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미국의 한 부둣가에서 산책을 하던 남자가 실수로 바다에 빠졌습니다. 사고 지점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젊은이 한 명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죠. 다급한 구조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심하게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물에 빠진 청년은 익사하게 되었고 그의 가족들은 아들을 죽게 내버려 둔 그 사람을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하지만 법령상 구조 의무가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송은 기각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선한 사마리아 법이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요?
선한 사마리아인법, 혹은 착한 사마리아 법이란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조할 수 있음에도 외면할 경우 구금 및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는 법입니다. 현재 프랑스, 벨기에, 독일 등 유럽 국가에서는 선한 사마리아법을 제정하여 구조를 의무화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는응급 의료에 관한 법률 일부에만 시행되고 있습니다. 윤리적 도덕적 영역을 전반적으로 법제화하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죠. 이 법과 선한 사마리아인은 대체어떤 관련성이 있는 것일까요? 용어의 출처를 찾아 누가복음 10장으로 가보겠습니다.
[눅10:30-37]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어떤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 거의 반죽음이 된 상태로 길거리에 버려져있었습니다.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이 차례로 그곳을 지나가게 되는데요. 당연히제사장 혹은 레위인이 발벗고 나설 것이라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현대 사회에서 목사님이나 신부님을 가리키고 레위인은성전에서 일하거나 백성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선행을실천하고 전하는 사람들이기에 당연히내릴 수 있는 판단입니다. 그런데, 현실은어땠을까요? 성경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피해 갔다'라고 기록합니다.같은 유대인이었음에도 쓰러져 있는 사람을외면한 채차가운 구경꾼으로 남게 되는 것이죠.
세번째로 사마리아인이 그곳을 지나갔습니다.사마리아인은 사마리아 지역에 이주한 이방인들과 섞인 혼혈족들로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대상이었습니다. 혈통의 순수성이 지켜지지 않고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이라는 평판 때문이었죠. 평소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종도 하지 않는 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쓰러져있던 유대인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유일하게 자비를 베푼사람이었습니다. 그는가던 길을 멈춰 서서 사마리아인의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응급처치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여관) 주인에게 회복할 때까지 치료를 부탁하고 미리 돈을 쥐어줍니다. 돈이 더 들 경우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는 약속까지 하며따뜻한 개입자가 되어주지요.
구경꾼 효과와 동조 효과
사마리아인을 앞서 지나갔던 제사장과 레위인의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꽤나씁쓸함이 밀려듭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그들의무정함에돌을 던질 수만은 없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TV 뉴스나 신문 기사에 종종 등장하는 장면이기 때문이지요. 취객이나 노숙자들을 그냥 지나치는 경우는 물론이고요, 2년 전 서울에서는 피투성이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신고하기는커녕 그냥 지나쳐서 죽게 한 사건까지 보도되었습니다. CCTV를 돌려본 후 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는데요, 신고나 구조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현장을 지나갔던 행인이 무려 50명이나 되었습니다.
오래전 성경 속 이야기들이신기하리만치 지금 이 시대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속성은 시대를 초월하여불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행인들은 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쳤을까요?단지, 마음의 온기가 없는 매정함때문일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요? 얼마 전 학교에서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을 때 강사님이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군중 속에서 심정지로 쓰러진 사람을 발견하고 심폐소생술을 하기 전, 응급구조대에 신고 요청을 할 때는 반드시 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지목하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무도 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빨간색 줄무늬 옷 입고 계신 분, 119에 신고해 주시고요, 흰색 남방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낀 분, 자동 심장 박동기를 가져다주세요!"
함께 구조 지원을 해줄 사람의 인상착의를명확하게 묘사하며 지정하는 것이 책임을 부과하여 행동으로 끌어들이고 도움을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이 됩니다. 사람들은 군중 속에서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하겠지...'라는 안일과 소극적인 태도를갖게 되는데사회심리학에서는이를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 혹은 구경꾼 효과로 설명합니다.
주위에 사람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는 현상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남들이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해서 방관하는 상태나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다른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는 가에 따라 판단하여 행동하는 현상. 방관자 수가 많을수록 어느 누구도 도움을 받을 가능성은 작아짐.
-출처: 위키백과-
1968년 달리와 래타네는 사람들이 위기의 상황에서 왜 행동하기를 주저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실험을 진행하였습니다.사람의 숫자가 많을수록 책임감이 분산되어 행동을 미루게 된다는 현상을 입증하게 되는 연구였지요.도움의 손길이 많으면 의기투합하여 재빠른 협조 체제가 발동될 것 같은데 오히려 구조의 가능성이 적어지는 기묘한 심리기제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유사 개념으로 '동조효과(conformity effect)'가 있는데요,이는자신의 의견이나 판단의 기준을 타인에게 맞추어 다수의 선택을 따라가려고 하는 심리적 경향을설명하는용어입니다. 모두가 맞다고 할 때 혼자 아니라고 주장하지 못하는 이유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지요.동조효과는불확실한 상황 속에서안정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 주변을 살피는 평균화 전략중 하나로, 다수의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군중심리 입니다.사실, 다수의 선택이 종국에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우매하고도 위험한 결정이 될 수도 있는 데도 말이지요.
마음의 방향
예수님께서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은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물리적으로 근접한 거리, 타인을 도와야 하는 역할, 혹은 빈번한 마주침이나 관계 맺음등이진정한 이웃의 조건은 아닙니다. '진정'이란 거짓이 아닌 '참', '진짜'를 의미하는데요,그럴싸한 허울을 걸친 관계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진위를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상대에 대한 관심이 '나'를 향한 것인지 순수하게 '너'를 위한 것인지의 차이입니다. 나의 무엇을 이루려고 상대에게 인위적으로 쓰는 노력은 결국 관심이라기보다는 미래의 내 배를 불리기 위한 투자,내지는 위선이나 가식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순수하게상대의 안위를 바라는 마음이 바로 차가운 구경꾼과 따스한 개입자를 구분하는 지표입니다.진정한 관심은 마음씀,시간 씀, 그리고애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지요. 마음을 주려면 우선, 시선이 머물러야 합니다. 나를 위해 바쁜 일상에서 달리지 않고 걸어야, 걷지 않고 멈춰 서야 주변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가 열립니다. 내가갈 길에만 집중하면 주변 정황은 스쳐 지나가는 배경일뿐, 정성 들여바라볼 수 있는 전경이 되지 못합니다. 매 순간 한 폭의 삶이파노라마처럼 지나갈 때눈과 마음에걸려 들어오는 크고 작은 인생컷들이 인생책에 기록되고 추억으로 재생되는 것이지요.
따스한 마음을 나누는 것은 상대를 위하는 것 같지만 실은 나를 위한시간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으면, 그 기도의 축복은 고스란히 나에게로 모두 되돌아온다는 말처럼말이지요.우선, 방향이 내가 아닌'너'를 향해 있는 애씀은 이타적인 마음 밭을 기경하는과정입니다. 자기 안위라는 단단한 껍질을뚫고나와바스락하게 메마른마음이촉촉해지도록 물을 대는 작업이랄까요. 도움의 손길로내가 누군가를 지탱해주다 보면 나를 지탱해 줄물기 가득한 세상, 옥토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남을끼워 넣어 원을 크게 그리는 삶은 혼자 고립되지 않는 풍성함이기도 하지요. 무심(無心)이 유심(有心)이 1되고, 무채색으로 덮일 장면이 아름다운 빛깔로 채색되는 세상은차가운 구경꾼 무리보다 따뜻한 개입자들이 모여만들 수 있습니다. 멋진 세상을 빚어가기 위해 오늘, 누구에게 따스한 온기를 나누어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