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을 못해서 얻은 것들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지역의 국공립 어린이집 연합회 회장님께서 임원을 꾸리고자 하는데 서기의 역할을 맡아 주면 어떻겠냐는 요청이었다. 나는 거절을 잘 못한다. 아니 그냥 거절을 못한다. 내가 거절을 못하는 이유는 나는 분명 어떤 일을 맡아도 잘 해낼 것을 알고, 그 부탁받은 일을 하다 보면 인정자극을 충분히 받으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달콤한 나는, 거절을 못한다.
그렇게 나는 원장 2년 차에 연합회의 임원이 되었고, 2년간 관내 여러 국공립 어린이집들을 지지방문 하고 원장님들과 교류하며 조직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어가는데 속도를 올렸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내가 속한 조직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작은 시골 학교에서 줄 곧 반장을 맡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전교학생부회장도 했었다. 내 생각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사람 좋은 사람'이었고, 사회현상이나 타인에게 관심이 많았다. 교사가 되고 싶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생일 때에는 사회문화 과목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사회구조나 민주시민과 같은 주제가 나오면 눈이 또릿또릿 해 졌고, 역사는 못했지만 한국근현대사는 수능에서도 좋은 성적이 나왔었다. 나는 사람 사는 데 관심이 많은 아이였다. 대학에 가서는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발을 닮 궜다. '운동권 노래패'에 들어갔지만, 데모에는 관심이 없고 사람이 좋았다.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민중가요가 좋았다. 그래서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한 것도, 열심히 하지 않은 것도 아닌 2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학생회관에서 보냈다. 종종 그 시간들이 후회되기도 한다. 차라리 그때 공부를 했다면, 지금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더 못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몰라! 하고 생각하는 편이 더 아름답다.
내가 학생운동을 하면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어른'이 되어가는 20대의 여러 성격들과 가치관, 삶의 방식 등을 아주 가까이서 보고 겪었다는 것이다. 회의, 총화, 뒤풀이, 엠티, 축제준비, 선거 등 아주 많은 일로 단과대학 학생회와 중앙동아리 등 많은 동기와 선배, 후배들과 교류하고 활동했다. 시골 고등학교에서 3명의 단짝과 조용한 논길을 걸으며 책상에 앉아 풀벌레 소리를 듣고 지낸 것에 비하면 너무 많은 자극과 관계가 단숨에 쏟아졌다. 나는 그때도 일이 좋고 사람이 좋았다.
제 버릇 남 못준다고, 워킹맘으로도 충분히 벅찬 나인데 자꾸 일을 벌여 나갔다. 연합회에서 2년간 일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사람을 얻은 것이었다. 대학 때까지만 해도 사람을 좋아하긴 했지만, 사람을 얻지는 못하였다. 그 이유는 나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나도 알지 못했었고, 나는 계속해서 모양이 다듬어지는 과정에 있었다. 어떤 사람이 나와 어울리고, 내가 닮아야 하는 사람인지 알기에 나의 경험은 너무 부족했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급류에 몸을 맡긴 듯 20~30대가 속수무책으로 흘러갔고, 30대 중반이 되어 출산을 하고 어린이집의 대표자가 되면서 점점 유속이 낮아지더니 자그마한 나만의 웅덩이에 머무르게 되었다.
멈춰 서서 내가 누구인지 마주하다 보니 나다운 행동, 나다운 말, 나다운 정서를 잘 쓸 수 있게 되었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친구처럼 지내는 사람들의 평균 연령을 어림잡아보면 내 나이보다 적어도 10살은 더 많은 것 같다. 같은 일을 하면서 같은 어려움을 겪고 매달 만나 서로 격려하며 힘이 되어 준 사이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몸 담았던 연합회에서는 회원들의 어린이집에 평가제가 예정되면 햄버거 세트를 사들고 임원들이 지지방문을 가는 사업이 있었다. 2년 동안 많은 어린이집에 회장님, 부회장님, 사무국장님을 따라 방문하게 되었고, 각 원마다 갖추어진 환경의 사회적 분위기와 원장님들의 노고와 강점들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많은 사업들이 있었지만 평가제 지지방문만큼 내가 설레고 좋았던 일이 없었다. 다음으로 감사했던 것은 일로써 해야만 하는 일이었지만, 30개소 이상의 원장님들께 연락하고 인사하며 내가 조직에서 중요한 사람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덕에 가는 곳마다 원장님들께서는 젊은 서기에게 "우리 서기님 고생이 많아요~ 고마워요~"하며 인정자극을 주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좋은 사람이야.' 하는 메시지가 마음속에 가득 울렸고, 육아와 일로 지쳐있는 메마른 나의 정서에 단비같이 촉촉하게 스며들었다. 내가 괜찮은 사람임을 확인하고 나를 더 몰아세우지 않는 방법은 그럴수록 나를 더 공개하고 사람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 좋은 꼬리표를 받는 것이라 생각한다.
연합회에서 매달 입금된 나의 자존감 덕분에 어린이집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어도 '나는 좋은 사람이야. 나는 능력이 있어. 이 문제도 해결해 낼 수 있을 거야. 나는 좋은 원장이야.' 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사람으로 지쳤을 때, 사람으로 풀었다. 물론 자연에서 회복하는 방법을 나도 선호한다. 때로는 우직한 산이, 편견 없는 나무가, 너그러운 꽃들이 나를 크게 위로하고 채워준다. 그렇다고 '나는 자연인이다!' 하고 외치기에는 책임져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나는 고작 30대이다. 교류분석 상담공부를 2018년부터 놓지 않고 해 오면서 관계의 힘과 건강한 교류의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실천하고 있다. 관계에 지친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자신에 대한 이해와 신념이 불안정해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있다 보면 본의 아니게 "너는 좀 ~한 성격인 것 같아, 그렇지?"하고 남들이 붙여주는 꼬리표를 몇 개씩 받아 들게 된다. 그럴 때 나는 무조건 방어부터 하고 보았었다. "아닌데요? 저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관계가 힘들지 않아 졌을 때 나는 남들이 붙여주는 꼬리표를 판단 없이 받아 들고 잘 정리하여 모으고 있었다. 그때부터 일치되기 시작했다. 남들이 보는 나의 모습과 내가 보는 나의 모습이!
아, 나는 친절한 사람이구나.
나는 친절한 내 모습이 호구 같고 싫었다. 손해 보는 것 같고 멍청해 보였다. 자신의 의견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야무지게 표현하며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고 동경하면서도,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용기가 나질 않을 거라는 생각에 좌절하고 괴로워했다. 그래서 남들이 나에게 친절하다는 칭찬을 하면 받는 즉시 반려했던 나였다. "아니에요~ 알고 보면 저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니에요."하고 손사례를 치며 돌려주었다. 이 못난 습관을 연합회를 하면서 고치게 되었던 것 같다.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칭찬을 거부하는 내 모습과 너무 자주 마주하게 되었다. 그제야 이영호 교수님께서 항상 강조하시는 '스트로크 경제법칙'에서 벗어나라는 말이 쇠망치로 후려치듯이 마음 깊이 들어왔다. 이제 나는 칭찬을 들으면 방긋 웃으면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 더 이상 삐딱하게 고집부리며 겸손한 사람인 척하지 않는다. 그건 겸손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야박하게 구는 자존감을 깎아먹는 나쁜 습관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회의 자리에 가도 "서기님~ 고생이 많지?"하고 인사해 주시는 분은 없다. 그냥 평회원이니까. 대신 "잘 지냈어요? 얼굴 보니까 너무 좋다!"하고 존재 자체로 인정을 받는 손원장이다. 2년간의 수고로 인해 받았던 조건적 인정이 이제는 그저 얼굴만 봐도 반가운 존재 자체로의 인정으로 대체된 순간이다. 내 삶도 마찬가지이다. 곧 다가올 내년이면 나는 더 이상 손원장이 아니다. 나의 원장으로서의 5년이, 더 나다운 손두란을 만들어주었다. 이제는 그냥 손두란으로 살아도 좋다고 손원장이 결재했다. 열심히 산을 오른 뒤에 맛보는 시원함과 뿌듯함이 삶의 구간구간마다 속속들이 배어있다. 거절을 못해서 얻은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이었고, 사람을 통해 얻은 것은 자아였다. 나는 거절을 못해 사람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마주하고 자발적으로 걸어 나왔다. 연임의 청을 거절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지만, 원장으로서의 마지막 1년은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남에게 하는 거절은 자신에게 주는 허가이다. 앞으로의 내 삶은 자신에게 주는 허가로 풍족한 삶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