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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rimi Oct 05. 2021

장래희망은 퇴사

휴직 중인 사회복지공무원의 변명 일기


며칠 전 이른 아침에 친정엄마가 잠깐 집에 들르셨었다. 건강검진 가는 길에 지나다가 김밥을 주러 왔다고 하셨다. 등교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딸아이의 입 속에 외할머니가 싸오신 김밥을 쏙쏙 넣어준다.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엄마가 날씨 묻듯 물으셨다. "복직이 언제라고 했지?"


복직 안 할 수도 있어요, 라고는 차마 대답을 못했다. 사실 나 스스로도 아직은 모르겠다. 그렇다고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도 없다. 뭔 소리여? 하실 테고,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얘기를 섣불리 꺼냈다가 괜히 '안된다' 는 말에 가로막혀 더 우울해질 게 뻔했다. '일단은 겨울방학 보내고 내년 3월이요.' 적당히 대답하고 말았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반은 맞고 반은 아닌 생각일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벌 수 있으니 행복한 사람이 있을 테고, 좋아하는 일이 진짜 일이 되어 더 이상 즐길 수가 없게 된 사람도 있을 테니까. 결국 마음의 문제인 걸까? 물론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겠지.


심리상담센터에 다닐 때 상담사가 내 직업에 관해 물었었다. 어떻게 그 일을 하게 되었느냐고. 비싼 상담시간에 상담사가 던지는 질문이 당연히 별 의미가 없을 리 없지만, 그 질문에는 '의외' 라는 느낌도 담겨있었다. 나도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성적에 맞추다 보니 어찌해서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하긴 했는데요, 사회복지사가 될 자신은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냥 사회복지공무원이 됐어요. 아시다시피 사회복지사들은... 열정적인 사람들이잖아요."


상담사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동의는 내가 뱉은 모든 말에 있었을 것이다. 어찌하다 보니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했다는 말. 그러니까 내 의지는 아니었다는 것. 사회복지사가 될 자신은 없었다는 말. 그러니까 열정적인 사람이 될 자신은 없었다는 것.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나는 사회복지학이 뭘 하는 건지도 잘 몰랐다. 내가 교사가 되기를 바라는 엄마의 꿈과 딱히 뭐가 되고 싶은 것은 없었던 자신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나는 꾸준히 사범대에 지원을 했다. 붙을 줄 알았는데 떨어졌다. 사회복지학과는 엄마가 혹시 사범대에 떨어질 수도 있으니 원서를 하나 더 넣어두자고 해서 적당히 안정적인 점수로 지원해둔 것이었다. 원서를 쓰면서도 진짜 거기에 진학하게 될 거라고는 정말로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대학의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했다. (학비가 비쌌다면 그 마저도 진학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다행히 국립대라 학비가 저렴했다.) 그런데 신기한 건 의외로 또 다니다 보니 학과 공부가 재밌었다는 거다. 정말 의외였지만 공부 자체가 나하고 잘 맞았다.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오롯이 홀로 지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전공과목은 4년 동안 A+를 놓친 적이 거의 없었고, 소소하게나마 매 학기 장학금도 받았고, 전체 학점 4.0을 넘어 조기졸업도 할 수 있었다. (학비를 아끼기 위해서 한 학기라도 조기졸업을 하려고 애쓴 노력의 결과들이기도 했지만 전공 공부가 나와 잘 맞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엄마는 의외의 제안을 했다. '대학원에 갈래? 니가 가고 싶다고 하면 보내줄 수 있다.' 솔직히 아주 솔깃한 말이었다. 어쩌면 생애 최초로 내가 내 인생에 '선택' 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몰랐다. 나는 스스로를 아주 잘 알았다. 현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공부를 하는 것이 나한테 훨씬 더 잘 맞을 거였다. 엄마도 그런 나를 알았기 때문에 먼저 꺼낸 말이었을 것이고.


하지만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얼마나 힘들게 버티며 우리를 공부시켰는지를 다 아는 내가 당장 취업부터 하지 않고 대학원에서 공부를 더 하겠다고 결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난한 엄마는 이미 두 자식들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을 다 해줬다. 내가 하겠다고만 하면 더 공부를 시켜주겠다는 엄마의 말이 진심인 것도 알았지만, 알아도 내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도 변명일 뿐, 그저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내 간절함이 없어서였을 지도 모른다. 하여튼 나는 어느 방면에서든 열정과는 좀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그래서 나는 공무원이 되기로 했다.


열정을 갖추어야 하는 사회복지사가 될 자신은 없고, 그냥 일반행정직 공무원이 되기엔 대학에서 4년간 재밌게 공부했던 전공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4년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들을 다 버리는 것 같아 아까웠다.) 그래서 나는 사회복지공무원이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인 불우한 경험들 때문인지 나는 불안도가 아주 높은 사람이었다. 불확실한 것이 싫었고, 불안정한 것도 싫었다. 머리로는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꾼다 해도, 몸은 안전한 바닥에 딱 붙어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그런 자신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도전이라든가 모험 같은 단어들이 품고 있는 그 아름다움과 자유로움을 동경하면서도 사실은 두려움이 더 크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흔히 철밥통이라 불리는 안정적인 직장인 공무원이 되기를 주저 없이 선택했다는 것을.


아마 나와 비슷한 이유로 공무원이 된 사람들도 많을 거라 생각한다. 특별히 되고 싶은 어떤 것이 없어서. 딱히 잘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저 냉혹한 경쟁사회에서 무언가를 시도하고 도전하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없어서. 그냥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조직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그런 자아성찰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그저 안정적인 직업, 워라밸이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직업을 찾아 공무원이 된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하지만 나는 사회복지공무원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사회복지사가 될 자신이 없어서 사회복지공무원이 된다는 것은 아주 우습고도 우스운 소리였다는 것을.


물론 현장에서 만나는 사회복지사들의 열정은 공무원이 쉬이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정말로 대단하다. 대상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그들의 진심을 마주할 때마다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 정도다. (사회복지사, 생활지원사, 장애인 활동지원사 등등, 그들은 각 대상자들에 대해 공무원보다 훨씬 전문적이다.)


사회복지공무원이 사회복지사의 열정을 쫒는 것이 힘든 이유는 일단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행정업무가 제일 우선이고 또 너무 많다. 당장 현장으로, 가정으로 방문을 나갈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건 변명이 아니라 진실이다. 열정을 논할 시간이 없다.


입사 초기 3년 정도는 정말 숨만 쉬면서 일만 했다. 아직은 내가 신입이라서 그렇겠지, 업무에 익숙해지면 나아지겠지, 일이 적은 다른 부서로 이동을 하면 좀 괜찮겠지, 그리고 젊으니까, 아직 미혼이니까, 급한 일이 생기거나 일이 쌓여도 남아서 야근을 하거나 주말에 출근을 해서 잔업을 하면 되니까.


그렇게 해서 잃은 것은 타고나길 건강했던 몸이었다. 나는 보기보다 꽤 건강한 체질이라 어릴 때 이후로는 몇 년 동안 감기도 걸리지 않을 정도였는데, 일을 하면서부터는 한 번 감기에 걸리면 몇 달 동안 낫지 않아 폐렴 직전까지 가기 일쑤였고, 급작스런 복통으로 데굴데굴 구르다 병원에 갔더니 만성 위염에 스트레스로 위장이 꼬여있다고도 했다. (그즈음 입사 동기는 출근길 버스 안에서 과로로 실신을 했다.)


다행히 4년 차에 결혼을 하고 첫아이가 바로 생겨서 아이를 낳으며 육아휴직이라는 꿀 같은 휴식시간을 가졌지만. 곧 복직을 하고 나서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 출근을 하면 아이는 어린이집에 갔다 와서 내가 퇴근할 때까지 친정엄마가 돌봐주셨는데, 그렇다고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친정엄마는 유방암 수술을 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 건강이 좋지 못하셨다.


사기업에 다니는 남편의 출근 시간은 아침 7시 30분, 퇴근 시간은 저녁 7시 30분. 주말에는 잦은 출장이 끼어 있었고, 한 달에 3분 1 정도는 아예 집에 없는 날들이었다.


공무원의 출근 시간은 오전 9시, 퇴근 시간은 저녁 6시. 워라밸, 일(work)과 삶(life)에 균형(balance)이 있을 것만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업무 시간에 다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일만 해도, 해야 할 일은 항상 밀리고 쌓였다.


답답한 것은 그래도 퇴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집에서는 아이가 건강이 좋지 못한 외할머니의 등에 업혀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말에 남편이 출장을 가버리고 없으면 아이 때문에 출근도 할 수가 없었다. 일은 쌓여있는데.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워킹맘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사는 웃으며 농담처럼 헛소리를 시전 했다. '여직원들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가 없어. 일이나 가정이나, 하나는 내려놔야 돼.'


어쩌라는 거지. 일을 그만두라는 건가. 가정을 내려놓으라는 건가. 같은 입장의 여직원들은 모두 분개했다. 나는 그러면서도 억울했다. 내가 일하는 게 마음에 다 안찬다는 거지. 꼬박꼬박 칼퇴근을 해버리고 주말에는 출근해서 일하지 않으니까. 근데 어쩌라고. 나도 일을 하고 싶은데 일을 할 시간이 없다고.


게다가 언제나 화가 나 있는 악성민원들은 원래도 내게 많지 않던 인내심과 인류애를 모조리 바닥나게 만들곤 했다.


'퇴근길 조심해라, 내가 너 다리 하나는 부러뜨려놓는다.', '내가 아픈데 니가 나 물 한 잔이라도 떠줘 봤냐? 내가 아파서 받은 보험금인데 니가 내 수급비를 왜 깎아? 내가 그냥 죽을 줄 알아? 유서에 너 ㅇㅇㅇ 때문에 죽는다고 써서 언론에 다 퍼뜨리고 너 모가지 날아가게 만들고 죽을 거야!', '내가 너 찔러 죽이러 사시미칼 들고 간다!', '맨날 안된다는 소리만 할 거면 그 자리에 왜 앉아있어? 하는 일도 없이! 당신 근무태만이라고 내가 신고할 거야!'


이런 소리들을 꾸준히 듣다 보면 나도 정상적인 사고가 어려워지는 순간들이 온다. 차라리 정말 그런 일이 벌어졌으면,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진짜로 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좀 일어났으면. 그럼 그걸 핑계 삼아 여기서 도망칠 수 있을 텐데.


이쯤 되면 열정 같은 건 문제도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올해 휴직하기 전, 작년에 근무하던 곳에서도 한참 악성민원들에 시달렸다. 늘 있는 일이라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지만 유독 더 심한 민원이었다. 민원인이 겨우 돌아간 뒤 나도 좀 진정하려고 혼자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갑작스럽게 호흡이 가빠져오면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11년 차로 나름 온갖 악성민원들을 다 겪어봤다고 자부하지만, 민원 때문에 내가 운 것은 신규직원이었을 때 딱 한 번이었고, 그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 조차도 당황스러웠다. 이럴 정도의 일이 아니라는 걸 머리에서 아는데도 심장의 쿵쾅거림은 멈추질 않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공황이 오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됐다. 퇴사.

공무원의 경우, 의원면직.

본인의 의사로 원해서 그 직위에서 물러나는 것.


직장 때려치고 싶다는 말은 인생의 추임새 같은 거라는 말처럼 나 역시 그동안 늘상 습관처럼 해오던 말이었지만, 이제는 정말 뜬구름 잡는 꿈같은 얘기가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아주 진지하고 간절한 희망사항이 된 것이다.


남편은 힘들면 그만두라고 말은 했다. 영혼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만두라고 말을 해주는 게 어딘가. 물론 남편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누구나 다 힘들어, 조금만 참아봐, 지나갈 거야.' 였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말이다.


결국 육아휴직을 했다. 아직 두 아이가 어려서 가능한 일이다. '아이 잘 키우고 푹 쉬었다 돌아와.' 라고 말해주는 것. 조직이 휴직 제도를 확실히 보장해준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고 있다. 이 호사를 지금 누리고 있고.


하지만 휴직을 하고서도 마음은 마냥 편하지가 않다.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건 큰 안정감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족쇄다. 휴직자의 심정은 전쟁 중 잠시 휴가를 나온 병사의 심정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 비약일까. 일단 몸은 쉬고 있는데 이 휴가가 끝나면 다시 돌아가야 할 전쟁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편치 않은. 가끔씩 전쟁 중의 꿈도 꾸는...


아니 사실 이런 건 다 변명들이다. 쓰고 있으면서도 참 구질구질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저런 말들이 자꾸만 길어지는 것은 결국 변명할 거리들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어디서든 자신의 존재를 꽉 붙든 채 의미를 찾고 행복을 쟁취해 나간다. 그게 힘들다면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과 타협하기도 한다. 대부분은 그렇게 순간들을 버티고 또 삶을 살아낸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도 저도 못하겠다고 징징거리고 있는 중이다.


스무살이 넘으면 인생에 남탓을 하면 안된다는데, 나는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핑계거리가 모자라다. 사실은 한 마디면 충분하다. 나는 행복하지 않다고.


며칠 전 남편에게 지나가듯 말했다. '우리 지금 아파트 팔고 ㅇㅇ으로 이사갈까? 그럼 대출 다 갚고 빚 없이 살 수 있는데. 애들 학원은 못보내겠지만 당신 월급으로 우리 네 식구 먹고 사는 생활은 될 거고. 나 일 그냥 그만두면 안될까.' 남편은 또 무심하게 말한다. '그래, 그럼.' 혹시 내가 그러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그러라 하는 걸까. 그렇게까지 계산적인 사람이 아니다. 내가 정말 그러겠다고 결심을 하면 말리지는 못하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라 했을 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남편이 '안돼. 조금만 더 참고 다녀.' 라고 말한다면 나는 남편을 원망하면서 화를 내면서 괴로워 하면서,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또 직장을 계속 다니겠지. 남편이 그러라고 하는데도 아직 못그만두는 건 결국 내 책임이다. 나의 이런 저런 계산들 때문이다.


이제 곧 나이 마흔. 불혹(不惑). 세상 일에 미혹되지 아니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세상 일에 미혹되지 아니하고 싶다. 어디서든 스스로의 존재를 꽉 붙든 채 의미를 찾고 싶다.


장래희망은 퇴사.


세상 모든 꿈들이 바라기만 한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해야만 하는 것처럼, 퇴사의 꿈 역시 그러하겠지.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적어도 20년 전에는 했어야 할 그 고민과 고뇌를 지금이라도 처절하게 해봐야겠다.


남은 삶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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