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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동 Oct 22. 2023

몸이 추욱 처질 때

들깨죽


유독 힘이 드는 날 있다. 

발바닥이 쩍쩍 갈라져 불이 펄펄 난다. 종아리를 타고 찌릿하게 전기가 올라와 허리에 멈춰 선다. '허리 끊어질 것 같다.'표현은 좀 모자란다. 으슬으슬 몸은 춥고 축 늘어져 바닥에 붙은 껌처럼 늘어진다.

깔깔한 입으론 물 한 모금도 못 넘긴다.

감기몸살이 들면 만사 귀찮다. 먹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하물며 생각하는 것조차 어렵다. 끝끝내 이불 쓰고 눕는다.




 좋아해 한때 ‘죽순이’라 불리기도 했다. ‘죽치다’라는 말이 움직임 없이 한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하는 걸 보면 죽은 본래 걸쭉하고 진득한 것 인가보다.


시어른은 가끔, ‘시어머니 삐졌다. 호박죽 끓여라.’라고 했다. 화가 나 입을 삐죽 대다가도 달콤한 호박죽 한 그릇이면 기분 전환이 되기에 그리 말하나 보다. 

요즘은 뉴질랜드산 단호박이 많이 나온다. 정말 달콤하니 맛나다. 설탕 넣지 않고도 따라갈 재료가 없다. 

그래도 최고의 재료는 한겨울을 나고도 윗목 한 자리 차지하던 늙은 호박이다. 단 맛은 좀 덜해도 호박 그 특유의 맛이 있다.  시어른은 '당원'이라는 조미료를 넣어 달큰한 맛을 더하기도 한다. 그 맛도 그 맛 나름대로 은근 매력이 있다. 

달콤함 뿐 아니라 몽글몽글하게 빚은 새알심 하나 둘 넣어 주면 쫄깃함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영양도 만점이라 사시사철 즐기는 죽이다. 

전복죽은 황제죽이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전복을 깨끗이 씻고 입부분을 떼어낸다. 숟가락 하나 들어 전복을 떼어 낸다. 들기름 넣고 얇게 채 썬 전복을 불린 쌀과 함께 잘 볶아 준다. 뜨겁게 끓인 물을 넣고 바글바글 쎈 불에 끓여준다. 한소끔 끓어가는 죽은 약불로 줄여 뭉근하게 끓인다. 중간중간 바닥이 눌지 않게 잘 저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후후 불어 쫄깃한 전복과 함께 먹으면 세상 속 든든한 포만감은 내 편이 된다.




온몸이 방망이질을 당한 듯 바닥으로 축 처지면 들깨죽 한 그릇 먹는다. 

들깨죽은 바쁠 때 빨리 끓여 낼 수도 있고 속 편히 먹을 수 있는 죽 중에 하나다. 꼭 불린 살이 아니어도 된다. 식은 밥 한 덩이 넣고 푹 끓여 쌀알이 통통하게 불도록 끓고 나면 들깨가루를 살살 풀어낸다. 

호박죽이나 전복죽처럼 재료를 처음부터 넣어 끓이진 않는다. 다 끓고 나면 마지막에 들깻가루 넣고 살짝 끓여 내야 들깨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추어탕이나 어탕을 먹을 때도 산초나 제피를 넣고 가장 마지막에 들깨가루를 넣어 먹는다. 재료 본연의 맛을 느끼기 위해 주인공으로 아껴두는 것이 들깨가루다.


죽은 푹푹 떠먹는 밥처럼 먹을 수가 없다. 뜨거운 죽 한 숟가락 입안 가득 넣으면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뜨겁다. 가끔 입 한가득 넣었다 바로 후진해 죽그릇으로 직행하기도 한다. 입천장은 데어 다 까진다. 그래서 죽 먹을 때는 윗부분부터 살살 긁어 후~후~ 불어 먹는다. 싱거우면 국간장에 들기름을 넣어 살짝 찍어 먹는다. 

깍두기나 김치 없이 순하게 먹을 수 있다.




몸살은 몸을 쉬게 하라는 '가볍고도 묵직한 휴식의 신호'라고 생각한다. 입맛 없고 머리는 아프며 힘이 쭉 빠진다. 따끈한 국물 한 그릇이 간절해진다. 굵게 채 썬 무를 살짝 볶다 멸치육수를 넣고 끓이고 마지막에 들깨가루를 풀어준다. 역시 들깨죽에 버금가는 몸살 전용 들깨국 한 그릇도 차가운 몸을 데워 준다. 

들깨죽을 먹을 때면 이렇게 구수하고 고운 들깨가루가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이의 손길이 있었나.'를 생각한다. 

한여름 땡볕을 견디고 가뭄에는 물을 폭우에는 고랑으로 물을 빼주며 정성과 품 들여야 들깨가 큰다. 열매 맺기 전 푸릇푸릇한 들깻잎은 삼겹살과 친구가 되기도 하고 푹 삶아 물기 빼고 한 장 한 장 양념장으로 정성을 쌓는다. 열매 맺은 들깨는 기어이 타작을 해야 손에 들어온다. 말리고 타작하고 키질해서 쭉정이와 껍데기는 날려 보낸다. "잘 가라. 다음엔 여문 열매로 다시 오렴. 그간 열매를 안아줘서 고마웠다."


볕 좋을 때 잘 말리고 빻아 가루가 된다. 걸쭉한 국물 요리를 위한 최고의 식재료는 최고의 정성 덕분에 탄생하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내겐, 국물 없이 뻑뻑한 들깨죽은 아픈 몸과 상한 마음을 한 번에 위로하고 다독여준다. 

죽 한 그릇이 무슨 위로가 되겠냐 싶겠지만, 구수함과 뜨끈함이 주는 안정감이 그저 좋다.


순하고 착한 음식. 내겐 들깨죽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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