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품은 계절은 자존감이 높다. 사람들의 관심을 넘치게 받아서 혹은 생명의 찬란한 빛깔들을 품고 있어서?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 자존감에 하늘이 복종하고 땅이 존대한다는 생각까지 든다.
요즘의 코코는 봄을 품은 계절 같다.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고 땅을 파고 들어 길이라도 낼 기세다. 견생 후반기에 접어든 후부터 코코는 도도하고 오만하게, 지 멋대로 살기로 작정한 것 같다. 더 재밌는 것은 그 무엇도 코코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두가 코코의 결정을 신의 결정처럼 존중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한 존재의 삶의 방식에 대한 실존적 결정이 현실에서 힘을 가지려면 주변 존재들의 승인과 주변 환경의 절대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런 상황이 과연 내 주변에서 벌어질 수 있을까, 회의적이었다. 난 그 상황을 유일하게 코코에게서 목도하고 있다.
코코는 이제 ‘사료 따위 개나 줘버려’ 라는 자세로 아침을 맞는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아침 개 사료를 내민다. 그러면 코코는 ‘개 위라고 무시해? 내 위는 이미 맛있고 고급스런 음식들만 허락하기로 선포했다고, 멍청한 주인 같으니’ 라고 눈빛으로 말한다. 언짢은 표정을 장착한 채 나를 보는 코코에게서 주인마저 무릎 꿇릴 기개가 보인다. 아주 배 고프지 않으면 강아지용 먹거리 따위, 코코는 하찮다. 이미 배는 며칠 식량을 저장한 듯 늘 불러 있고 생존 따위, 인간들이 알아서 해결해 줄 테니 나는 오직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할 것이다, 선포한 왕 같다. 자신들은 주인인 줄 알지만 코코에게는 무수리인 인간들은 입으로는 ‘이노무 시끼’ 어쩌고 웅얼대지만 코코는 안다. 결국 인간 무수리들은, 용에게 제물을 바치듯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바칠 거라는 걸.
집 역시 실은 코코의 것이다. 인간들은 지들 거라 우기겠지만 온 집안에 코코의 침이 묻어있고 집의 핵심적 길목마다 코코의 방석들이 점령해 있다. 집안 곳곳 코코의 네 발이 안 닿은 곳이 없으며 집안을 채우고 있는 무수한 냄새들도 코코와만 소통한다. 무엇보다 인간들은 있는지도 모를 집안 구석구석에 코코가 확보해놓은 음식들, 음식 포장지들이 집문서처럼 짱 박혀있다.
코코는 돈 버는 일 따위, 노년의 준비 따위, 외로움 따위. 죽음 따위, 지 알바 아니다. 인간들이 설설 기는 생의 과제들을 ‘따위’로 끌어 내린 채 오늘도 내 침대에 거만하게 누워서 맘대로 침을 묻혀대고, 내가 일에 몰두하든 말든 코를 골고, 기분이 좀만 별루면 내가 자고 있든 말든 쾅쾅 짖는다. 내 것 역시 모두 지 것인 코코는 누구든 장난감처럼 자기를 건드리면 으르릉 본때를 보여주고 심하게 귀찮게 하면 이빨을 흉악하게 드러내며 무는 시늉도 한다. 왕을 건드린 대가를 보여줘야 하는 지존의 삶, 에 코코는 지 혼자 과하게 적응했다.
처음 코코를 데려왔을 때, 코코가 저렇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중에 생각하니 코코를 내 생에 들이기로 한 이유, 불쌍해서였다. 처음 보았을 때 코코는 세상 불쌍한, 보기만 해도 눈물 나는 애였다. 하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코코는 한때 집이었던 세상에서 쫓겨난 애, 완전히 쫓겨나기도 전에 스스로 그 쫓겨남을 완성하고 있는 애였다. 인간이라는 울타리, 주인이라는 온기를 잃은 코코의 생은 봄이 거세된 겨울이었지만, 인간과 사는 법 밖에 몰랐으나 그 유일한 생존방식을 뺏겨버리고 하루아침에 황야로 내몰린 불쌍한 개였지만, 앙상하게 말라서 눈이 절반을 차지한 얼굴로 세상에게 말하는 듯했다. ‘옛다. 니들끼리 잘해봐라.’
추워보였지만 가벼워 보였다. 그래서 친근해보였던 것일까. 그때의 코코는. 이제와 생각하니 말라깽이여서 그렇게 보였던 것도 같다. 오해는 모든 생의 필연적 변수니까 뭐. 어쩌면 그때 코코는 내가 ‘너’들에게 ‘옛다’ 하고 퍼주고 온 이후의 내 생 같기도 했다. 집 나간 엄마를 둔 버려진 아이 같던 코코는 지금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나는 펑퍼짐한 코코의 찰진 엉덩이를 툭툭 친다.
그때 코코는 이 세상에 갓 취업했으나 취업하자마자 난데없이 해고 통보를 받은 것 같은 존재 그래서 불쌍은 존재의 본질이자 현상이자 전부인 존재였다. 커다란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렸고 까만 동공은 불안으로 터질 듯 했으며 깡마른 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코코는 살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생존의 차가운 칼 날 위에 던져졌고 그 칼날에 베어 상처를 입었으나 칼날을 피할 명민한 머리도 부족했으나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피 흘리는 줄 몰랐으나 그럼에도, 칼을 피하기 위해 못할 짓이 ‘있는’ 개처럼 보였다. 내 비록 생이 불쌍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살기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존재는 되지 않겠다, 선언한 개 같았다.
나는 그 첫만남의 코코를 잊을 수가 없다. 그 순간들의 코코의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 없어보임의 적나라함. 그 미칠 듯한 솔직함. 생의 안전망이 상실되었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야 어쩌라고 하는 어이없는 자의식. 개에게서 그런 자의식이 읽혀지다니.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내 자의식의 투사인가. 궁금했다. 하지만 알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코코를 데려왔을까.
아마도 코코에게서 ‘너’가 어련 거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코코는 불쌍한 너, 그래서 감당하기 힘든 너, 용납하기 어려운 너, 였다. 인간적으로 좀 불쌍하긴 해 근데 대체 언제까지 불쌍할 거야? 나는 나에게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고 계속 불쌍하기만 하길래, 나는 너로 보내버렸다. 그래야 내가 살아지니까. 불쌍한 존재들은 대부분 막무가내라서 타협이 대화가 안 된다.
너로 분리하고 나를 비교적 관리 가능한 것들로 채우는 일. 생존의 유용한 방식 중 하나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랬다.
근데 불쌍한 너, 였던 코코가 오만대마왕이 되었다. 이제 코코는 더 이상 창 밖 따위 내다보지 않는다. 봄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나 같은 인간 따위와는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었다. 봄이 오든 말든 꽃이 피든 말든 코코가 알 바 아니다. 코코에게 봄은 기본이고, 꽃은 일상이니까. 인간 무수리들이 마련해줘야 하는 자기 것이니까. 코코는 그 모든 것을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였고, 감사 따위 기쁨 따위 우습게 여긴다. 다만 먹을 것을 맘대로 먹을 수 없다는 작은 걸림돌이 있을 뿐. 그 역시 안 먹으면 그뿐. 하루 이틀만 굶어줘도 인간들이 스스로 안달해 하면서 맛있는 것들을 대령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사는 일 따위, 너무 쉽지 않은가. 생은 자신에게 살아 달라 행복해 달라 구걸하고 있다. 오! 이런 성가신 것들. 그래 내 니들의 정성을 봐서 까이꺼 살아주지. 이놈의 인기란.
‘원래 나 이런 놈이야 니가 속았거든’ 하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코코를 보는 일. 기가 차면서도 의외로 재밌다. 코코를 데려왔을 때 내가 실은 코코에게 바란 것이 이런 거였나 싶을 만큼. 개에게서 ‘내가 니 왕이다.’ 라는 눈빛을 읽는 일은 생각보다 신선했다. 보면 볼수록 즐거웠다. 그리고 뿌듯했다. 코코를 천하의 오만견, 안하무인견, 싸가지견으로 만든 것이 나라는 사실이. 그 불쌍하기 그지없던 개를 이렇게 만들기 위해 내가 기꺼이 헌신했다는 사실이.
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하니 바로 답이 튀어나왔다. 대리만족. 코코가 못 봐줄 수준의 시건방을 떨면서 천하를 발아래 둔 듯한 표정으로 세상을 내려다볼 때, 그런 코코를 지켜보는 내 감정은 쾌감이다. ‘코코, 좋겠다. 너라도.’ 코코에게서 난 나를 본다.
잠깐만. 그렇다면... ‘너’인 줄 알았던 코코가 실은 ‘나’... 였던가.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