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완전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먹는 음식에 따라 프루테리언, 비건 등으로 구분되기도 하는데 이렇게 구분하기도 애매하다. 감자탕에서는 돼지등뼈를 먹지 않고, 소고기 미역국에서는 잘게 썰린 고기를 먹지 않는 정도다. 그럼에도 정말 먹기 고역이라 아직까지 먹기에 어려운 음식이 삼계탕과 설렁탕이다. 신선한 재료에 아무리 좋은 약재를 넣어도 물과 만난 육고기 특유의 냄새로 먹기 힘들다.
그렇게 육고기가 내 입에 들어오기 어려워진 이유는 어릴 적 자주 가던 큰장시장에서 본 닭과 개 때문인 듯하다.
큰장 입구에는 떡볶이와 순대를 파는 분식 노점이 쭉 늘어서 있다. 밑반찬 가게를 지나 약재상을 거치면 너른 마당과 같은 곳에 온갖 동물이 모여 있다. 주로 뜬장에 꽉 들어차 있다.
시장에 들어서면 냄새에 민감한 내 코는 의지와 상관없이 벌렁거리기 시작한다. 적당히 잘 졸여진 떡볶이 국물에는 달콤함이, 가게 입구에서 놓인 밴댕이젓은 큼큼한 냄새와 구수함이 함께 풍겨왔다. 감초가 수북이 쌓인 약재상에는 입버릇처럼 말하는 ‘한약’냄새가 났다.
그와 동시에 고약한 똥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약방 바로 앞 길이 끝난 곳은 하수구 뚜껑이 작게 나있고 두세 줄기 빨간 핏물이 줄줄 흘렀다.
흰색, 갈색, 검은색 크고 작은 닭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명절을 앞둔 장날 닭장은 전쟁터다. 밖으로 머리통을 내민 닭들과 그마저도 무게에 짓눌려 비실거리는 닭들이 꾹꾹 눌러 담은 고봉밥 같았다.
우악스럽게 잡혀 나온 닭은 나이테가 한 20개는 넘는 둥근 나무 밑동 도마 위에 올려졌다. 바로 옆 뜬 장에는강아지와 큰 개가 구분되어 있었다. 이미 털가죽 껍데기가 벗겨지고 있는 시뻘건 고기 덩어리를 보고 얼어붙었다.
못 볼 것을 보고 만 그날. 악몽 속 식은땀 지옥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끙끙 앓는 소리에 아이를 안은 엄마는 토닥토닥 등을 두드렸다. 뻣뻣했던 팔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엄마는 아이가 새잠이 들 때까지 등을 토닥였다.
다음날부터 시작된 모든 육고기에 대한 거부는 달걀에까지 미쳤다. 파, 당근 송송 계란말이는 최고의 반찬이었다. 매일 먹을 순 없었지만 도시락 반찬으로 들어가는 날이면 도시락 펼쳐 놓고 먹기에도 뿌듯했다. 문제는 큰장에 다녀온 후 달걀에도 그 특유의 닭비린내가 났다.
육고기의 누린내를 귀신같이 맡아 냄새만으로도 헛구역질이 나왔다. 그 후 얼마간 큰장에 가지 못했다. 따라나서지 말라는 아부지 불호령도 있었고 시장 별미 물국수 한 그릇 먹기 위해 잃는 게 너무 많았다.
아부지는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해 왔다. 돼지 내장이나 닭간 등을 생강, 감초 등과 같은 약재물에 삶아 내놓았다. 식구들은 누린내 가신 내장 요리를 잘 먹었다. 별 양념 없어도 소금 간 하나로도 별미라 했다. 나만, 빼고.
엄마와 점심약속을 한 건 아부지가 재가노인복지센터에 다닌 지 석 달쯤 됐을 때였다. 10년 넘게 뇌졸중 투병 남편의 아내로 손발 되어 살고 있었다. 엄마 역시 10년째 관절염으로 고생 중이었다. 계속된 허리 통증에 정밀 진단을 받아보자는 내 제안을 몇 번 거절하다 바쁜 딸 부탁에 마지못해 약속을 잡았다. 9시 병원 문 열자마자 진료 보고 바로 CT와 MRI 촬영에 들어갔다. 나흘 뒤인 토요일에 결과 진료 예약하고 병원을 나섰다. 이미 점심때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뭐 먹을래?”
“아무거나 먹지요. 뭐.”
버스 타고 와 멀리 가기에도 부담 갔다. 대충 병원 근처 깨끗한 한식집을 둘러보던 중 ‘육회비빔밥’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는 육회비빔밥을 나는 돌솥비빔밥에 육회 고명은 빼달라고 했다. 밑반찬 대여섯 가지에 예쁘고 깔끔하게 차려진 음식이 나왔다. 수저를 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엄마가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딸도 이제 머리가 허옇네.”
“엄마 닮아 그렇지.”
엄마 나이 마흔부터 하얗게 머리가 세기 시작했다. 이 번은 서른 넘으면서 새치가 하얗게 올라왔다.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도 나이 마흔 넘어가니 그럴 만도 했다.
고추장에 갖은 야채 들어간 비빔밥이 맛없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날의 비빔밥은 정말이지 맛이 별로 없었다. 먹으면 먹을수록 고추장맛만 입안에 남았다. 반이상 남긴 밥을 본 엄마는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봤다.
엄마의 육회비빔밥도 좀처럼 줄지 않았다. 두런두런 얘기가 오가며 숟가락 놓은 지 오래인 나는 물음에 대답하고 간간이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그러는 사이 엄마의 육회비빔밥 그릇은 싹 비었고, 남겨진 돌솥비빔밥으로 숟가락이 옮겨왔다. 많이 시장해서 그런가. 왜 남은 밥까지 다 먹냐는 질문에 엄마는 말했다.
“아까워 그렇지. 옛날에는 이런 쌀밥도 못 먹었지.”
온갖 야채에 고기까지 재료로 들어간 음식이 아깝다 했다.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하며 놓았던 숟가락을 들었다. 가운데를 가르며 "자 나는 이쪽, 엄마는 이쪽" 기어이 빈 돌솥을 만들어 놓고 나왔다.
그렇게 먹은 육회비빔밥이 엄마와의 마지막 끼니가 되었다.
따사로운 봄날의 평화는 공포스러우리만큼 겁에 질린 이 번의 연락에 와장창 깨졌다. 119에 신고하고 정신없이 엄마를 찾았다. 그렇게... 닷새만에 엄마와 영영 이별했다. 너무도 갑작스러워 제대로 울지도 못했다. '눈물이 마른다'는 건 그럴 때 쓰는 말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