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알겠어요. 이제 그만이요. 빨리요. 빨리’
마음을 다해 외치는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올까 싶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손에는 신발주머니, 어깨에는 가방을 메고 있었다. 종례가 끝나면 번개같이 달릴 만반의 준비는 종례 시작 전부터 끝낸 상태였다. 오늘따라 선생님의 말씀이 길어진다. 반장의 ‘차렷, 인사’가 끝나자마자 ‘감사합니다’를 외치고 1층으로 내달렸다. 현관에서 번개같이 신발을 갈아 신고, 본격적으로 달렸다. 왜 그리 빨리 가냐는 친구의 목소리가 어깨너머로 들려왔지만 뒤돌아 대꾸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늘따라 딸깍 단번에 열리던 문이 미동도 하지 않는다. 급한 마음에 열쇠를 이리저리 돌려보지만 실패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한 번에 열쇠를 쑥 밀어 넣는다. 조심스레 오른쪽으로 살짝 돌린다. 성공이다.
베개 하나를 가슴에 끼고 엎드려 어제 읽다 만 부분을 찾아 읽어 내려간다. 너무 궁금했다. 궁금해서 잠을 이룰 수 없는 지경이었다. 포도주 사건으로 다이애나와 만날 수 없게 된 앤 앞에 다이애나가 나타났고, 동생이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앤의 이야기까지 읽었었는데…. 빠르게 책을 읽어 내려간다. 앤이 다이애나의 동생 미니 메이를 밤새 최선을 다해 돌보았고 미니 메이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앤은 다이애나와 다시 친구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휴~~ 다행이다’
빨간 머리 앤을 읽으며 나에게도 앤과 같은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해 보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앤과 같은 친구를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빨간 머리 앤」을 끼고 살았었다.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그 해가 가기 전 빨간 머리 앤을 수십 번도 더 넘게 읽었던 것 같다. 그냥 앤이 좋았다. 부모님과 일찍 헤어졌음에도 밝고 당당한 모습의 앤이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게다가 똑 부러지게 공부도 잘한다. 똑똑하고 못 하는 것 없어 보이는 앤이 부럽기도 했다. 앤은 나의 유년 시절 친구였다.
[라라 프로젝트 비밀 책방] 이번 달 책이 「빨간 머리 앤」이라고? 웃음이 절로 났다.
“딸, 엄마 빨간 머리 앤 책 좀 갖다 줘, 이번 비밀 책방 책이 빨간 머리 앤 이래”
본인의 방에서 책을 들고 나오며 말한다.
“근데 엄마, 어른들도 빨간 머리 앤을 읽어요?” 반짝이는 눈망울에서 호기심이 가득하다.
“빨간 머리 앤은 몽고메리 여사님의 위대한 작품 아니겠니?”
숙제할 때마다 딸이 옆에서 계속 기웃기웃한다. 필사 노트를 들춰보며 엄마가 뽑아낸 문장을 읽고 있다. 숙제를 위해 책을 읽을 때마다 옆에 와서 말을 건넨다.
“엄마, 진짜 재밌죠?, 내가 좋아하는 책이에요. 정말 재미있어요. 앤은 정말 멋진 친구 같아요. 난 그런 앤이 좋아요"
나의 친구였던 앤.
그 친구가
내 딸의 친구가 되었다.
나의 유년 시절. 시간이 흘러 내 딸아이의 유년 시절에 좋은 친구가 되어 준 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앤을 다시 읽어 내리며 몽고메리 여사의 세심한 묘사에 감탄하게 된다. 몽고메리 여사가 살았고, 빨간 머리 앤의 배경이 된 곳. 프린스 에드워드 섬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정말 멋진 곳이구나. 사진 만으로도 앤이 말했던 모습들이 떠오른다.
"아름답죠?
비탈에서 옆으로 뻗은 저 나무 말이에요.
온통 하얗게 레이스를 단 듯한 저 나무를 보면 뭐가 생각나세요?"
"오늘 저녁은 꼭 보랏빛 꿈같지 않니?
살아 있다는 게 정말 기쁘다는 생각이 들어
아침에는 늘 아침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저녁이 되면 또 저녁이 더 아름다운 것 같단 말이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어려운 일이 아닌가 봐요.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돼서 정말 기뻐요"
"장미가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분명 우리에게 사랑스러운 얘기들을 들려줄 거예요"
"내일을 생각하면 기분 좋지 않나요?
내일은 아직 아무 실수도 저지르지 않은 새로운 날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