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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Sep 16. 2022

감사함의 크기를 다르게 느끼는 유전자가 있대

9월 16일, 오늘은 거의 두 달만에 처음으로 글을 쓰는 날

어차피 오늘 쓰고, 오늘 모은 글들도 나중에는 어떤 기분으로 썼는지 까먹을게 뻔하다. 사람들은 감사한 일들을 기록하고 상고하고 또 기억하며 삶을 꾸려나가는데 나는 극단적인 사고방식과 피폐한 정신으로 정신 나간 인스타 감성 카페마냥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이렇게 꾸미니 예쁘고 편하다고 합리화 중이다. 그래도 일관된 주제와 의미가 없다곤 할 수 없는 게 언제 읽어도 기분 안 좋았던 내가 썼구나 싶긴 한 마음이 들긴 한다. 유적지에 쓰여있는 누구누구 왔다감. 정도 낙서는 아니라 다행이다.


개운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은 게 언제였나. 쌓인 고민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때가 온다. 그건 나이나 생각의 깊이, 생각과 뚫어온 오랜 기간과는 무관하게 찾아오는 것이라 정말 쥐어짜 내고 모아서 누구에게도, 하는 수식어를 피하고자 평생의, 혹은 반영구적인 반려를 찾는 것이 아닌가 했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어 한 달이 넘는 시간만에 글을 취합하려고 하다가 다 날려먹었다. 사실 이제 내가 시시각각, 혹은 일정 기간 동안 겪는 감정들이 대단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전혀 유쾌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번 여름은 나한테는 너무 지독했기 때문에.


안 하던 일을 하면 당연히 잘 될 리가 없다. 썩어도 준치인 이유는 태생이 그만큼 무겁다는데 의의를 두고 만들어진 말일지도 모르겠다.


텀블러 안에서 쿰쿰한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서 식초와 물을 넣어서 담아놓기도 하고 다음 날에는 끓는 물을 흠씬 부어서 채워놓기도 했다. 긴 여름 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담은 얼음들이 이상했던 까닭인지 때로는 그렇게 텀블러 세척에 열과 성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자주 배탈이 나곤 했다.


나는 배가 아픈 원인을 알기가 어려운 사람이라 굳이 텀블러에 담겼던 얼음을 원인으로 지목하지 않았어도 됐지만 챙겨 먹기 시작한 크레아틴은 수분을 끌어당겨 몸에 가둬두고 늘어난 대사량 탓에 말랐을 시절에는 잘 나지도 않던 땀이 참 많이 났기에 평생 들고 다니지도 않던 물통을 들고 다닌 올해 여름의 특별한 행동에게 귀책사유를 묻는 것이 타당하다고 느꼈다.


근 2년간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것 같다는 말이 이제는 너무 자주 되뇌고 적어두다 보니 식상하기 그지없으나 나는 정말 어떻게 되어버린 느낌이 든다. 겸손이 적었던 20대의 초읽기에 나는 읽어내고 얻어낸 것이 정말 많았지만 그와 반대로 스치건 돌파했건 지나쳐 왔던 것에 대한 복기와 AS가 노획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는지 많은 리베이트가 있었고 내가 아무리 배우고 벌어도 마이너스 부호는 통장에서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요새 어플에서는 알아서 내 총자산을 실셈해주던데 나는 오히려 모르던 재산이 합계될 일 보다 잊고 있던 채무가 불어날까 두렵다.


8월 7일

그것은 불같이 끓기도 하며 성에가 끼고 하얀 냉기를 내뿜을 만큼 차갑기도 하다. 유용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겠다마는 그런 극단의 온도가 주는 강렬함은 고통이 분명하며 때론 세상을 들여다보는 조리개 역할을 겸한다.


또 일부러 버스를 탔다. 꿈은 도처에 깔렸고 나도 배금 말곤 추종할 이렇다 할 수 있는 명확한 골을 찾지 못하겠기에 그 열망이 더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라며 주는 족족 먹어치우는 영원히 굶주린 저 선지자에게 세금을 낸다.


돈, 시간, 명예 뭐하나 없는 시기를 지키는 방법은 현재에는 없으며 다름 아닌 미래의 내가 그 부채를 갚는 방식으로만 상환이 이루어진다는 순리를 누구도 알려주지 않지만 그건 보이지 않는 바람과 같으리. 보이지 않으나 어디로 흐르는지 알 수 있다.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아무나 알 수는 없다.


깊숙한 빙하 속에서 흘러나오며 오래되어 이젠 감정 하나 없이 인정하게 되어버린 어떤 사실과 감정이 뇌리를 가득 채우는 때에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딱 두 개다. 가서 쇠를 들거나 눈을 붙이고 정신 전원을 내리는 거. 이 훈련은, 혹은 이 실전에서는 아무도 CS 탄가루를 물로 흘려보내 주지 않는다. 온갖 것을 질질 짜면서도 물가를 찾던 수돗가를 찾던 해야 한다.

정은 반에 의해 부정되고 합을 이룬다. 합은 정이 되고 다른 반에 의해 부정된다. 도통 부정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견딜 수 없지만 막상 긍정의 인간이 나타나면 그렇다고 거부할 필요는 없다는 아이러니를 견디며.


음, 이 우울의 풍미. 정말 오래되고 잘 보관되고 숙성되었다. 이 우울. 이제는 피조물을 드러내는 것조차 번거롭고 우습고 부끄럽고 무엇보다 내키지 않아져 버린 이 맛과 향.

빛 좋은 개살구. 극복할 수 없는 한계에 대해서 말하려 한 것일까? 살구. 개살구. 예쁘게도 생겼다더라.


9월 7일

나르시시스트는 허상을 사랑하고 역설적으로 무엇도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자의식 과잉이라는 말로부터 벗어나기. 그건 실로 어려운 일이다. 내가 겪는 일이 가장 힘들고 내가 살아가는 삶의 난이도가 가장 높은 것이 인간이니까. 하지만 나의 과잉된 자의식이 매일 밤 적어놓고 튀는 쪽지에는 딱 하루정도 상고할 수 있는 과장된 일들이 적혀있다. 나는 종일 그 말들을 곱씹어 삼킨다. 소화가 다 될 쯤에야 오늘 쓰는 글은 과장되지 않기를 바라고 내일 하는 작업에 교만이 없기를 바라지만 실로 피로를 전혀 해소시켜주지 않는 어스름한 새벽의 수면이 끝나면 어김없이 쪽지가 한 장 머리맡에 올라와 있다.  


일상에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내가 있는 곳은 여전히 집의 내 방이었다. 뒷심이 약한 사람일까. 이루고자 했던 일의 부담들을 차례로 덜어내고 그 부담을 내가 일전에 들이던 힘만큼의 수고를 하지 않고도 질 수 있을 때가 된 후에 나는 긴장이 풀린 것인지 목적을 망각한 것인지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언제나 내 다음 과제는 이 능선에 가려 보이지 않고 고점에 다다르게 되어야 비로소 보일 것이다. 갈등과 역경은 파도와 같이 휩쓸려 넘기던 잘 타 넘기던 결국에 잠잠한 수면에 뜨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이 고점인지, 내가 지금 몸을 맡기고 있는 이 상황이 파도인지 아닌지, 만약 파도라면 어느 정도 크기에 파도인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지 않은가.


무엇이 나를 이리도 불안하고 안달하게 만드는가? 시간이 따라붙어 질문한다. 언제 중단되어도 미련 없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은 적어도 나에게는 항상 최선을 다하고 높은 지향성을 가지고 살아가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은 어떤 중요한 것도 훌훌 털어버리고 떠날 수 있는 마인드셋을 갖추자는 자기 암시에 가까웠다.


과거를 담은 티백이 하도 많이 우려먹어 이제 아무리 따뜻한 물을 부어도 그저 맹물을 뱉어낼 때가 되고 나서야 나는 차의 맛을 기억해냈다. 줄곧 은은한 향이라고 여기며 들이켰던 향이며 음료는 그저 수증기와 맹물이었기에 착각을 깨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불현듯 이제 어떤 재료로 이 찻잔을 채워 마셔야 할지 알기 몰랐기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시간은 즐거운 일을 하기에도 부족했고 항상 돈은 수중에 없었다. 사랑은 잘 작동하나 싶다가도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기계처럼 덜컹대고 이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망가져버렸다. 여전히 우매하지만 구별이라는 인식조차 없던 때에 총체적인 존재를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서로가 세상에는 필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섭리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여전히 그 섭리를 믿으려 하지만 그 믿음을 유지하는 게 내 삶에서 건강한 영향력을 발휘할지는 모르겠다. 이제 믿지 않는 것. 그럼 일전에는 믿었다는 것인가?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하다.


9월 9일

남의 시선을 유독 신경 쓰는 시기가 있다. 남들이 하는 건 나도 해야만 할 것 같고 남들이 가진 것은 나도 꼭 가져야 할 것 같은 그런 시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격적인 성장을 거치면서 자아를 확립하고 개인의 주관을 통해서 많은 견해들 사이에서 취향과 객관을 구분해낸다.


보통 그런 시기를 우리는 사춘기 때 겪으며 그렇기에 유년시절과 청소년기가 이후 개인의 사회적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시간을 뚫고 나온 성인이라면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자신에 대한 주장을 통해 개인의 위치를 선점했고 나는 줄곧 선점이라는 특혜를 누리려 무던히 노력했다. 하지만 실패한 선점에는 설레발이나 호들갑과 같은 부정적 에너지를 내포한 단어가 따라왔고 나는 선점이라는 말의 고결성을 지키기 위한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누구도 시키지 않은 싸움을 이어나가야만 했다.


실의에 빠진 날들이 있었, 지만이라고 말하고만 싶다. 늘 실의에 빠져있다면 그건 극복 의지와는 무관하게 언제나 탈력스러운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니까.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 애초에 표면에 붙이지 않으면 된다. 피객패는 내가 걸면 되는 노릇이고 상대는 체면을 위해서라도 몇 보 뒤에서 피객패를 확인하고 돌아가면 된다. 지향점도 뭣도 없이 붙일 땐 금방이지만 그걸 뗄 때 겪은 우여곡절을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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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에서는 알람을 보낸다. 아마 한 달 정도 글이 뜸하면 보내는 모양인데 사람이 참 간사한게 그래도 누군가가 본다는 생각에 적나라하고 원색적인 이야기들을 적다가도 메타포로 뭉뚱그려버린다. 혼자서 메모장에 배설하는게 쉬운 오늘에야 전처럼 아, 글 주기적으로 올려야지. 하는 부담없는 쫓김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에 괜시리 속상해졌다.


미련이 많아 미련해졌다. 불안이 많아 불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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