이 가벼워졌었다. 변비의 어려움이 우리를 항상 따라다녔지만 그래도 아이가 곁에 있어주는 것이 고맙고 행복했다. 더 이상 수술대에 아이를 눕힐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매 수술마다 잘 이겨내고 회복해준 장한 우리 아가!


  하지만, 두 돌이 되었을 무렵 아이가 예고도 없이 분수토를 하기 시작했고 급하게 달려간 응급실에서 소장이 완전히 막힌 것 같다는 CT 결과를 받아보게 되었다. 앞서 2-3차 수술을 해주셨던 교수님께서 급히 수술을 해주셨고, 우리는 아이를 살릴 수 있었다. 수술장 밖에서 초록색 옷을 입고 대기하던 나는 교수님의 호출을 받고 수술장 안으로 들어갔다. 교수님은 차분하게 상황을 알려주셨고 소장의 일부를 절제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니 걱정 말라고 위로해 주셨다. 다시 장루를 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던 나는 긴장이 풀리면서 엉엉 울었다. "엄마, 왜 울어. 울지 마." 하던 교수님의 따뜻한 그 목소리가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퇴원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우리, 공원에서 보낸 따뜻했던 주말.


  이후로 더 이상의 수술은 없었지만 변비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변지림으로 고생하는 것이 아닌 것만도 천만다행이었지만, 언제나 관장을 하고 변비약을 투약해야 하는 상황들은 쉽지만은 않았다. 아이가 어떠한 처치나 약에 의존하지 않고 변을 잘 보기 시작한 것은 다섯 돌이 되어서였다. 올해 초, 다섯 번째 생일이 지난 후 아이에게서 많은 변화가 한 번에 일어났다. 우선 잘 먹기 시작했고, 따라서 변도 잘 보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부부는 큰 걱정이 없다. 아직 약상자에는 사용하지 않고 남은 관장약들과 변비약들이 가득하다. 진작에 버렸어야 했는데, 혹시나 지난 5년간의 어려움이 언제 불쑥 우리를 다시 찾아올지 몰라 버리지도 못하고 있다.

  

어느새 훌쩍 커 외가에서 자연인처럼 온종일 뛰어다니는 아들!


  이제는 유사한 병을 앓고 있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커뮤니티인 네이버 카페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아이가 1차, 2차, 3차 수술을 앞두었을 때와 마치고 난 이후에도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에서 정보를 얻고 위로를 받았으며 안심을 하기도 했다. 종종 우리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모에게 격려와 응원을 드리기도 했다. 우리에게 그 카페는 동아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애틋했던 일들이 어느새 나에게 잊힐 만큼 먼 일이 되어버렸다. 아이가 건강해져서 그런 거니 좋은 일이긴 하지만 지금도 아파하고 있는 다른 아이들과 부모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그들도 우리처럼 이런 날이 오기를, 아이들이 모두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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