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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동 Oct 18. 2023

네가 끓여준 금요일 밤의 열기

이 번표 라면


올해 미카와 라파. 아이 둘 모두 외지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근 2년 넘게 일상을 침범한 코로나19에서 조금 자유로워지면서이다. 한편 걱정이 되면서도 참 고마운 일상으로의 복귀이다.

자취생들의 끼니 해결에 최고 간편식은 단연 ‘라면’이다. 라면은 언제 새로 나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종류도 엄청 많다. 사골 국물을 우려낸 곰탕라면부터 매운맛의 끝판을 보여주는 붉닭볶음면도 있다. 라면의 다양한 진화는 전 세계 우리나라가 유일무이할 듯하다. 먹거리로 선택된 음식은 모두 응용해 버리는 대단한 창의력이다.




미카는 집에 오면 김치 한 종지 놓고 먹더라도 무조건 집밥을 사수한다. 코로나19에 학식다운 학식 한번 못 먹고 졸업하게 됐다. 한정된 종류의 편의점 음식 중 신선한 채소와 과일은 고사하고 흔히 먹는 밑반찬도 매번 사수하기 어려웠단다. 그런 이유에인지 미카는 집에 오면 밥부터 찾는다. 엄마의 고단함 꼬집는 제 아빠 그레고리의 다소 귀여운 핀잔에 미카는 말한다. "이건... 생존 본능으로 봐주셔야 해요."


반면, 라파는 라면 물부터 올린다. 흔치 않은 '완전 기숙형 학교'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삼시 세 끼가 모두 밥이다. 가끔 잔치국수나 스파게티도 나오지만 영양과 건강을 고려해 균형 잡힌 밥끼니를 반드시 먹인다. 나로선 실로 감사할 뿐이다. 맛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식 끼니를 책임지는 위대한 분들이다. 온 마음 다해 재료 다듬고 조리하는 분들께 감사하게 된다.

집에 오는 날이면 라파는 먹고 싶던 봉지라면을 꼭 사 온다. 편의점에서도 먹을 수 있는 컵라면과 팔팔 물 끓여 먹는 봉지라면은 완전 다르단다. 2년 묵은 내 집표 김장 김치는 상시 대기 필수템이 되었다. 언제 대군들이 들어설지 모르니 라면은 늘 사놓는다. 집에는 서너 종류의 라면이 있다. 식성이 다양해 종류별로 사다 놓는다. 그날 기분에 따라 골라 먹는다. 신김치 한 종지 곁들이면 세상 최고의 음식이라 너스레 떨곤 한다.




일찍 시작한 직장생활에 살짝 익숙해져 갈 때였다. 90년대 말이니 지금처럼 주 52시간은 꿈꾸지 못할 때였다. 토요일은 월 2회 격주휴무를 했다. 2시간 시외버스 거리의 직장에서 매주 금요일이면 버스를 탔다.

처음엔 격주건 아니건 무조건 집에 갔다. 낯선 생활 속 그땐 무조건 엄마가 보고 싶었다. 배냇짓할 때부터 18살까지 떨어져 산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엄마 못 보고 산다는 생각은 한적 없었다. 방학이라 할매 계신 촌에 있을 때도 사나흘 지나면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촌에서는 돌아갈 기약이 있었고 언제든 내가 가고 싶으면 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근근이 참았지만 사회생활은 차원이 달랐다.


한 주의 그리움은 목에 걸린 가시처럼 일상 속 늘 걸려 있었다. 오후 6시 근무 마치고 버스를 탄다. 경유지 서너 곳 들러 버스터미널에 도착하고 시내버스 갈아타고 우리 동네까지 가면 이미 어둑어둑하다. 버스정류장에 딱 내리면 익숙한 고동색 슬리퍼가 보일 때가 있다. 장사에서 일찍 돌아온 아버지는 늦은 귀향을 반기며 무심히 서있었다. 처음엔 여자 혼자 멀리 못 보낸다며 극구 반대했지만 타지에서 돌아오는 딸을 버스정류장 허수아비로 반겨 주었다.


대문 소리가 나면 드르륵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단 한 번 찡그림 없이 반겨 주는 우리 식구들. 제일 먼저 이 번이 벌떡 일어나 마당을 나왔다. 집에 들어서고 나면 그제야 배가 고프다. 씻느라 대야에 물을 받는 동안 이 번은 슬그머니 부엌으로 들어간다. 내가 곤로에 불을 켜던 그 부엌이다. 여드름 남은 얼굴을 비누로 뽀득뽀득 씻고 발 담가 수건으로 얼굴을 두드릴 즈음 라면 냄새가 풍겨온다.

부엌문 사이로 한번, 두 번 얼굴을 내민다. 다 씻었나 말았나를 보면서 계란 하나를 톡 깨 넣는다. 김치란 김치는 한 젓가락씩 다 꺼낸다. 물김치도 국물 없이 한 종지, 정구지김치도 국물 없이 한 종지, 깍두기도 한 종지. 라면 한 그릇에 김치 종지 세 개 얹어 상차림으로 내온다. 깨끗하게 발까지 닦고 나무 마루에 앉는다.

비로소, 기똥차게 맛있는 금요일 밤 라면 열기에 빠져 들었다.

"맛있어. 맛있어. 정말 맛있어!" 를 연발하면 이 번은 배시시 웃기만 했다. 그 수줍은 미소, 20년 넘은 지금까지도 라면 먹을 때마다 떠오른다.




코로나19 오기 전 어느 추석 연휴. 시집 장가 다 간 삼남매가 모처럼 한자리 모여 앉았다. 다들 기름진 명절 음식 먹은 뒤라 끼니 이을 생각들이 없었다.


“얼큰한 라면 한 그릇 먹고 싶다.”


이 번 한마디에 물을 올렸다.

콩나물 한주먹을 데치고, 미나리 반 단 이파리 부분 따로 떼어 놓고 데친다. 당근과 양파를 가늘게 채 썰어 역시 살짝 데쳐 건져 둔다. 물이 팔팔 끓으면 라면수프와 건더기수프까지 넣고 계란 2개를 먼저 깨 넣는다.

노른자 터트리지 않고 약불에 서서히 끓여 형태 그대로 익으면 건더기를 싹 건져낸다.

면을 넣고 젓가락으로 면발 집어 올려 공기와 만나도록 못살게 굴어준다. 꼬들꼬들 익은 면을 넓은 대접에 건져 담고 데친 야채를 고명처럼 얹어준다.

국물이 팔팔 끓으면 건져 둔 계란을 얹고 국물을 부어낸다.

비주얼만으로는 여느 고급 요리 못지않다.

다행히 이 번은 라면 본연의 맛을 잃을랑 말랑 하는 이 '종합 야채라면'을 맛있게도 먹었다.

종류별로 꺼내 놓은 김치 먹으며 배시시 웃는다.

그 어여쁜 미소를 볼 수 있어서, 그 뜨거웠던 금요일 밤 라면 열기에 다시금 마음이 후끈하다.


이건 못 참지. 라면 한 그릇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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