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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국 Aug 23. 2024

직업은 없고 특기는 있습니다만

<틱, 틱... 붐!>

어느새 연재의 마지막 회차까지 왔다. 이번에는 마지막 목차를 장식하는 만큼 이 브런치북 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풀어내고 싶어 동일한 제목으로 써 보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내가 가장 아끼는 영화 <틱, 틱... 붐!> 과 함께 써내려간다.


내 꿈은 영화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영화평론가이나, 사실 영화를 만들고 싶기도, 편집과 같은 후반작업을 하고 싶기도 한 탓에 그중 먼저 이루는 것이 가장 먼저 나의 직함을 차지할 것이다. 어찌 됐든 위 직업 모두 영화인으로 통칭하니, 나의 꿈은 영화인이다.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영화를 업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언제까지나 내 취미라고 생각했고, 취미를 직업으로 삼기에는 내게 꿈이 너무 많았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할 동기도, 용기도 부족했다. 하지만 그렇게 거창한 마음으로 시작한 일들은 내 마음처럼 되지 않았고, 내가 이루려는 것은 그 실체가 보이지 않았다. 해야만 한다고 느낀 것은 내 오만일까.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허상을 좇고 있는 걸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가로막히는 느낌에 계속해서 다음으로 넘어가 다른 걸 시도했고, 그러다 몸도 마음도 지친 나는 결국 '좋아하는 일'을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시도한 것은 시나리오였는데, 수 개월간 현직자의 강의를 들어 본 결과 명확히도 내게 맞지 않는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글 쓰는 걸 좋아했고 학창시절에도 백일장에서 늘 상을 받을 만큼 재능도 있었던 나는 이 업계에서 글로 시작해 승부를 봐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시나리오 작가가 맞지 않다면 나는 뭘 해야 할까. 그때부터 다른 사람들과 다른 내 영화 감상법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재밌다, 별로다, 지루하다' 같은 감상보다 '어떤 부분이 어떻게 연출되었으면 더 나았을 것이고, 어떤 요소로 인해 집중되지 않아 아쉬웠다' 같은 감상이 위주였던 나는 비평을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영화를 보는 줄 알았는데 나만의 강점이었으니 이것을 살리는 게 맞았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으로 활동을 시작한 나는 비평을 쓰는 일이 너무 재밌어서 내 인생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느끼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행복에 대한 기준이 상당히 높았던 내게 그 감정은 매우 새로웠다. 누군가 내 글을 좋게 본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었구나. 그런 글을 써내려갈 수 있다는 게 굉장히 큰 복이구나. 시민평론단으로 뽑히는 과정도, 평론단이 되어 심사위원을 맡는 것도, 심사를 끝내고 훌륭한 영화에 심사평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도 모두 행복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 그게 전부였다. 나는 아직 평론가라는 직함을 달기에는 갈 길이 멀었다. 얼른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글을 써내려가야 했지만 이런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세상 밖으로 내 글이 알려지지 않는데도 꾸준히 써야만 한다는 것은 무언가가 되기 위해 이겨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완벽주의 성향이 너무 강한 터라 그 마음을 먹는 데까지 오래 걸렸고, 결국 완성도는 생각하지 말고 꾸준히 써 보는 것부터 해 보자 하는 생각에 이렇게 에세이를 적기 시작했다. 보통 비평 한 편을 쓰는 데 하루를 꼬박 써야 하는 편인 데다, 그러면 밥을 먹는 것 외에는 다른 일을 못하기 때문에 빨리 써내려가는 습관이라도 잡기 위해 선택한 것이었다.


<틱, 틱... 붐!> 을 아끼는 이유는 위에서 늘어놓은 경험들 때문이다. 영화 개봉 당시에는 시나리오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뭐가 그렇게 마음을 울렸는지 모르겠다. 마치 그게 내 운명이었던 것처럼 본격적으로 창작을 시작하기 전부터 창작자의 마음에 크게 공감하다니. 오래 전부터 나는 이 일을 하고 싶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나를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이 일을 꼭 해야겠구나 하는 확신이 든 것도 이 영화 덕분이다.


이 영화는 실존 인물의 동명 뮤지컬을 바탕으로 한다. 그 인물은 조나단 라슨으로, <렌트> 라는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뮤지컬 작곡가이며 극 중에서는 앤드류 가필드가 연기했다. 아마 앤드류 가필드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를 모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으로 내게는 특별한 배우였고, 그의 작품이 그립던 차에 개봉한 게 <틱, 틱... 붐!> 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첫 관람이 여의도 CGV 사운드엑스관이었으니, 최적의 공간에서 최상의 경험을 했던 나는 이 영화가 더 특별하게 남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넷플릭스 제작 영화를 극장에서 일주일에 한 편씩 공개하는 기획전이 있었는데, 이 영화도 그 중 하나였다. 이벤트성으로 극장 개봉을 한 거라 오래 걸려있지 않아 아쉽게도 극장 관람은 세 번밖에 하지 못했다. 이후 집에서 최상의 사운드로 관람하기 위해 10만 원 정도의 노이즈캔슬링 기능을 갖춘 헤드셋을 구매하기도 했다. 단지 이 영화의 관람만을 위한 거여서, 내 딴에는 굉장히 크고 용감한 지출이었다.


나는 솔직히 창작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한 번쯤은 보여 주고 싶다. 그리고 조나단에게 공감하지 않는 자가 있는지 보고 싶다. 내게는 그가 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꼭 내 가슴 속에 있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조나단은 생계를 위해 다이너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곧 있을 워크숍만 잘 끝내면 성공적으로 무대 위에 작품을 올려 유망한 뮤지컬 작가가 될 수 있을 거고, 지긋지긋한 다이너따위 관둘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진다. 사실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생계비를 벌기 위한 일을 하는 것은 필수일 것이다. 나 또한 계속해서 서비스직을 전전했고,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냐고 물으면 늘 난처했다. 나는 글을 쓸 거고 영화를 할 건데 서비스직이 내 직업이라고 말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래도 아직은 준비생 신분이었기에 서비스직을 하고 있다고 얼버무렸다. 그냥 잠깐 하는 일이에요, 하는 사족을 붙이며. 그런 일이 많아질수록 내 꿈은 더 선명해졌고 내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파티에서 처음 만난 스콧이 조나단에게 하는 일이 뭐냐고 묻자 '나는 뮤지컬의 미래다'라고 답한 것처럼 나도 좀 더 뻔뻔하게 살아도 좋았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입 밖으로 뱉었으니 이룰 확률이 더 높아질 줄 누가 아는가.

 

그런 장면도 있었다. 창작 워크숍에서 존경하는 작곡가인 '스티븐 손드하임'의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고 그 한 마디로 2년을 버텼다고 조나단은 말한다. 작년이었던가, 이 영화를 다시 보다가 이 대사에 코끝이 시큰거렸다. 내 글을 보고 너무 좋은 글이라고, 영화처럼 춤을 추게 만드는 문장이라고 피드백을 해 주셨던 한 평론가의 말 한 마디로 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자신감이 떨어질 때면 그 말을 떠올리면서 더 잘해 보려고 노력했다. 좋은 피드백을 쉽게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분이어서 그 말을 더 믿을 수 있었다. 그 말을 듣던 순간이 그 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여전히 비평을 쓸 때 그 말을 기억하고, 그때 내 글에서 좋았던 부분의 느낌을 잃지 않으려고 꼼꼼한 퇴고를 거친다. 그러다 보면 완전한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들은 늘 피드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글을 쓰면서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는 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적고, 글을 세상에 내놓아도 내가 유명하지 않은 이상 다양한 피드백을 얻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좋은 피드백뿐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짚는 피드백 또한 끝없이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조나단처럼 또 한 해를 버틴다.


조나단이 준비한 슈퍼비아 워크숍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음원으로 나오지 않아 아쉽지만 슈퍼비아의 메인곡은 두말할 것 없이 대단했고 밤새 기적적으로 만들어낸 여자 주인공의 메인곡은 완벽한 피날레였다. 카레사와 수잔의 듀엣에 그저 조나단처럼 넋을 놓고 들을 수박에 없었다. 그 곡의 가사로 조나단이 쓴 슈퍼비아 이야기를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고 동시에 현재 조나단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기도 했다.


곡 이야기가 나왔으니 물어 보고 싶다. <틱, 틱... 붐!> 에서 최고로 뽑는 곡은 무엇인가? 누군가 내게 이 질문을 했을 때 고민이 정말 길었던 기억이 난다. 곡을 하나 하나 떠올릴 때마다 이게 최고였지, 아 이게 최고였는데, 아 이것도 끝내줬는데. 그래서 여러 곡으로 대답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는 확실하게 말한다. '30/90'이 역시 최고라고. 그 곡이 이 영화의 정체성이라고. 곧 서른 번째 생일인데 나는 이뤄놓은 것도 없고,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고, 그저 도망치고 싶은 마음. 이제는 결과를 내놓아야 할 때인데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혼돈 그 자체. 이 마음을 어떻게 저런 곡으로 써내는지, 정말 천재 작곡가가 아닌가. 조나단이 늦은 게 아니라 세상이 너무 늦게 알아 본 게 맞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워크숍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오매불망 기다리던 에이전트인 로자의 전화를 받았을 때, 실망스러운 소식을 들은 조나단은 그저 그렇게 묻는다. 이제 저는 뭘 해야 하죠? 그러자 늘 용무 전달만 하고 전화를 끊기 급급했던 로자는 수화기를 들고 한 마디 한 마디 힘줘서 말한다.


"다음 작품을 써. 그게 끝나면 또 쓰고 또 쓰고 계속해서 쓰는 거지. 그게 작가야. 그렇게 계속 써제끼면서 언젠가 하나 터지길 바라는 거라고. 이 바닥에서 잔뼈 굵은 사람이 조언 하나 할까? 다음 작품은 네가 잘 아는 것에 대해 써. 알았지? 연필 날카롭게 갈아."


그리고 스티븐 손드하임이 따로 전화해 남긴 음성메모.


그날은 말을 못했는데, 정말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거든. 축하하네. 괜찮다면 만나서 작품 얘기를 하고 싶은데, 부담은 갖지 말고. 중요한 건 탁월한 작품이고 미래가 밝다는 거야. 자네도 마찬가지고.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게.


이들 덕분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지금 조나단의 작품을 보고, 듣고, 감동받을 수 있는 건. 믿을 수 없이 절망스러운 일이 일어나도 마치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것 같다. 이번에 실패했던 건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환경이 충분하지 않았고 상황이 따라주지 않았던 거다. 나를 인정해 주는 이들이 있고 응원해 주는 이들이 옆에 있으니 다시 일어서서 평소처럼 미친 듯이 또 하면 된다. 나는 가치있는 피드백을 얻었고, 발전할 수 있다.


꿈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이 길어져서 지칠 때면 이 영화를 틀어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로자의 전화를 꼭 내가 받은 것처럼 펑펑 울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스티븐 손드하임의 메시지를 내가 듣는 것처럼 실실 웃곤 한다. 그러고 나면 다시 글을 쓸 용기가 생긴다. 조나단도 그렇게 다시 써내려갔으니까. 재능이 있었고 진심이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이가 그를 도왔고 응원했기 때문에. 나 또한 이 일에 진심인 것은 물론, 가능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멈추지 않을 것이다. 꿈을 가진 모두가 계속해서 걸어가면 좋겠다. 그래서 꼭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으면 좋겠다. 아직은 취미라고 하지만, 특기라고 하지만 언젠가 당당하게 내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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