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4학년 때 문득 티비를 보는데 빨간 지붕의 체코 프라하의 모습이 나왔다. 그 아름다운 관경에 순간적으로 매료되었던 나는, 대학 시절 가장 큰 이벤트 격인 국가고시 시험을 치고는 체코로 떠나리라 마음먹었다. 실행파인 나는 마음먹은 순간부터 함께 동유럽 여행을 갈 멤버를 모집했다. 하지만 친구들과 시간 맞추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고 당시 아빠께 고민을 토로했다.
"국가고시 치고 동유럽 체코로 가고 싶은데요. 생각보다 친구들과 시간이 안 맞아요. 혼자 가야 하나 싶어요."
"왜 아빠한테는 안 물어봐? 아빠도 같이 갈 수 있는데!"
오, 그러고 보니 나는 당연히(?) 가족들은 멤버에서 배제했다. (어쩌면 그중에서 아빠를 가장 먼저...)
하지만 생각 보니 그는 20대 시절 우수 사원으로 뽑혀 일본 도쿄, 오사카, 교토를 가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럼 아빠는 근 30년간 동안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만 공기를 마시며 살았다는 건데 그러기엔 아쉽지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나는 인생을 살면서 늘 후회하는 삶은 살지 말자는 모토를 나름대로 실행해 온 사람이다. 다수의 책에서 인생 선배들이 그러하듯이 "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보내라.", "한 살이라도 젊은 그들의 모습을 많이 남겨둬라"라는 말을 시행에 꽤나 착실히 옮긴 편이었다. 또한 아빠와 단둘이 떠나는 부녀 여행은 꽤나 낭만적이라 생각마저도 들었고!
8박 10일이라는 시간 동안 아빠와 체코 프라하, 오스트리아 빈을 온전히 즐겼다. 꽤 긴 시간 동안 두 나라의 두 도시만 다녔기에 여유롭게 하루하루를 만끽했다. 당시 어느 랜드마크, 카페, 식당을 가든 우리처럼 부녀 여행을 온 사람들을 찾아보긴 힘들었다. 모녀 여행을 오신 분들은 많이 봤지만 부녀 여행을 하시는 팀은 여행 내내 단 한 팀도 보지 못했다. 그때 느꼈다. 우리처럼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흔치 않구나. 이 조합이 여행 멤버로 흔치 않다는 것을.
아빠와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블로그에 기록을 남겼었다. 여행 당시를 회상하며 정리한 키워드들은 이랬다.
[조식], [맥주], [여유], [야경], [클림트의 발자취 따라가기], [한식당], [비엔나 카페 투어] 여행 내내 무료 4군데의 한식당을 다녔고, 당시에는 현지 음식을 하나라도 더 먹고 와야 하는데 싶었기에 한식당 가는 자체가 싫었다. 허나 돌이켜보면 한식을 강제적으로라도 먹었기에 더 열심히 여행을 할 수 있었나 싶기도 하고. 한식당을 이리도 많이 다닌 이유는 숙소 안에선 괜찮다가 바깥으로 나오기만 하면 꾸르꾸르 해지는 아빠의 장 때문이었다. (꾸르꾸르라는 단어는 그가 항상 쓰고 표현하는 단어로서 아마 대장 증후군의 증상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정말 신기한 게 조식도 잘 드시고 숙소 안에선 괜찮은데 이제 구경 좀 해볼까 하면 장에 이상이 오는 거다. 어디 여유롭게 여행을 하려고 하면 늘 오는 신호 때문에 처음엔 걱정이 되다가 나중엔 점점 짜증이 나다가 결국엔 같이 무기력해져서는 체념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당사자인 아빠는 오죽 힘들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고. 이 밖에도 기억에 남는 것은 오로지 단둘만의 시간이기에 살면서 아빠와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었노라 자부할 수 있다는 것.
원래 여행은 끝나고 나면 행복하고 즐거웠던 추억으로만 미화되는 거 아니겠는가.
환갑을 맞이하기 몇 해 전부터 아빠는 내게 환갑 때 뭐해줄 거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씀을 하셨고, 나는 혹시 원하는 게 있냐고 있으면 말해달라고 했다. 아빠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당당히 말씀하셨다.
"나는 여행을 가고 싶다. 환갑 여행을 보내줬으면 좋겠다."
부녀 여행 이후로도 두 번 가량 가족 여행을 같이 가면서 느낀 건, 아빠와의 여행에는 완충제가 필요하다는 사실. 여기서 말하는 완충제란 우리 부녀 사이를 조금이나마 완화시킬 법한 사람인 남동생을 말하는 거다. 아빠는 아주 옛날부터 이상하게 나와 동생이 같은 말을 해도, 나에게는 조금 더 예민하게 동생에게는 조금 더 관대한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로 살짝 거슬러 올라가자면, 아빠는 동생을 아주 눈에 띄게 좋아했는데 처음엔 왜 저렇게 편애를 할까 싶었다. (물론 엄마는 내게 더 사랑을 줘서 그래도 편애받으며 자랐다는 결핍을 많이 못 느껴 정말 다행이었다) 하지만 서점에서 우연히 어느 아빠가 쓴 에세이를 잠깐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작가는, 본인도 사람인지라 나와 결이 잘 맞는 자식이 있다고 얘기했는데 그 문장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우리 아빠가 대한민국이란 당시 남아 선호 사상을 지닌 집안에서 자라 가부장적인 마인드를 지닌 사람이라서 남동생을 더 좋아하는 게 아니고. 그냥 나보다 남동생과 더 결이 잘 맞는 사람이구나. 왜 그 작가가 말하듯이 똑같이 사랑하나 유독 더 나랑 잘 맞으니깐 더 찾게 되는 사람이 동생이라서 그렇구나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주 아이러니하게 아빠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고 큰 이벤트들의 담당은 내가 하고 있다. 이게 바로 흔히들 말하는 K 장녀로서의 숙명, 아니 안 해도 무방하지만 나라는 사람의 성정 때문이겠지.
그렇게 나는 6년 만에 아빠와의 해외여행을 다시 계획한다. 수많은 선택지들이 있었지만 아빠는 내가 보내드리는 여행이라서 그런가 비교적 물가가 저렴한 나라를 택하신 듯 보였다. 우리가 최종 선택한 나라는 베트남의 나트랑. 이상하게도 추울 때 따뜻한 나라 가는 걸 은근히 좋아하시는 아빠는 처음엔 방콕을 다시 가고 싶다 하셨다가는 나와 이야기 나누다 나트랑으로 정했다. 사실 베트남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못했다. 가족 첫 해외여행지로 베트남 하노이를 갔었는데, 즐겁고 재밌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나라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화폐단위가 내 기준으론 다소 쓸데없이 너무 높아서 계산할 때 은근 복잡하기도 했고. (나는 뼛속까지 문과인이라 숫자에 다소 약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 하지만 이번 나트랑 여행이 베트남이라 나라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바꿔줄 수도 있을 테고, 또 몇 년 만에 아빠와 단둘이 보낼 시간이 다소 설렘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잘 다녀온 여행이었지만, 자꾸만 조금만 더 비워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을 더 많이 비울 것을, 나트랑 여행 (1)로 지었는데 본격 나트랑 얘기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