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가 그려진 독특한 모양의 마스크를 모양 빠지게 너랑 똑같이 쓰고 다닐 수 없으니 오늘은 나 혼자 이걸 쓰겠다는 메시지였다.
그날, 딸이 같은 반 남사친에게 선물 받은 귀여운 캐릭터 마스크는 여러 장이었다. 남녀를 막론하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여럿인 딸은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친구들과 소소한 선물을 주고받곤 했는데그날도그런 선물을 받은모양이었다. 그걸놓칠 리 없는 K는 다가와시샘 어린 관심을 보였고 눈치와 부담을 느낀 딸은 결국 선물 받은 마스크 몇 장을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거기까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다음에 들려온 말은 아니었다.
'내가 이걸 써야겠으니 넌 쓰지 마!'
K는 실제로 그 마스크가 너무 맘에 들었거나 혼자 귀여운 마스크를 독식해 친구들의 시선을 끌고 싶은 욕심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못 받은 물건을 선물 받은 딸에 대한 응징과 동시에, 자기 아래로 굴복시켜 본인의 존재감을 확인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했니?"
"뭐, 당황하기도 했고... 자기는 여분 마스크가 없어서 그걸 써야 한다더라고. 부탁하길래 그냥 내가 딴 걸 썼지 뭐."
딸은 몰랐을 리 없었다. 그 아이는 부탁 아닌 강요를 하고 있단 걸.
순간 딸이 느꼈을 굴욕적인 패배감이 전해와 너무 화가 났다!
사진_ 유튜브 스튜디오 와플
K는 이른바, 학교의 일진이라고 낙인찍힌 아이는 아니었다.
일진의 기준이라는 게 명확하진 않지만 한마디로 대놓고 아이들을 괴롭히거나 물건을 빼앗는 아이는 아니란 말이다.
이 지역 학교의 특성상, 같은 초등 출신 아이들 모두 같은 중학교로 진학하기 때문에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질뿐더러, 유흥 유해시설이 전무하기에 아이들의 일탈이나 탈선이 있을 수 없는 환경이다. 사소한 다툼은 있을지라도 집단 왕따나 아이들 간의 물리적 폭력사건은 좀체 일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눈에 띄는 아이들이라고 한다면, 말투가 거칠거나 교복을 줄여 입고 화장을 진하게 하는 정도로 이들 또한무리 지어 다닐 때 이목을 끌뿐, 알고 보면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K는 그중에서도 좀 튀는 아이긴 했다.
소위 놀아 보이는 날라리 선배들과 친하게 지내고 타 학교의남녀 학생들과도 어울리며 본인의 세를 과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내의 친한 무리들에게도 은근히 고압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발아래로 두려는 태도를 보인다 했다.
내 아이에게 그런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 편으로 그 아이의 지금 위치와 상황이 굉장히 아슬아슬해 보였다.
누구라도 잡아주지 않으면 자칫 선을 밟고 넘어갈 것처럼.
하지만 K에동조해 탈선에 박차를 가할 만한 친구들이 없었고 더구나 K와는 친하게 지내다가도 등 돌리는 친구들이 허다했다. 원인은 주로 이성문제로, 본인이 모든 관계의 중심이 되고자 했고 심사가 틀어지면 멋대로 굴거나 나쁜 소문을 흘리는 등으로 소수의 노는 무리에서도 끝이 좋지 않다고 했다.
처음 그 아이와 같은 반이 된 후 딸에게 호감을 보인 것도 남녀 할 것 없는 딸의 인싸력 때문이었겠지만 결국 많은 친구들에게 관심받는 딸은눈엣 가시였을 것이다.
친한 듯 잘해주면서도 딸이 관심의 대상이 될수록 장난을 가장한 꼽주기로 무안을 준다고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도는 명확해졌고 누군가와의 갈등 상황 자체를 피하고 싶어 하는 아이라 참아 왔겠지만 어떨 땐 작정하고 들이받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화도 나고 걱정도 됐지만 명확한 학폭의 증거가 있지 않은 이상, 내가 개입할 만한 일이 달리 없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딸이 뜻밖의 소식을 전해왔다.
"걔 요즘 학교 잘 안 와."
급기야 사고라도 친 것인가! 이유가 궁금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건 아니고. 우리 반에 친하게 지내던 애가 전학 가고 한동안 여기저기 끼어보려고 하는 것 같던데, 애들이 잘 안 받아줬나 봐. 그래서 다른 반이나 보건실 가 있더니 요즘은 아프다면서 아예 결석해."
학급의 여왕처럼 군림하던 아이가 한순간 존재감 없는 아이로 전락해 버렸다니.
딸이 전한 의외의 뉴스에 나는 솔직히..... 속 시원했다.
그동안 친구들을 괴롭혀 온 대가를 역지사지로 치러 봐야 본인도 깨닫는 바가 있지 않겠는가.
"어머 그랬어? 역시,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지."
그런데, 숨길 수 없이 개운해하는 나와 달리 딸은 개운하지 못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근데, 보면 좀 안됐어... 사실 전학 간 애도 걔 별로 안 좋아했거든."
"아니, 너 당했던 거 벌써 잊었어?"
"나도 알지. 그 생각하면 아직 열 받아. 그래도 그냥 인간적으로. 교실에 혼자 엎드려 있는 모습 보면 짠해. 내가 가서 말이라도 걸어줘야 하나 싶기도 해. 아파서 결석한다곤 하는데 뻥인 거 다 알지..... "
딸에게 지난 감정은 남아 있겠지만 지금 그 아이의 마음 또한 알기에 안쓰러울 것이다.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 무리의 혼자가 된다는 건 그 어떤 형벌보다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일 테니.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모두가 외면하는 순간이 있더라도 넌 용기를 내서 도와줘야 한다고 가르쳐오지 않았는가.
과거지사는 모두 잊고, 나조차 쉽지 않을 그런 이타심으로 덤벼들라고 말해야 하는. 지금이 그런 순간인 걸까.
내 아이가 용기 있게 손 내밀어 준다면 과거의 과오를 깨닫고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까.
왁자지껄한 교실 한편외로운 섬처럼자리하고 있을 아이.
아무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길 바라지만, 또 누구라도 자신에게 다가와 주길 바라고 있을 그 마음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
힘의 이동이 예고도 없이 가차 없다는 건 과연 누구에게 알려주는 교훈일까?
내가 지켜야 하는 딸의 엄마로서, 그리고 그 시기를 지나왔던 이 시대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무엇이 옳다고 말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