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풀 보이>
나에게 있어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화의 큰 매력은 관객을 위로한다는 것이다. 인물이 상처받고 실수하고 실패하고 치유받고 성공하는 그 일련의 과정에서, 인물의 상처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들은 그 인물과 함께 치유받고는 한다. 그리고 인물이 그것을 딛고 일어나 다시 걸어나가는 것에서 용기를 얻어 나 또한 일어서 보고는 한다. 그 순간이 동기가 되어 새로운 기회를 얻고 다시금 꿈꿨던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그것에 기어코 닿고는 한다. 내게 그런 영향을 미친 작품이 여럿 있지만 이번에는 그중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가장 많이 상기하는 작품인 <뷰티풀 보이> 에 대해 말해 보려 한다.
<뷰티풀 보이> 포스터를 보자마자 우리에게 익숙한 두 얼굴이 눈에 띈다. 스티브 카렐과 티모시 샬라메. 무서울 정도의 연기를 뿜어내는 배우들이다. 실화 바탕 부자(父子) 이야기라면서 그 정도의 연기가 필요한가? 오버캐스팅처럼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 강한 감정을 표현해야 했고 그렇기에 이 캐스팅에 나는 여전히 감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시작으로 티모시 샬라메라는 배우의 작품을 찾아 보았고 다양한 장르에서 틀에 박히지 않은 연기를 하는 것에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작품 중 <미스 스티븐스> 를 아직 보지 않았다면 추천한다. 티모시 샬라메의 연극적인 연기 매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해당 글에는 <뷰티풀 보이>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뷰티풀 보이> 로 돌아가, 이 작품은 마약을 하는 아들과 그 아들을 마약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며 원작인 책도 있으니 읽어 보길 권한다. 저널리스트인 아버지 데이비드는 아들의 마약 중독에 심각성을 느끼고 여러 사람을 찾아다니며 상담과 자문을 받는다. 아들인 닉 또한 마약을 끊고 싶은 의지가 강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확신이 있어 노력하지만 중독성이 강한 마약에 잠식된 뇌를 제어하기란 쉽지 않고 오히려 더 센 자극을 찾게 될 뿐이다.
줄거리를 들은 이쯤이면 궁금할지도 모른다. 이 마약이 전부인 이야기에서 뭘 위로받았는지 말이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면 꼭 '인생영화'라는 걸 물어보는 사람들에게도 이 작품을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는데, 궁금해서 직접 찾아 본 사람들도 내게 묻고는 했다. 인생영화가 된 지점이 대체 뭐였느냐고. 물론 이야기의 중심 소재가 '마약'인 건 맞지만 내가 집중한 건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성, 그리고 닉의 심리상태였다.
닉의 부모님은 어릴 적 이혼을 했고, 이후 닉은 아버지와 같이 살면서 가끔 어머니를 만나러 어린 나이에도 혼자 비행기를 타고 먼 거리를 오가곤 했다. 닉이 자라면서 아버지는 재혼을 했고, 두 아이를 낳으면서 닉에게도 어린 동생 두 명이 생겼다. 그렇다고 닉이 크는 동안 결코 아버지가 소홀하지는 않았다. 잘 때는 늘 자장가를 불러 주었고, 혼자 비행기를 태워 보낼 때는 꼭 얼굴을 마주하고 작은 몸을 꽉 안아주며 사랑한다는 마음을 새겨 주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닉의 결핍을 메울 수는 없었다. 그가 자라면서 겪은 수많은 변화는 결핍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고, 혼자 해내야 하는 것들로 인해 나이에 비해 조금은 더 어른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린 아이가 어른스럽다는 것은 그만큼 혼자 속으로 앓는 것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어른의 나이에 가까워진 아이는 본인의 곪은 속을 해소할 수단을 찾는다. 닉에게는 그 수단이 마약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어질러진 닉의 방에 들어가 집어든 노트에는 수많은 알 수 없는 그림들이 그려져있다. 그저 까맣게 칠해놓거나 이상한 괴물 같은 형상을 그려놓거나 좋지 않은 말을 적어 놓은 페이지를 들여다 보며 아버지는 닉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현실을 부정하며 고개를 젓는다. 그 장면에서 어떤 무력감을 느낀 건 나뿐이었을까. 닉이 힘든 상태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 닉의 심리상태가 상당히 불안정함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아들이 이러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자신이 알고 있는 아들이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 닉의 마음은 지옥이었고 그것을 드러낼 곳이 그 작은 노트뿐이었을 테다. 아버지는 당연하게도 아들을 사랑했겠지만, 계속해서 사랑을 표현했겠지만 그것이 아들이 지옥으로 스며드는 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닉의 외로움은 영화에서 꽤 자주 드러난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새어머니, 동생들을 사랑함에도 가까워질 수 없는 그 거리. 그럼에도 아버지만은 자신을 믿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 또한 자신을 믿지 못하자 닉은 무너진다. 이런 상황에서 닉이 나아지길 바랐던 아버지의 욕심이 참 미웠다. 힘든 상황에서도 마약을 중단하고 잘 견뎌내고 있음에도 의심하고 불신한 건 본인의 손으로 아들을 다시 지옥에 밀어넣는 꼴이었다. 기댈 곳은 가족밖에 없는 닉이 그 어떤 가족도 본인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에 얼마나 좌절했을지는 감히 가늠하기 어렵다.
반대로 가족들과 완벽한 휴일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도 닉은 고통스러워한다. 차를 몰고 출발하는 자신에게 가족들은 그 자리에 서서 계속 손을 흔들고, 백미러를 통해 그 모습을 보며 닉은 웃다가 울먹인다. 이 신(scene)이 내겐 가장 오랜 시간 마음을 울렸는데, 나 또한 이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의 일로 인해 심적으로 많이 힘든 상태였고, 주말을 맞아 오랜만에 본가에 올라갔다. 주말 내내 가족들과 빈틈없이 함께했고 너무 즐거웠다. 짧은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일요일 오후, 기차에 올라 플랫폼에서 손을 흔드는 가족들을 보고 떠나는데 도착할 때까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난 가족들을 떠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떠나야만 한다, 이곳을 떠나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가야 한다, 나 없이도 가족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겠지, 나는 그 시간에 또 다시 외로워지겠지. 몸도 마음도 힘든 시기였으므로 모든 게 부정적인 생각으로 뻗어나가고 사소한 것도 크게 받아들여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그 신은 내게 큰 의미였다. 나조차 내 자신이 어려웠던 감정인데 그걸 영화 속에서 마주하다니. 닉은 결국 차를 몰고 가다 중간에서 멈추고, 가끔씩 만나 시간을 보내곤 했던 어머니의 새로운 배우자에게 전화를 걸어 털어놓는다.
"현실에서 살기 싫어요. 신물이 나요. 이게 병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 암 같은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해서 이 꼴이 된 거예요."
내가 선택해서 이 꼴이 된 거라는 말이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그 말은 곧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상황들 또한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상황, 환경, 웬만큼 자라고 나서도 의지할 수 없었던 가족. 그 모든 것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는 순간 상황은 더 나빠질 수밖에 없는데 닉의 결론은 그것이었다. 내가 선택해서 이렇게 된 것.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한 사람이고 힘들 때마다 늘 더 강하지 못한 나를 자책했기 때문에 저 대사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걸 흔히 거울치료라고 하던가. 닉에게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다그치고 싶어지던 순간, 그 다그침의 대상은 내가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계속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가는 더 깊은 구덩이로 빠지기만 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다가 결국에는 진짜 내 선택으로 내 인생을 망치겠구나. 그래서 지금은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을 내 탓으로 돌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려고 애를 쓰는 중이다. 내가 선택해서 이 꼴이 된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까지 닉과 나는 계속해서 노력해야만 한다.
결말을 말하자면 닉은 이겨냈다. 영화에서는 다시 치료받기 위해 다짐하고, 멀어졌던 부자가 다시 함께하게 되는 장면이 그려지며 끝난다. 문제의 원인이 마약이든 뭐든 간에 나는 닉이 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 살아가기로 했다는 점에 그에게 크게 박수치고 싶다. 나 또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늦둥이 동생이 있고(부연설명이 굳이 필요할까 싶지만, 친동생이다.) 동생에게 쉽게 몇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존재했으며 그 때문에 가족과 멀어지는 시기가 있었어서 영화 틈틈이 비춰진 닉과 가족들의 잔상이 오래 남았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유치하고 자기연민적인 감정들이었다. 지금은 괜찮아졌어도 여전히 속에 곪아있는 것들이었는데 이 작품을 보며 나도 모르게 위로받았다고 느껴 스크린에 그 감정들을 쏟아내고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화목한 가정이라서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는 외로움을 알까. 이 평화를 해치기 싫어서 내 속이 어떻게 되어가든 웃으며 함께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만 가족들과 멀어진 것 같은 시점이 온다. 나를 너무 모르는 가족들을 마주할 때마다 함께하던 즐거운 시간이 무색하다. 예전 같으면 크게 실망하고 절망했을 테지만 이제 멀어지지 않고도 거리를 두는 법을 깨달은지라 큰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는 과정에서도 이 영화가 많은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
한때 호감이 있던 상대와 이 영화를 같이 봤던 적이 있다. 나는 닉에게 크게 공감한다고 했으나 그 사람은 아버지에게 더 많은 공감이 간다고 했다. 자신은 아버지처럼 오히려 아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개인의 감상이고 자신의 경험에 따라 감상의 차이가 크게 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아쉽게도 그 사람과는 계속해서 만날 수 없었다. 나는 오히려 같은 영화를 봐도 해석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더 즐겁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때의 경우에는 내 연인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고, 그렇다면 중요한 부분에서 교감이 가능해야 했기에 그쯤에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래서 이후로는 호감 가는 상대와 정식으로 만나기 전까지는 영화를 보지 않게 되었다.
말이 샜지만 어쨌든, 어떤 감상을 느끼든 이 영화를 한 번쯤은 봤으면 한다. 그리고 영화 속 소재에 얽매이지 말고 넓게 생각하며 마음껏 해석을 펼쳐 보길 바란다. 어떤 영화든 그렇다. 인물과 나의 공통점을 찾아 내적 친밀감을 가지고 감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영화를 보는 시간보다 영화가 끝난 뒤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긴 사람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뷰티풀 보이> 가 나를 위로했듯이, 당신의 삶을 위로하는 영화도 분명히 찾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