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된 원고를 출판사에 직접 투고하여 출간 계약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출판사에서 직접 러브 콜을 받은 후, 원고 작업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모두 기획 출판이라고 부르지요. 투고가 계약으로 이어지는 과정도 짜릿하지만, 출판사로부터 먼저 원고 의뢰를 받은 첫 경험은 더욱 잊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왜 나에게?'라는 의문이 먼저 들었어요. 책 출간 분야에서 자신감과 경험이 바닥이었던 터라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과 두려움이 앞섰거든요. 계약서 작성 후, 원고 작업을 할 때의 부담감 역시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의 처음은 어색함과 어설픔 투성이었죠.
초보의 첫걸음을 뗀 이후로 과분하게 세 개의 출판사와 일곱 번의 선의뢰 기획 출간을 진행하였습니다. 앞으로 두 번의 원고 작업이 더 남은 상태이고요. 언제 또 시작해서 마무리 지을까... 하는 부담을 늘 안고 있지만 (공저를 포함하여) 투고보다 선의뢰 기획 출판의 횟수가 더 많았다는 사실에, 그리고 이제는 두려움을 떨쳐버린 담대한 마음에 감사하게 됩니다.
둘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른 과정입니다. 출판사 선의뢰 기획 출판으로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하는 과정에서 겪은 깨달음을 정리해 보려 합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첫째, 현재의 나를 있게 한 과거의 행적, 바로 지금까지 해온 일은 큰 자산이 됩니다. 책을 쓰기 전까지 영어 교사를 계속해야 할지 멈춰 서야 할지 위기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새로운 나로 변화되고 싶은 열망은 옷을 완전히 갈아입고 싶은 욕구와 맞물려 마음을 산란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고민의 부유물들을 가라앉히고 찬찬이 들여다보니 현재에 대한 무책임한 회피임을 알게 되었어요. 그려 놓은 그림을 모두 지워버리고 백지로 시작하는 것보다 조금씩 수정하여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 가기로 방향 잡았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영어 필사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평생 공부하고 가르쳐온 영어는 새로운 나를 만들기 위한 걸림돌이 아닌, 버팀목이 되어준 셈입니다. 지금의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 그리고 내가 가진 현재까지의 '무엇'은 책출간의 무기가 됩니다. 스스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회피기제는 아닌지 점검해 보세요. 지금까지의 시간은 결코 허비되지 않고 고스란히 내 안에 쌓여 내공으로 자리 잡고 있답니다.
둘째, 출판사에서 원고 자체뿐만 아니라 저자의 경력도 유심히 살핍니다. 학부모 교육서를 집필해 달라는 출판사의 첫 제의를 받은 것은 투고했던 '원고'가 아니라 교사로서의 '경력'때문이었습니다. 10년 이상 고등학교에서 근무한 영어 교사 저자를 찾고 있던 출판사 편집장님에게 교직 경력이 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에세이를 투고했는데 다른 분야의 책을 집필해 달라는 역제안을 받다니요. 작가 소개서를 쓸 때, 꼭 이 원고가 아니더라도 다른 계약이 성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공을 들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책을 직접 기획하는 편집장님들은 원고를 써줄 저자를 물색합니다. 서점이나 인터넷을 통해 유사 분야에서 책을 쓴 분들, 이전에 계약해서 책 작업을 함께 해 본 분들, 그리고 원고 투고자들까지 저자풀을 모두 가동하여 적합한 집필자를 찾습니다. 이때, 어필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는 당연하지만 누군가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자기 정체성이겠지요. 거창하게 퍼스널 브랜딩까지는 아니더라도 저자 소개글에 자신만의 색깔을 담는 것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절차입니다. 게다가 특정 분야의 책을 꾸준히 내다보면 그 영역에서 타출판사의 의뢰를 받게 되는 선순환도 이어집니다.
셋째, 출판사와의 약속 이전에 나와의 약속을 지켜내야 합니다. 원고집필 마감일은 표면적으로는 출판사와의 계약이지만 언제까지 글을 쓸 것이라는 스스로의 다짐입니다. 예상 속도를 가늠하여 집필 마감일을 정했으면 요령을 피우거나 변명을 찾지 말고 자신을 이겨내는 글쓰기를 해야 합니다. 브런치의 연재글 발행은 나만의 속도와 완급 조절을 연습해 볼 수 있는 유용한 플랫폼입니다. 일단, 나와의 약속을 지켜내면 글의 분량은 물론이거니와 글쓰기 근력이 채워집니다. 이를 책 쓰기에 적용한다면 출판사의 저자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과정이 되겠지요. 계약 후, 원고 마감일 준수는 동일 출판사와 지속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는 끈이 됩니다.
통상적으로 3개월~6개월 정도의 집필 기간이 제시됩니다. 물론, 시간이 더 소요된다면 사전 협의 하에 마감일을 조정하면 됩니다. 출판사와 신뢰도가 쌓이면 원고 작업의 시작 시점을 유예하는 여지도 생겨납니다. 글쓰기는 정신적 에너지를 쏟는 과정이기에 완급을 조절하며 시간 배분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마감 기한을 넘어서거나 설사 날짜를 맞춘다고 하더라도 탈진될 수 있거든요. '작가는 마감일이 핵심이다.'라는 말처럼 무리하지 말고 페이스 조절을 하면서 나와의 약속을 꼭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가끔은 내가 쓰고 싶은 책보다는 출판사에서 원하는 책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마침, 쓰고 싶었던 책을 선의뢰 해주신 경우도 있었지만요)
그러기에 지금은 작가라기보다 저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라는 호칭에 대한 심리적 정의는 사람마다 다른 것이기에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저명한 작가님들은 책을 구상하고 집필하는 데까지 몇 년이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가로서의 철저한 작업관이 부럽기도 하고, 언젠가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은 수습생으로 부단히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요.
여러 출판사 편집장님들과 작업을 하다 보면 그 과정들이 조금씩 다름을 경험합니다. 직접 투고와 선의뢰 계약의 차이와 함께 조만간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 출간이라는 벽이 (높은 것도 아닌) 높아 보이는 것이지, 일단 이 세계에 발을 들이면 지속성을 갖게 됩니다. 맛을 들이게 되는 것이라고 할까요. 출간된, 그리고 출간될 책들을 떠올리며 그간의 애씀을 토닥여 봅니다. 꼭 글쓰기 분야가 아니더라도 특정 영역에서 노력해 온 나의 땀과 시간을 치하해 주는 오늘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