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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rimi Sep 10. 2021

심연 들여다보기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올해 육아휴직 중인 나의 원래 직업은 사회복지공무원이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의 정체성 중 하나가 대민업무인데, 흔히 알고 있듯이 사회복지공무원은 그 업무 강도가 특히 더 세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내가 소속한 지자체의 사회복지공무원들은 매년 정신건강 선별검사를 받고 있다. (지자체마다 다를 수 있다.)


매년 검사를 받다 보니 대부분 이제는 설문지 응답을 적당히 대충 체크해버리기도 한다. 검사 결과에 따라 센터에 방문해달라는 연락을 받아봤자 어차피 갈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처음으로 선별검사를 실시하게 되었을 때의 나는 깊은 생각 없이 모든 문항에 아주 솔직하게 답변을 했다. 그리고 센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방문해달라는 것이었다. 직무 스트레스나 우울, 불안 등의 항목은 그래도 비교적 평균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자살생각' 수치가 불안정하여 염려스러운 상태라고 했다.


'그렇구나...' 하는 정도였다. 센터에는 가지 않았다. 나는 이미 내 마음 깊은 곳에 언제나 '죽고 싶어 하는 마음' 이 작은 시냇물처럼 졸졸졸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의식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들이 보기에 나는 그저 성실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었을 테고 나 자신 역시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많은 슬픈 순간들을 지나왔지만, 말 그대로 그건 이미 다 지나왔다고, 그 순간들은 이미 시간에 휩쓸려 내 손 안에서는 다 사라진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으면서 앞으로 열심히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나도 남들처럼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고.


그런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은 결혼과 출산이었다. 나는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결혼을 하면서 우울함에 빠졌다. 지극히 사랑하던 남자와 인생 2막을 향한 '희망'의 커튼을 촤라락 하고 펼쳤는데 그 앞에 놓여있던 건 앞으로의 인생도 지금과는 뭐 별반 다를 것이 없으리라는 '현실' 그 자체였고, 그 '진실'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이전까지 내가 살고 있던 진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던 내 나약한 마음이 앞으로의 '희망'을 그동안 지나치게 부풀려놓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결혼 준비 과정에서부터 남편과는 무수히 많이 다투었다. 지금으로서는 나 자신조차도 믿기 힘들지만 우리는 연애를 하던 2년 동안에는 단 한 번의 다툼도 없이 다정한 연인이었다. 그랬던 우리가 결혼이라는 현실을 마주하자,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는 상대를 향해 검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나에게 오랫동안 부재했던 '자상한 아버지'의 존재와 그 역할을 무의식적으로 남편에게 기대하고 또 실망하길 반복하는 바람에 벌어진 비극이기도 했다는 걸 깨달은 건 한참이나 뒤였다.


첫 아이가 태어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원래도 민감한 성격의 나는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극도로 예민해져서 시어머님을 필두로 하는 모든 타인과 외부의 자극을 나를 향한 '통제'로 받아들였다. 당시의 나는 마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속 좀머 씨처럼 그저 이렇게 외치고만 싶었다.


"나를 좀 내버려 두시오!"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걸 보면 아주 사소했던 모양인데, 그 결말은 몹시 처참했던 어느 일요일 오전 남편과의 싸움. 그 마지막 장면은 스스로 가위를 들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린 내 모습이었다.


설명하기 힘든 일이고 정상적이지도 않다는 걸 스스로도 알았다. 다음 날 곧장 예약하고 찾아갔던 심리상담센터에서 나는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조금 부끄러운 듯 겸연쩍은 듯 어색하게 웃으며 이야기했을 것이다. 나를 지그시 응시하던 원장님이 그것을 한 문장으로 해석해주었다.


"죽고 싶었구나. 그런데 죽을 수는 없어서 머리카락을 잘랐구나."


그때서야 나는 내 안에 자리 잡은 '죽음에 대한 갈망'을 마주했다. 그것은 남편과의 갈등, 시댁 식구들과의 문제 그 너머의 것이었다. 이전의 내가 꿈꾸던 동화 같은 희망, '자신을 사랑해야 해' 라든가, '인생은 아름다워' 라거나, '죽을 용기로 살아봐' 따위의 말은 감히 가 닿을 수 없는 내 영혼의 심연이었다.


심연의 나는 수능시험을 망쳐 대학 입시를 포기하는 열아홉 살의 나였다. 어려운 형편에 사립대는 안되니 무조건 국립대에 진학해야 한다는 엄마의 말에 곧장 재수를 하겠다고 말하는 나와 표정이 일그러지던 엄마의 얼굴이었다. 재수학원을 다닐 여력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혼자 공부를 하면서도 자신이 없어 괴로워하던 스무 살의 절망이었다.


심연의 나는 매일 밤 일기장에 '죽고 싶다,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 내일 아침에는 부디 눈이 떠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열다섯 살의 나였다. 왜 이렇게 사춘기가 심하게 온 거냐고 나를 다그치던 엄마의 화난 얼굴도 있었다.


심연의 나는 실을 묶어 이를 뽑으려는데 무섭다고 자꾸 도망가는 내 목을 조르며 차라리 그냥 죽어버리라고 화를 내는 엄마에게 살려달라고 비는 아홉 살의 나였다. 깊은 밤 아팠던 목을 문지르며 콜록대자, 그러게 네가 왜 자꾸 도망을 쳐서 엄마를 화나게 했느냐고 핀잔을 주던 엄마의 목소리였다.


또한 심연의 나는 외삼촌 댁에서 놀다가 실수로 풍선을 터뜨렸다고 엄마에게 혼나며 어두컴컴한 낯선 방에 밤새 홀로 남겨졌던 일곱 살의 나였다. 혼날까 봐 무서워서 어두운 바닥에 조용히 웅크린 채 잠들었던 내게 아침에 되어서야 찾아와, 불이라도 켜지 그랬냐고 되묻는 무심한 엄마의 얼굴이었다.


심연의 나는 누구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였다. 누구도 내 두 눈을 마주 보며 삶이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를 알려주지 않아, 미처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해 그냥 죽고 싶어 하는 소녀였다. 아이와 소녀는 자랐으나 여전히 사랑하는 법도 살아가는 법도 잘 몰랐다. 그래서 어쩌지 못한 채 살다가 한숨처럼 인생의 고비가 찾아오면 그저 괴로워하며 다시금 죽어버리고 싶어 했다.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겨우 심연을 들여다보는 법을 배웠다. 울지 못했던 아이를 위해 지금이라도 울어주어야 하고, 화내지 못했던 아이를 위해 지금이라도 화를 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너는 왜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아서 그런 것 까지 기억하느냐고 화를 내던 엄마는 그제야, 그때 나도 너무 힘들어서 그랬다고, 미안하다며 내 손을 잡고 우셨다. 어른으로 다 자란 나는 이제 늙으신 엄마를 마주 안아줄 수 있게 되었고, 남은 숙제는 아직 심연에 잠겨있는 어린 나를 감싸안는 일이다.


심리상담을 받은지도 벌써 수년이 지났다. 계속 쭉 상담을 받고 종결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시간적 여유도 금전적 여유도 넉넉하지 않아 6개월 만에 멈추었다. 힘들어지면 꼭 다시 오겠다고 원장님과 약속하면서.


아직도 내 심연이 지나치게 깊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간혹 어두운 밤 홀로 깨어있을 때면 이따금씩 밀려오는 외로움과 허무함에 잠겨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도 한다. 나는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과 삶을 살아내는 방법을 더 배워야 하는 어린 아이다.


또한 나는 이제 내가 죽지 않고 잘 살아가야만 할 이유가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 내가 사랑해주고, 어떻게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또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할 어린 나, 또 다른 나 자신, 바로 내 아이들이다.


내 아이들의 영혼에는 부디 나와 같은 상실과 결핍, 상처와 절망 같은 단어들이 새겨지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그러기 위해 내가 내 심연을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달래주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안다. 내 영혼에 새겨진 그 흉터들이 내 아이들에게 또 다른 상처로 다가가기 전에 말이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다시 니체의 잠언을 기억하며 조용히 나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가만히 어루만져본다.


나의 심연이 괴물의 모습을 하고 나 자신을 파괴하지 않도록, 나의 심연이 괴물의 모습을 하고 내 아이들을 다치게 하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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