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손을 움직여가며 몰두하는 그 뽀얗고 말간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엔 이렇게 허물없는 생명체도 존재하는구나 새삼스러워져.
세상에 처음 얼굴을 내미는 존재는 탄성이 나올 만큼 무해하지.거친 나뭇결 틈을 비집고 나오는 연한 연둣빛 새 순, 아기새의 젖은 솜털,새근새근 잠든 아가의 분홍 뺨.세상에 길들여지지 않은 태초의 생명들에게 어떤 의문을 품을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알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류 최초의 살인은계획이나 모방이 아닌 본능에 따른 사건이었다는 것을.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어릴 적에도 지금처럼 사교육이 붐이었어.태권도 피아노도 그랬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 없이 반짝 인기몰이를 한 주산암산, 웅변 학원 같은 곳들이 많았어.방학이 되면 나도 그런 몇 곳을 다녀야 했지.
셈이 느린 내게 주산학원은개중 최악이었어.선생님이 읊어 주는 숫자를 주판알을 튕겨 더하고 빼고.일십백천으로 숫자는 점점 불어나는데 눈을 감고 암산까지!
듣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잖아?
그나마참을만했던 건나와 쿵작이 잘 맞는 친구가학원에 있어서였어.언제부터 우리가 친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친군... 그동안알아왔던 주변 친구들관 달랐어.내 마음을혹하게 하는 흥밋거리를줄줄 꿰고 있어서걔하고 있으면 신나고즐거웠지.시쳇말로 뭘 좀 아는 애였어.학원이 끝나고 우린 동네 어귀를 쏘다니거나떡볶이 집이나 오락실에 가기도 했어.어느 날인가는 학원을 빼먹고 시내까지 나간 적이 있었는데,들통이 나 눈물 쏙 빠지게 혼이 났지만 후회하진 않았어.
내게새로운 세상을 보여준아인 엄마 아빠 말고 걔가 최초였을 거야.
그날은 최고로 더운 여름날이었어.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오르막의햇볕이 살벌하게 뜨거웠지. 정수리에내리꽂는 열기가 불이 붙은 것처럼홧홧할정도였으니까.바람 한 점 없는 정오의 여름아래 걸음은 느려지고,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은 벌건 피부를타고 내렸지.지친 우리는말이 없었어. 몇 걸음을 걸어가다그 애가먼저 길가에 철퍼덕 주저앉았지.
"아이 씨! 더워 죽겠네..."
나도결국 가방을 내던지고그 옆으로 앉아 버렸어.
"오늘따라 돈도없고... 너 진짜 백원도 없어?"
"없다고.. 아까 말했잖아."
난 사실얼른 집으로 가고 싶었어. 엄마가 어제 냉장고에넣어 둔 수박이 생각났거든.
"우리 집 갈래?"
"아니..."
걘 시큰둥했어.
그렇지만이대로 일어날 생각도 없어 보였지.바람 한점 없는 하늘은 앉아 있어도 나을게 없었어.땀범벅인 옷이 몸에 척척 들러붙어 떨어지지도 않았어.
"안 갈 거야? 난 먼저 간다."
엉덩이를 툭툭 털며 끙하고몸을 일으키는데 친구가 내 허리춤을 붙잡았어.
"야 잠깐만.. 잠시만 있어봐."
친구는 날다시끌어앉혔는데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있었어.학원이 있는아래쪽 길에서 아파트 단지로 이어지는, 언덕 비탈초입. 친구의 눈은바로 우리가 올라온시작 지점에 멈춰 있었어.
"야, 저기.... 봐.쟤 온다. "
친구의 눈을 쫓으니 언덕아래를 오르고 있는 작은 물체가 보였어.그치만 뭐대수롭지않았어.친구는 나를 툭툭 치며다시 말했어.
"쟤 있잖아. 우리 학원 말 더듬이."
목표물을 포착한 고양이처럼 친구의 두 눈이생기로 반짝이고 있었어.
"그게 뭐..."
시원치 않은 내 반응에땀과 열기로 달아 오른 얼굴이바짝밀착해 왔어. 그리고 은밀하게 속삭였어.
"....심심하잖아...?
여기뒤에 숨어있다가 깜짝 놀래켜주자고 ㅋㅋㅋ"
내가대답도 전에 친구는용수철처럼튕겨일어나 뒤편 화단 쪽으로잽싸게 몸을 숨겼어.얼떨결에 나도따라가숨게 되었지.
"하나 둘 셋 하면 바로 뛰어나가는 거야. 알겠지? 큭큭"
난 쭈그려 앉은 채 고개를 끄덕였어.오줌 지린내가 올라오는 것 같은 축축한 화단과 발아래 움직이는분주한 개미떼가신경 쓰였어. 하지만 친구는목표물만 뚫어질 듯 집중하고 있었어. 언제였더라.. 볼록렌즈의 돋보기로 태양빛을 모아 신문지를 태웠던 일이 떠올랐어. 친구의 눈이 꼭, 그때의 볼록렌즈 같다고 생각했거든.
이마를 타고 흐른 누군가의 땀방울이 툭,떨어졌을 때그 아이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어.
우리 학원의특이하고 이상한여자애.
체구도 작고 말도 서툴러한참 어린 동생인 줄 알았던 애.워낙 말이 없어 첨엔 말을 못 하는 앤가 했었어.
"내내.. 내, 내 거야. 도도도도 돌려줘!"
어떤 아이가 연필을 가져갔을 때 처음으로 걔가 말을 했어.누가 불러도 대꾸하는 일이 없던 애가 자기 물건에 대한 집착은 엄청났던 거지.하루는 사인펜 한 자루를 잃어버렸다고 선생님까지 나서서 교실의 모든 책상과 가방을 탈탈 털어 뒤진 적도 있었어. 결국 사인펜은 찾지 못했는데 찾기 전엔못 간다고 버티는 바람에 결국 걔 엄마까지 호출되었거든.
조용하지만 이상하게 고집스럽고 어리숙한.
걘 그런 아이였어.
그 애가 오기까진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어.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끈이 흘러내려 고쳐 메느라 걸음을 멈춰야 했고운동화 끈은 풀어져 질질 끌리고 있었거든. 그래도 한 눈 팔지 않고 열심히 오르막을 오르고 있었어.우린 오르막이 끝나는 정점에 숨을 죽이고 있었지.
한걸음 두 걸음,이윽고 그 애가 사정거리에들어오려고할 때였어.
"지금이야!!"
가쁜 목소리가 귓가를 때리자마자,그 아이에게로 돌진했어.친구가 손을세게 잡아끄는 바람에 하마터면넘어질 뻔했지만 우리는 거의 동시에, 그 아이 앞을 막아섰어.
"왁!!!"
"으아악...!!!"
그 아인 새된비명을 지르며몇 발짝뒷걸음질 치다그대로쿵 엉덩방아를 찧었어.메고 있던 가방은 벗겨지고 신발 한쪽은 날아간 상태로얼어붙어버렸지.자기에게지금무슨 일이벌어진 건지,왜나자빠진 건지도모르는 것 같았어.
"푸훗. 후하하하하!!!"
친구는 그 모습을 보곤 배꼽이 빠져라 웃어 댔어.
바닥을 굴러가며한참을 웃었어.물론 나도 함께 웃었지.
"크크 크큭. 푸하하하하! "
배를 잡고바닥을 뒹구는 동안 그 아인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있었지. 몇 분 전의얼빠진 얼굴이무색할 만큼.소스라치게 놀라 꽥꽥비명을 질러대던 애가 맞나 싶을 만큼 태연해 보였어. 가방을 고쳐 메고 벗겨진 운동화를 다시 찾아 신고,아무 일 없었던 듯다시 가던 길을 가려는 것 같았지.정신없이 웃고 있던 우리 모습이 좀 머쓱해지더라고.
만약... 그 애가화를 내거나 울어버렸으면.그때 그랬다면어땠을까? 후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
어쨌든 그 앤 그러지 않고 그대로 발길을 돌리려 했어. 순간,친구가그 애 가방을 손에서 확 낚아챘어!그리곤순식간에뒤편 나무에걸어버렸지.그건 나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던 '돌발 이벤트'였어.
친구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실로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앨내려 봤어.
'쯧. 이래도 네가 안 울고 배겨?'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을 거야.. 무표정했던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어. 가방이 걸려 있는 나무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어.연필이나 사인펜 한 자루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엄청난 재앙이었겠지. 떨리는 입술을 옴싹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나무에걸려 있는 가방을 어떻게든 잡아보려 애쓰기 시작했어.
"푸후훗, 프하하하하하!"
친구의 웃음이더 크게터졌어.
"쟤 봐! 아하하하하하!"
하지만 어쩐지난웃음이 나오지 않았어.
'이건 계획에 없던 건데...'
그 아인 여전히 닿지 않는 가방을 잡아 보려 팔을 뻗어 있는 힘껏팔짝팔짝 뛰어올랐어.우릴 향해 뭐라 소리치기도 한 것 같았지만 친구의 웃음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어.
아....
장난을 치려한 것뿐인데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모습에마음이 불편해졌어.
그때, 친구가 내 어깨를흔들며 말했어.
"뭐 해? 빨리 도망치자!"
우리는 언덕의 내리막을 내달리기 시작했어. 땀으로 젖은 옷은 이제다 식어 있었어. 불어오는 바람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어. 뒤에서 그 아이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어.
한 해 두 해 시간이 흘러, 학원이 문을 닫고 친구와 소식이 끊어지게 되었을 때.내가 어느덧 중학생이 되고 학폭의 피해자가 되어 전학을 전전하다 결국 자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때. 늘 그 장면이 떠올랐어.
아이들이 날 둘러싸고 낄낄대며 웃을때도.태연한 척 무심한 표정을 지으면주먹과 발길질이 날아올 때도,
피맺힌 입가를 닦으며 터덜터덜 걸어갈 때마다 생각했어.
내가벌을 받듯 너희들도 벌을 받게 되겠지.지루한 누군가의어느 날, 욕망이 넘실넘실 흐르다가너희를발견하고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다가오는 순간이 있겠지.
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느냐고 누군가 물을 때가 있었어. 하지만대답할 수 없었어.왜냐하면,난알고 있었거든.
누군가를 향한 욕망. 짓밟고 비웃고 무너뜨리고 싶은 이유 없는 욕망이 시작되면 멈출 수 없다는 걸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