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 아웃>
야구, 좋아하세요?
인기 야구선수들을 모델로 제작한 광고의 대사로, 야구 팬이라면 지겹도록 봤을 문구이다. 잘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렇다 대답하게 되고, 못하는 날이면 절대 아니라며 정색하게 되는 그런 질문. 내가 언제 야구를 좋아했던 적 있었다고. 그렇게 말하다가도 야구 때문에 살지! 하는 날을 맞게 되는 것. 그게 야구 팬의 평생 숙명이다.
많은 사람들이 야구 경기를 한 편의 영화 또는 드라마에 비유하곤 한다. 한 경기 안에, 한 선수 안에, 한 구단 안에 많은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는 스포츠인 만큼 영화의 소재로도 많이 쓰인다. <퍼펙트 게임>, <머니볼>, <슈퍼스타 감사용>, <야구소녀> 등. 그 중에서도 베스트를 뽑으라면 내게는 <낫 아웃> 이고 이 베스트는 1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나올 야구 소재 영화들을 저평가하는 것은 물론 아니고, 그만큼 완벽한 감동을 준 작품이라는 뜻이다.
프로야구를 좋아하는 만큼 한국은 아마추어 야구에도 관심이 많다. 워낙 고교야구에 뛰어난 선수들이 많다 보니 많은 팬들이 드래프트 중계를 관심 있게 지켜 보기도 하고, 그 결과에 대해 심층적인 토론을 나누기도 한다.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청룡기는 매년 어떤 학교가 결승에 진출하는지, 우승하는지 관심이 쏠리며 장면 하나 하나 감동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 올해는 창단 47년 만에 처음 결승에 진출한 전주고와 44년 만에 다시 결승에 올라간 마산 용마고가 만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전주고가 우승을 거머쥐고, 두 학교는 승패 같은 건 상관없다는 듯 함께 모여 사진을 찍기도 하고, 울며 환호성을 질렀다. 프로 경기도 아름답지만 고교야구만의 청춘과 날것의 느낌은 그 어떤 경기보다 벅차오른다.
*아래 글에는 <낫 아웃> 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끝내기 안타를 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 주인공 광호의 모습으로 <낫 아웃> 은 시작된다. 드라마 <스토브리그> 도 그렇듯이 이렇게 첫 신으로 경기 장면을 보여 주면 관객의 몰입력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낫 아웃> 은 곧이은 장면부터 아주 상반된 분위기가 진행된다. 어둠 속에서 어떤 액체를 부어가며 무언가를 하는 아이들. 그저 빛나는 고교야구 우승 주역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이 작품은 조금 일찍 보여 주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봉황대기'에서 '끝내기 안타'를 쳐 팀을 '우승'으로 이끈 대단한 이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호는 드래프트에서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 높은 순위의 호명이 끝나고, 뒤로 갈수록 광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라커룸에 들어가 드래프트 중계를 껐다 켰다를 반복한다. 결국 그렇게 자신의 이름은 불리지 않은 채 끝난 드래프트에, 아무도 없는 라커룸에서 의자를 집어던지며 폭주하는 광호의 슬픈 탄성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을 나타낸다.
왜일까.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고 잘하는 선수가 드래프트에서 이름이 불리지 않았던 이유는. 참 억울하고 더러운 현실이지만, 돈 때문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손님도 몇 오지 않는 작은 가게를 하는 아버지는 아들 광호를 지원해 줄 수 없었고, 암묵적으로 야구부 코치에게 돈을 쥐어 주는 학부모가 대부분인 그 세계에서 광호는 그렇게 코치의 눈에서 멀어졌다.
큰 돈을 벌어서 코치에게 쥐어주고 다시 야구를 향해 나아가는 게 광호의 계획이다. 하지만 학생 신분으로 그런 돈을 버는 과정도, 다시 야구를 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과정도 쉽지 않다. 너무 간절해서 너무 큰일을 벌이기도 하지만, 야구 선수로서의 생명은 끝났다는 듯 구는 모든 주변 환경 속에서 광호는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고 싶어"라고 말한다. 그것만 알면 뭐든 다 바꿀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만두더라도 그때 가서 그만둘 거라고 말이다. 광호가 그 말을 뱉은 순간부터 어째서인지 나는 이 야구밖에 모르는 아이를 맹목적으로 응원하게 된다.
보통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꿈을 가지게 된 아이는 어릴 적 기억에 영향을 받은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 틈만 나면 극장에 데려가 개봉작을 보여 주시고,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들과 조조영화를 보고 오라며 용돈을 주시고, 영화제에 데려가 마음껏 구경하게 해 주신 부모님 덕에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광호도 같았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야구장에 데려가 '너도 야구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부모님의 말이 그날부터 광호에게 박혀 버린 것이다. 야구를 하는 건 본인의 선택이었지만 아버지가 남일이라는 듯이 굴 때면 늘 저 말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때 나를 야구장에 데려가놓고, 야구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해놓고, 야구를 하고 싶다는 나를 왜 도와주지 않는 거냐며 광호는 아버지 앞에서 소리지르고 따진다. 울고 불고 난리를 피우다 아버지 앞에 무릎 꿇는다. 야구가 하고 싶다고, 도와달라고 빌듯이 말하는 소년의 모습은 그렇게 애처로울 수가 없었다.
본인의 꿈을 가족에 설득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마음이다. 뭐든 혼자서 시작하는 건 어렵고 또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에 가족들을 설득해 보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고 가족들도 힘들어 한다면 그때부터 내 세상이 닫힌 것만 같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거라는 그 무력함. 제대로 꿈을 펼쳐 보기도 전에 접어야 한다는 분함. 세상은 꿈을 가지라고 말하면서 그 꿈을 이루는 길은 처음부터 죽도록 힘들기만 하다.
야구 이야기 외에도 초반에 언급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또한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데, 이건 영화를 통해 보기를 바란다. 광호가 큰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고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이 처한 위험에 대해 보여 준다. 물론 모든 청소년이 돈을 벌겠다고 불법적인 일에 손을 뻗지는 않지만, 영화의 가라앉은 분위기 그대로 그 아이들의 관점에서 이해해 주면 좋겠다.
이 영화가 내게 완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지막 장면 때문이다. 내내 절망 속에서 허덕이는 광호를 비추던 이 영화가 끝에는 제대로 된 희망을 보여 준다. 회복된 관계, 새로운 시작, 살아난 희망. 대학 이름이 적힌 유니폼을 입고 열을 맞춰 운동장을 뛰는 아이들, 힘차게 외치는 구호.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조마조마한 마음에 불규칙적으로 뛰던 심장이, 마지막 광호의 모습을 보고는 벅차 쿵쾅거렸다.
낫 아웃, 아직 아웃당하지 않은 상태. 광호는 살아남았다. 낫아웃 상황에서 이를 악물고 달렸기에 살아남았다. 너무 많은 실패와 좌절을 느꼈을 테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 단단한 프로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지 않았을까. 실패했다고 끝나지 않는다. 꿈을 가진 모든 이들에겐 실패할 자유가 주어진다. 그 실패 속에서 마음껏 구르고 울어 보자. 그러다 보면 어느새 성공할 기회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을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