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살에 국공립어린이집 원장이 되다.
나에게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꿈이 있었다. 도종환 시인의 '어릴 때 내 꿈은'이라는 시(詩)는 내 꿈을 그대로 표현한 듯했다. 시(詩)를 좋아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김용택, 도종환 이러한 시인들의 시(詩)를 마음에 품고 자랐다. 정리하자면 시(詩)를 좋아하는 교사, 내가 되고 싶은 것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부족한 성적으로 유사한 학과인 유아교육과에 진학을 했고,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영유아 교사로 젊은 날을 보냈다.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공부한 결과, 나는 34살에 국공립 어린이집 운영을 위탁받게 되었다. 사춘기도 없이 순순히 살아왔던 나의 삶이었고,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살아온 노력의 보답도 일찍이 받게 되었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아이들과 함께 놀이하며 보내는 삶은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벅차고, 때로는 사랑스러웠다. 평일에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주말에는 대학원 수업을 듣고 데이트를 했다. 서른 즈음에는 대학에서 만나 오랜 연애를 한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했고, 석사를 마치고는 곧장 인근의 대학에 시간 강의도 나갈 수 있었다. 평일에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주말에는 대학에 나가 현장의 어린이집 원장님들과 보육교사들을 대상으로 재직자반 강의를 하는 빛나는 삶이었다.
나는 결혼과 함께 아이를 갖기 전에 꼭 석사논문 인준과 어린이집 원장 사전직무연수를 마치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을 계획 한 그 해 3월, 교육대학원에 진학을 했었고 석사논문 인준을 받는 시기에는 어린이집을 퇴근하고 매일 1시간 이상을 운전해 타 도시로 원장사전직무연수를 들으러 다녔다. 그렇게 나는 결혼 3년 차에 부지런히 이 두 가지 숙제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아기가 찾아왔고, 임신 초기 하혈로 인해 어린이집은 예정에도 없는 퇴사를 하게 되었다.
나의 임신&육아기는 이벤트가 많았다. 우선 초기 하혈로 인해 퇴사를 하였고, 중기에는 자궁근종의 통증으로 타이레놀을 먹으며 버텼다. 임신 말기에는 갑상선 기능저하와 임신성 고혈압으로 약을 먹으며 건강을 살펴야 했고, 출산 후에는 아이에게 선천성 기형이 있어 세 번의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아이를 대학병원으로 보내야 했었다. 하지만 나는 워낙 긍정적이고 뭐든 잘 해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많은 일들도 뚝딱! 해냈다.
1월에 출산을 하고 아이의 세 차례 수술을 반년만에 마친 나는 그 해 10월, 국공립어린이집 원장 위탁심사에 도전했고 합격을 하였다. 그 사이에 직장어린이집의 원장에도 지원을 했었고, 민간어린이집의 급여 원장 자리도 요청이 있어서 고려를 했었다. 운영 경력이 전무했지만 그땐 무슨 연유였는지 시켜만 주면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대단했던 것 같다. 직장어린이집 원장 지원은 보기 좋게 채용되지 않았고, 민간어린이집 급여 원장은 거리가 멀어 어린아이를 키우면서 해내기엔 무리인 것 같아 고사를 했다. 그렇게 아쉬움을 안고 다음을 기약하던 중에 신규 아파트 국공립 어린이집 위탁 공고가 4개소나 동시에 나왔다. 대학원 동기 원장님을 통해 공고 소식을 뒤늦게 듣고 고민할 시간도 없이 서류를 바로 준비했다.
그 당시 아이는 10개월에 접어들었고, 아침 6시 30분에 기상을 하고 저녁 6시 30분에 잠이 드는 효자 중에 효자였다. 12시간은 육아를 하고 12시간은 서류를 준비하는 강행군을 일주일 정도 했고, 서류 접수 마지막날 겨우 준비한 서류를 제출할 수 있었다. 서류 제출 후에는 곧바로 발표 준비에 들어갔다. 내가 원장 위탁을 받기에 마땅한 사람임을 5가지로 정리하였다.
1_전문성
2_인성
3_풍부한 인적자원
4_지역사회에 기여
5_젊은 모성
준비한 소견 발표를 잘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에는 교류분석 부모훈련(TAPT)에 대한 추가 질문과 인성과 관련하여 나의 관점을 조금 더 깊이 물으시는 질문, 표준보육과정 개정과 관련하여 아동중심-놀이중심을 어떠한 방식으로 풀어나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 등이 위원님들로부터 나왔고 소신 있게 답변하였다. 그렇게 발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고, 다음날 아침, 시청 홈페이지에서 합격 공고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합격 후, 바쁘게 일이 진행되었다. 설계와 인테리어, 기자재 및 비품 구입, 교직원 공고 및 면접, 인가를 위한 여러 검사 등 이제 겨우 10개월이 된 아이를 아기띠에 안고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고 개원을 위한 준비가 막바지에 다다를 때, 뉴스에는 코로나19라는 감염병이 등장했다. 2020년 03월 01일, 내 생애 첫 어린이집은 코로나19와 함께 문을 열었다. 코로나로 인해 원아모집이 쉽지 않았다. 한 명, 한 명이 소중하고 감사했다. 그렇게 더디지만 차근차근 어린이집을 갖추어 나갔고, 개원해 11월에는 어린이집 평가제 현장관찰도 해냈다. 나는 뭐든 닥치는 대로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로부터 4년 반이 지난 지금, 나는 퇴사를 앞두고 있다. 원장은 내 인생의 첫 도전이었고, 다시 오지 않을 5년이 될 것이다. 다시 5년 전으로 돌아간다 하여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하였을 것 같다. 국공립 어린이집 위탁에 도전하였을 것이다. 내 인생에 이 5년은 나 자신을 자각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고,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삶의 가치와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흔을 앞두고 지금 격렬하게 겪고 있는 이 사십춘기의 끝에는 정말 나답고 자율적인 나만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