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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동 Oct 16. 2023

이런 거 받아 오지 말고 돈을 받아 오이소

산더덕 연탄구이


몇 해전 여름. 네 식구 한데 모여 가볍게 문경 여행길에 올랐다.

한여름 기온이 35도는 훌쩍 넘어가는 무더위 속 나선 길이었다. 그래도 그늘이 좋아 슬렁슬렁 새재길 걸어 오를 수 있었다. 조선시대 과거 보러 가던 ‘장원급제 길’이라 하여 수험생들이 수능 전 문경새재길 많이들 걷는다고 한다. 딱히 그 목적으로 간 것은 아니었으나 곧 닥칠 대학입시를 앞둔 아이는 꼬장꼬장한 성격대로 새벽부터 목욕재계하고 말쑥히 차려입더니 줄곧 선비와 같은 걸음으로 묵묵히 흙길을 걸었다.

한참 걷고 나니 더위에 목도 마르고 살살 아파오는 다리에 앉을자리만 찾고 있었다.


“시원하게 막걸리 한잔하고 가자!”

듣던 중 반가운 여행 대장 목소리에 동동주 나무푯말이 쓰인 가게에 자리를 잡았다. 파전과 동동주를 시켜놓고 기다리다 슬그머니 눈에 띈 메뉴에 시선이 딱 꽂혔다.

“더덕구이 먹어볼까?”

가격이 어마무시했고 찬바람 부는 10월 제철이라 맛도 그다지 보장받을 수는 없다. 사연 있어 보이는 내 눈빛을 읽은 여행 대장은 흔쾌히 더덕구이를 시켜 주었다.

살짝 불에 그을린 듯 거뭇거뭇 탄 흔적이 있는 더덕구이는 빨간 고추장 양념이 채 배지 않은 채 하얀 접시 중앙에서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놓여 있었다. 예상대로 식솔들 아무도 먹지 않았고 비주얼 좋은 해물파전만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굽힌 더덕에 양념이 조금 스며들면 맛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더덕구이 맛있게 먹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더덕이 더덕인지 알기란 쉽지 않았다. 더덕과 도라지 구분을 못해 미성 때는 그냥 ‘쓴맛’ 나는 나물로 기억하기도 했으니까. 지금도 꽤 고가에 사게 되지만 습한 산자락 검은 흙사이에서 살살 캐어내는 더덕은 귀한 식자재가 아닐 수 없었다.

사시사철 장아찌와 나물, 두부반찬이 주를 이루던 열 댓살쯤 되던 해였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궂은 날씨 탓에 아버지 등짐이 마루 한편을 지킨 지 보름이나 되었다. 토목일 하는 친척에게 연락이 왔다. 어차피 장사에 나서지 못하던 터라 흔쾌히 길을 나선 아버지는 사나흘 정도 집에 오지 않았다.

닷새째 되던 날. 요란하게 대문이 열리며 어른 서너 명이 마당에 들어섰다.

양손 가득 들었던 포대자루를 마당 가운데 내려놓았다. 반주에 얼굴이 달은 아버지는 기분 좋아 보였다.


“술상 좀 내다 줄래?”

점잖게 얘기하는 아버지의 나긋한 말투에 엄마도 별 말없이 부엌으로 가 상을 봤다.

포대 자루에서 무언가 한 줌 꺼낸 아버지는 물이 콸콸 쏟아지는 수도꼭지에 물샤워를 시키며 검은 흙을 깨끗이 씻어 냈다.  손으로 흙을 털고 물로 씻어 엄지손톱으로 살살살 긁어 까기 시작했다. 은은한 향이 마당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그게, 더덕향이었다.


어른들이 막걸리 세 통을 다 비우고 일어날 때까지 엄마는 더덕껍질을 긁어내고 있었다. 온 집안에 향이 가득했다. 부엌이고 마루고 할 것 없이 퍼진 향에 이번과 삼번은 코를 틀어막았다.

“으. 한약냄새야.”

그렇다. 한약방 지날 때 날법한 그 비슷한 향만으로도 한약냄새로 대동단결 되는 것이 아이들 후각이다.

얼큰하게 취한 아버지는 아랫목에 가 눕고 덩그러니 놓였던 포대는 마당 한쪽으로 치웠다.


하얀 속살 드러내다 탕탕 내쳐진 더덕은 납작하게 눌려 늘씬늘씬했던 모양새 없이 평안해졌다.  고추장과 다진 마늘 조금, 매실과 꿀을 넣은 양념장을 하얗게 펼쳐진 더덕 위에 살살 발랐다.  해는 어스름하게 지고 슬슬 배가 고팠다.


“엄마, 밥 언제 먹어?”

“아버지 일어나시면.”

“그냥 먹으면 안 돼?”

“안돼.”


아버지 기침 소리에 상차림이 시작됐다. 수저를 놓고 김치를 놓는 동안 엄마는 연탄불 위 네모난 석쇠 하나를 놓았다. 양념을 발라둔 더덕을 올리곤 타지 않게 위로 아래로 위로 아래로 석쇠를 올렸다 내렸다 했다.  살짝 거뭇하게 탄 더덕 가운데를 엄마가 손으로 쭈욱 찢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향은 더 짙게 퍼졌다. 하얀 아버지 쌀밥 위에 먼저 하나 놓아주고 돌아가며 하나씩 놓아주었다. 한약 냄새난다며 도리질하던 삼번도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식어가는 엄마 밥공기 위에 튼실한 더덕구이 하나를 걸쳐 올려놓았다. 이번, 삼번이 빈 밥공기를 설거지 통에 넣고 대문을 나설 때쯤 엄마는 상에 들었다. 반공기 정도 남은 내 밥그릇도 그때부터 다시 바빠졌다.




엄마를 보는 아버지의 눈치가 길다.

“애들이 잘 먹네.”

“그렇네요.”

“그럴 줄 알았지. 귀한 거라. 입맛은 못 속이거든.”

“그래도… 앞으로는 이런 거 받아오지 말고, 돈을 받아 오이소.”

“그래야지.”


놈팽이 같은 인간들. 사람 불러다 발톱이 다 빠지도록 부려 쳐 먹어 놓고 기껏 손에 들여보내는 게 벌목하다 캐낸 더덕이더냐.


더덕구이에 걸려 엄마 목구멍을 벗어나지 못한 말들은 이십 년쯤 지나, 농협직판장에서 '우리 농산물 살리기' 통해 보내 드린 더덕이 엄마 손에 도착되고야 세상 밖으로 메아리쳤다.


양념 스며든 더덕구이 딱 두 개 남았다. 파전 한입 안 먹고 제법 짠 더덕고추장양념구이를 혼자 다 먹어 치운 셈이다. 여행 대장이 다 늦게 젓가락을 보태며 말한다.

 “나한테 2만원만 줘.  더 맛있게 만들어 줄게.”


제발 줄게. 언제 만들어 줄 건데... 3년이 넘었어. 이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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