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과부 할매집 장독대 옆빨간 고무 다라에도 흙투성이 빨랫감이 각 잡고 얼어간다. 빨래가 뻣뻣하게 얼어 갈수록손 끝이 아린다. 어차피 저 빨래를해줄 어른이 없으니 내일은 논바닥 나가 놀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도시 사는 손녀는 학교 겨울방학식날 촌에 들어왔다 개학식 전날 제 집으로 간다.
제법 당차 열두어 살에도 혼자 촌까지 버스를 타고 오고 간다. 손끝 야물어 살림살이 뭐 하나 못하는 게 없다. 할매는 야문 손이 대견하고 자랑스럽지만, 엄마는 유독 조그만 고 야문 손이 안쓰럽다.
적적한 노인네 긴 밤 말동무와 해뜨기 전 서너 번은 뚜껑 떨어트리는 요강 소재도 말없이 해내는 손이기에.
겨울 끝자락 덜컹대는 버스 차창으로 제법 따스한 햇살이 머물랑 말랑 머물랑 말랑 한다.
길게 늘어선 나무를 지나면 비로소 햇살은 안심하고 들어온다.
고들빼기, 가죽나물, 죽순, 가시오가피순 장아찌가 될만한 건 죄다 눌러 담아 어떻게 놔도 앞으로 옆으로 자빠진다. 시큼한 장아찌 국물이 곧장 새어 나온다.
사는 거 바빠 촌에 한번 들어오지도 못하는 아들에게,
한 계절 손 굽도록 따서 담근 장아찌라도 보내야그리움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엄마 마음일 테다.
버스 내리기 전, 손바닥만큼 흘린 국물을 운동화벗어 꾹 눌러본다. 누가 볼세라 얼른 신발을 집어 신고 내린다. 시큼한 냄새의 무게만큼 손가락은 금세 시뻘게진다.
집에 아무도 없다. 엄마는 3교대 야간근무 가고 아버지는 시장 장사길에서 아직 못 온다.
양 사방 야박한 시멘트벽의 겨울은 촌 논바닥보다 더 시릴 텐데 이 추위에 발걸음 없는 시장에서 김 한 축 팔기 위해 서 계시겠지.
긴 추위를 나기 위해 명절에도 촌 한번 못 간 어른들의 이유 있는 불면과
추위 견디며 노점에, 밤잠 못 자고 방직기 앞에 선 부모를 바라보는
일찍 시건 든 어린것이 적적한 노인네 수발을 자처하고 나선 당찬 마음이라는 것을 김 팔던 아버지는 알까?
왁자지껄한 대문 소란 뒤에 눈 땡그란 녀석 하나, 얼굴 똘방한 녀석 하나 들어선다.
한 뼘 키 차이로 나란히 선 두 얼굴에 빨간 피자두 네 개, 쩍쩍 갈라진 등거북손 네 개. 여전히 장난질에 바쁘다. 넓적한 대야에 허연 김이 펄펄 나면 도망가는 손 잡아넣고 손 여섯 개가 조몰락조몰락 물반죽을 한다. 게 중에 제일 큰 손 나와서 땡그란 눈도 닦고, 똘방한 얼굴도 닦아낸다.
딱지 앉은 낮은 언덕배기 끝을 살짝 부여잡고 말한다.
“흥 해.”
내복바람재비 둘 아랫목에 밀어 넣고 이미 컴컴해진 부엌문을 연다. 후다다다닥 쥐 한 마리 눈치 빠르게 도망간다. 그래. 네가 흙발로 덤비는 놈보단 낫다.
둥그런 곤로 심지에 아리랑 성냥심이 닿으면 연말 송별의 밤 촛불 행렬이 펼쳐진다. 찬장 중앙에 면포 덮인 작은 대바구니 속 계란은 두 개 굽고 나니 한 알 남았다.
이건, 밤일 마치고 오는 엄마 줘야지.
시멘트 마당 바닥에 노르스름한 빛이 들어선다. '흥' 한 세숫물이 흐른 마당 한켠이 굵은 한줄기 물로 얼어간다. 엉덩이 하나 겨우 걸치는 좁은 툇마루에 서니 맨발이 아프다.
엄마는 오늘밤 안 온다. 아니, 못 온다. 그래서 언제 와도 올 아버지가 빨리 저 노르스름한 빛 가운데 그림자라도 비쳤으면 좋겠다.
김 오십 축 등짐 지고 나갔는데 운수 좋으면 곧 대문이 열리겠지?
쿵 ! 살짝 열린 대문이 남은 등짐 때문에 부산스럽게 소리를 낸다.
“아부지 오셨다!”
가불가불 잠눈을 하고 있던 내복바람재비 둘이 용수철처럼 튀어나온다. 일 번, 이번, 삼 번 순서대로 툇마루 중앙에 선다. 컴컴한 마당 구석에 별로 줄지 않은 등짐 내려놓는 아버지의 어둠 속 하얀 이빨이 보인다.
밥은 안 자시고 막걸리만 드셨나. 내딛는 발이 반발 꼬인다. 말없이 서서 헐렁한 주머니 속 원을 그리며 휘젓는다.
한참을 뒤적이다 주먹 두 개를 내놓는다.
“자, 일 번” 똘똘 뭉쳐진 오징어 다리 한 주먹.
“자, 이번” 간간이 땅콩이 낀 오징어 다리 한 주먹.
다시 헐렁한 잠바 주머니에서 손을 빼낸다.
“자, 삼 번” 삼각 오징어 귀 한 주먹.
모두 얼굴이 환한데 삼 번 표정만 쌜쭉하다.
행운을 잡은 이번은 땡그란 눈으로 곁눈짓 하다 내복 앞섶을 펼쳐서 제 것과 삼 번 것을 함께 쏟아붓는다.
“같이 먹자.”
흐뭇하게 보고 있던 일 번은 유유히 제 것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오징어 다리 하나 계란 바구니에 넣어 둔다. 연탄불 위 찜솥서 김 나는 물 한 바가지 덜어내 아버지는 씻고 아랫목에서 물러난 내복바람재비들은 짭짭 소리를 낸다.
등짐 지고 장에 간 아버지 호주머니에는 간간이 오징어 다리와 땅콩이 들어 있었다.
'짭짭' 소리 내며 먹는 그 간식거리는 대포 한잔 하며 내어 놓은 안주였다. 아버지는 김, 옆에 이 씨는 오징어, 땅콩. 추위 속 손님 없는 뜸한 발걸음에, "오늘은 이만하세."
삼천 원짜리 김치찌개에 밥 한 그릇 먹으며 막걸리 한 병에 김 몇 장, 떨어진 오징어 다리와 깨진 땅콩 몇 알.
그마저 남으면 이 씨는 김 몇 장을 아버지는 오징어 다리와 땅콩을 주머니에 넣어 오셨다.
아버지는 장에서 돌아오실 때 우리가 툇마루에 나와 서 있는 걸 좋아하셨다. 컴컴한 마당 구석에서도 아버지 하얀 이가 추운 겨울 하얀 눈만큼 기억에 남았다.
“여보세요?”
“아버지! 딸. 나 몇 번이에요?”
“응? 너. 일 번!”
재활 요양병원 생활 5년 차. 잇몸이 약해 임플란트도 못하는 아버지는 이제 오징어 다리를 드시지 못한다.
웃는 상 아버지 나이가 돼가는 삼남매는 가끔 시큼한 막걸리 한잔과 함께 호주머니 속 오징어 다리와 땅콩으로 추억을 먹는다.
왜 그때 그 맛이 안 나나 싶으면 막걸리 잔에 오징어 다리 하나 퐁당 담가 보기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