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아프기 시작했다. 저녁이면 선선해서 에어컨도 안 켜고 자는데 감기가 오려나. 다음날, 머리가 지끈거리더니 열이 38도까지 오른다. 이런, 아이를 위해서는 처방전까지 받아가며 감기에 장염 복통, 피부병 등 모든 약을 챙겨 왔는데 정작 내 것은 하나도 없다. 어쩌나,오한이 와서 부들부들 떨며 이불을 끌어안고 잠을 잤다. 아이는 옆에서 TV 삼매경, 그야말로 방치다.
안 되겠다 싶어서 병원으로 향했다. 아이를 해외로 끌고 와서 내가 아프면 안 되지 하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었다.체온을 재기 위해 여기서는 겨드랑이에 체온계를 넣는다. 다행히 열감이 많이 떨어졌는지 37.4도다. 목이 따끔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목감기 판정을 받았다. 의사가 약을 처방하는 동안 의료비를 정산하는데 입이 딱 벌어졌다. 무슨 병원비가 이렇게 비싼 걸까. 인도네시아 루피아화가 워낙 단위가 커서 아직도 돈 세는데 감이 없어 헤매고 있던 차에 가지고 갔던 현금을 계산대에 놓았더니 그게 아니라고 머리를 흔든다. 0이 하나 더 들어간단다. 들고 있던 현금을 다 털고 나서야 결제가 끝난다. 여간 큰돈이 아니라는 감만 잡고서 "I'm broke.(파산했네요)"하고 농담을 던졌다. 의료진은 웃음을 띠는데 아이는 단번에 울상을 짓는다.
"엄마, 우리 진짜 돈 이제 없어요?"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는 순수한 아들 녀석 같으니라고.
진료 내역서 및 의료비
후들후들.... 1,108,000 루피아는 9만 원에 가까운 돈이다. 병원 한번 갔다 오면 10만 원 정도의 돈이 깨지다니 이곳에서는 건강 관리를 잘해야 한다. 수액 한번 맞고 나니 20만 원이 훌쩍 넘었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다행히 여행자 보험을 들고 와서 보험비의 3배 이상은 뽑아낼 듯하니 손해 본 장사는 아닌 것 같다.
여기서 잠깐, 루피아화의 감을 잡아보자. 사실, 루피아화는 단위가 커서 돈을 막쓰게 되는 경향이 있다. 환율로 살펴보면 10,000루피아가 1,000원에 좀 못 미치기 때문에 쉽고 단순하게 접근하자면 루피아화에서 그냥 0 하나 떼어내는 것을 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현지에서도 화폐의 단위를 표시할 때 0을 줄줄이 나열하지 않고 천 단위를 K로 대체해서 쓴다. 예를 들어, 100,000루피아는 100K로 표기한다.
루피아-원 환율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의 건강은 무엇이 문제였을까? 면역력 문제인가? 먹는 것의 문제인가? 발리에 오면 해산물을 그나마 안전하게 먹어볼 생각을 했던 것이 오산이었을까? 아이가 설사를 하는 것을 보아 먹는 것도 문제였을까 싶어여러모로 분석해 본다. 배달시켜 먹은 초밥이 살짝 찜찜하다.
콜택시를 부르는 앱으로 유명한 [Grab]이 사업을 확장하여 음식 배달의 신세계까지 열어 주고 있다. 호텔에서 나가기 귀찮으면 단순 클릭 몇 번으로 로비까지 배달된 음식을 받을 수 있다. 음식 준비, 배달 소요시간, 실시간 배달 이동 경로 등 모든 정보를 세세하게 전달해 주는 편리함 때문에 앱을 깔자마자 우수 고객이 되어버렸다. 저녁을 기름지게, 거하게 먹지 않기 위해 초밥을 시켜 먹었더니 더운 날씨에 오토바이 배달의 열기를 견디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일말의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이제 다시는 초밥 배달 주문은 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웬만하면 즉석에서 요리되는 현장 음식을 먹어야겠다.
그랩의 메인 화면
다행히 하루 병앓이를 하고 나니 거뜬히 일상생활이 정상화되었다. 그래도 큰 병치레를 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하늘을 가로질러 뚝떨어져 나온 이국땅에서의 여행 기간 중에는 제대로 시간을 즐기기 위함도 있겠지만, 안전하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건강을 돌보아야 한다. 그러고 보니 삶의 모든 영역 구석구석까지 넓게 펼쳐져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내는 요소가 바로 건강인 듯하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을 모르고 병자만이 건강을 안다더니, 질병의 발길질에 차일 때마다 건강의 중요도를 더 느끼게 된다. 건강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 자유로운 여행을 위해서라도 붙어있는 건강이여, 제발 버텨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