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구속하는 것의 소중함
소중한 것이 주는 불편함과 불만이 사실은 위장된 행복이라고 한다. 쉽게 예를 들자면 나는 분리 불안이 심한 강아지 포도를 키우고부터 한 번도 혼자 여행을 가거나, 자유롭게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간 일조차 없다. 내 마음대로 즉흥적으로 오랜 시간 외출하거나 외박을 한 적도 없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포도가 있어 생기는 특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불편함을 위장된 행복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 나를 비롯한 견주들은 좀 당연하게 여기는 부분이기도 해서, 이런 반 강제 집순이 생활을 별로 불편하다거나 힘들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 이를 이렇게 간결하게 표현하는 단어가 있다는 것은 얼마 전에야 알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내 개는 노견으로 접어들었다. 내 눈에는 평생 아기일지라도 포도는 앞으로 평생 노견으로 살아야 한다. 아직 쌩쌩한 강아지에게는 미안한 일인데, 벌써부터 겁을 집어먹고 포도가 죽어서 영영 없어지는 꿈을 종종 꾸기도 하며 또 그런 날은 하루종일 불안에 시달린다. 나는 평생 집순이로 살아도 좋으니까 내 강아지가 기어코 오래만 살아 줬으면 좋겠다.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그것이 주는 불편함이 사실은 나를 살게 하는 기둥이었다는 것을 새삼 알아버리는 것이 싫다. 그렇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어리석으며 현재 상황에선 지 생각만 하지. 가끔은 카페에 가서 혼자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는데, 차마 혼자 휘리릭 놀다 올 수가 없어서 아예 커피 머신을 사 버렸다. 분위기 있는 조명을 켜고 카페 느낌 나는 음악을 튼다. 난 포도랑 둘이서 익숙한 장소에서 노는 게 제일 재미있다. 내 소중한 강아지랑 평화롭게 오순도순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