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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국 Aug 16. 2024

캐릭터는 살아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이 작품을 극장에 가서 수도 없이 재관람을 할 때마다 매번 나를 아쉽게 만들었던 것은 슬램덩크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어린 시절이다. 그들의 마음이 궁금했다. 30년 전에 푹 빠져있었던 만화를 극장에서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 대체 어떤 기분일까. 물론 산왕공고와의 경기는 기존 스토리에도 있었던 것인데, 그 사이 펼쳐지는 송태섭의 서사는 모두 처음 알게 된 것이 아닌가. 아예 새로운 스토리보다, 캐릭터에 집중한 속편을 만든 것이 이 작품의 성공 비결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릴 적에 슬램덩크를 봤다면 내가 과연 송태섭을 좋아했을까? 송태섭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관심이 없었다면 후에 본 이 영화는 어떻게 느껴졌을까? 송태섭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지만 사람마다 열광하는 인물은 다른 걸 보면 나는 언제라도 송태섭에게 마음을 줬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강하고 까칠한 이미지의 캐릭터가 사실은 너무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고 그 상처가 그를 그렇게 자랄 수밖에 없게끔 했다는 것이 너무도 완벽한 성장 영화의 설정 아닌가. 그렇다. 사실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온통 송태섭을 향한 존경과 동경의 마음을 담은 헌사이다. 슬램덩크 속의 캐릭터에 한 번이라도 열광해 봤던 사람이라면 그때 그 마음으로 이 글을 읽어 주길 바란다. 


*아래 글에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송태섭과 그의 형 송준섭의 어린 시절 회상 장면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농구공이 튀는 그 특유의 소리로 관객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주장이 될 거야" 자신있게 말하는 어린 소년은 자신보다 훨씬 큰, 하지만 어리긴 마찬가지인 형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을 몰아쉰다. 저 소년에게 형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저 둘에게 농구라는 존재는 또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어떤 암시로 끝나는 장면 뒤에 송태섭의 현재 모습이 그려진다. 아대 두 개를 꺼내 차례로 팔에 차고 그는 낮게 읊조린다. "다녀올게" 사실 이 장면을 보려고 몇 번이고 다시 영화관을 찾았다. 더빙판과 자막판 둘 다 관람했으나 역시 한국인이라 그런 것인지 더빙판에서만 느낄 수 있는 어떤 벅찬 느낌이 있었다. 보통은 자막을 선호하는데, 유독 감정선이 크게 다가온 영화여서 애니메이션 영화 중 처음으로 더빙을 더 많이 관람한 작품이었다. 


다녀온다는 말 뒤에, 그제야 시작되는 영화의 인트로는 팬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사각거리는 펜촉의 소리 아래 탄생하는 인물들. 이것이 만화라는 걸, 태초에 이렇게 만들어진 캐릭터라는 걸 상기시키듯 기본에 충실한다. '러브 로켓' 노래를 배경으로 비장하게 걸어나오는 북산고 농구부에 이어, 같은 고등학생인데도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나타나는 산왕공고 농구부의 만남에 누군가의 머릿속은 벌써부터 만화 속 산왕전의 장면을 복기하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저 말로만 듣던 슬램덩크를 본다는 사실에 두근거림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코트 위에서 끼익거리며 바쁘게 움직이는 농구화. 마치 무대인 듯 공을 들고 끝에서 끝으로 활보하는 소년들. 스포츠 장르만이 줄 수 있는 역동감, 짜릿함, 긴장과 감동이 코트를 가득 채운다. 경기가 진행되는 중에 틈틈이 등장하는 송태섭의 서사는 내겐 최상의 몰입감을 안겨 줬으나 오히려 그게 방해가 되었다는 사람들의 후기도 종종 있었다. 그 사람들의 '최애'는 송태섭이 아니었으리라. 기존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를 보고 그 인물에게 가장 마음을 많이 주게 되는 것도 내 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묵묵하고 까칠하지만 능력 있는 포인트가드의 삶이 이렇게까지 엉망이었다는 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테다. 감정이며 표정이며 모든 걸 숨기는 법을 배웠으니, 가족에게도 드러내지 않는 걸 학교에서 드러낼 리가 없었다. 그저 이제 삶에 농구밖에 남지 않은 소년이었고 농구 말고는 중요한 게 없었으니 본인의 마음을 해소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형이 없어 외롭고 슬펐던 시기에 마주쳤던 정대만을 고등학교에 와서 다시 만나게 되고, 마음 한켠에서 늘 동경하고 있던 사람이 망가진 걸 보면서 송태섭은 자각한다. 모든 게 부질없다는 걸, 그리워하는 그 어떤 것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충동적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 크게 사고가 난 송태섭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빠르게 회복하고, 그제야 본인의 상처와 마주할 용기가 생긴다. 고향으로 가 형과의 아지트였던 곳에서 형의 물건들을 다시 마주하고 평생 묵혀두던 설움을 쏟아낸다. 무너질 듯 오열하는 그 장면은 한순간에 극장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기에, 한편으로는 다행이었으나 너무 아픈 일임은 변하지 않기에. 


모든 걸 털어내고 다시 체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며 학교로 돌아간 송태섭은 방황을 끝내고 돌아온 정대만과 마주한다. 이 순간이 마치 영화의 새로운 시작처럼 느껴진다. 제 손으로 끝내던 삶을 제 손으로 다시 살린 둘. 이들에게는 농구라는 게 있으므로 다시 삶을 끝내지 않을 것이다. 


'살아남은 게 저라서 죄송해요' 라는 문장을 썼다 지우던 소년의 마음은 어땠을까.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빚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나날들은 얼마나 아팠을까.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가족이어야 하는데, 자신을 가장 많이 숨겨야 했던 가족 곁에서 살아가는 건 어떤 기분이었을까. 산왕전을 이기고 돌아와 어머니께 솔직하게 '무서웠다'는 감정을 말하는 송태섭은 또 다시 하나의 다리를 건넌 것만 같다. 이제는 본인을 믿고 가끔씩 하늘을 바라보며 옆에 있는 가족들에게 때로는 의지하고 떄로는 든든한 남자가 되어 줬으면 한다. 그렇게 살고 있을 거라고 믿으며, 미국에서 훌륭한 기록을 쌓고 있을 그를 오늘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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