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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엔디 Nov 14. 2024

어느 날 '괴도 루팡'이 되었다

복수혈전

  초등학교 4학년 때 살던 집이 상가 주택이다 보니 2층에 큰 창문이 있었습니다. 창문 앞에는 장롱이 놓여 있고 옆 틈새로 들어가면 도로를 내려다볼 수 있는 작은 공간이 나옵니다. 아이들은 그런 비밀장소를 좋아하잖아요. 작은 수첩을 하나 챙겼습니다. 연필도 하나 준비했고요. 자! 이제 적당히 자리를 마련해서 자세를 잡고 밖을 내려다봅니다. 4687, 9836, 2648, 2849, 6389, 4593,...... 2-3시간 동안 쭈그리고 앉아서 번호를 적습니다. 지나가는 차 번호판 숫자입니다. 어깨가 결리고 다리가 절여옵니다. 다시 지루한 싸움이 계속됩니다. 3479, 1947, 3937,......


  추리소설 '괴도루팡과 셜록홈즈'를 읽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매번 피해 가는 괴도루팡과 주변의 정황과 단서를 예리하게 파악해서 그를 쫓아가는 셜록홈즈의 명석한 두뇌 플레이가 흥미진진합니다. 항상 셜록홈즈는 예상치 못한 단서를 발견합니다. 이웃집에서 우연히 적어놓은 메모, 옷에 묻은 흔적, 지나치는 말 한마디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결국 범인을 잡아내는 훌륭한 단서로 엮어 냅니다.


  '우리 집 앞에서 어떤 사고(?)가 발행하면 누군가의 목격자가 필요하겠지?' 일어나지 않을 사건에 대해 내가 그 단초를 만들어 놓고 싶었습니다. 어떤 날이 될지 모르겠지만, 만약 교통사고나 무시무시한 사건이 우리 집 앞에서 발생하면 '내가 적어놓았어요. 여기 기록이 있습니다. 2:35분에 그 차가 여기를 지나갔습니다.' 결국 범인은 잡히고, 나는 유력한 증인이 되는 것이죠. 그러니 조금 힘들어도 참아야 됩니다. 2:13분 5621, 2:55분 6124, 4:10분 5673,.....




  지금 진행하고 있는 공사는 '오피스텔 신축공사'입니다. 공사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공사소음'문제로 민원이 제기됩니다. 도로가 통제되고, 미세먼지와 소음이 정말 사람을 괴롭게 합니다. 대부분 양해를 구하고 최대한 피해가 발행하지 않도록 관리를 하지만 당하는 사람은 여전히 힘들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찰흙으로 집을 짓지 않는 이상 망치 소리와 기계장비 소리는 불가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이곳은 주거지역이 아니고 '중심상업지역'이다 보니 주변이 사무실 군(群)이라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법적 소음기준도 높다 보니 소음측정을 해도 법적기준에 못 미치기에 특별히 공사에 제동을 걸만한 사유가 없습니다.


  한 민원인이 사무실로 들이닥쳤습니다.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다는 이유입니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가급적 아침에 소음이 발생되지 않도록 하고, 토요일은 공사를 중지하거나 부득이한 경우 소리가 발생되지 않는 공정으로 배치해서 불편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벗드(but), 그 민원인은 사무실 입구에서 자리를 비키지 않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가 왜 이 공사 때문에 피해를 받아야 합니까? 나는 저녁에 일을 하고 아침에 잠을 자는 사람입니다.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공사 끝날 때까지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 주세요!" 길 건너편 오피스텔에 투숙하고 있다고 하면서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른 곳에 '숙소'마련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물론 거절했습니다.


  저녁에 일을 하고 아침에 잠을 자야 하는데 망치소리가 들리니 얼마나 힘들까요? 그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숙소'를 제공해 주는 것은 시공자가 책임져야 할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기에 당연히 안 되는 것입니다. 그날 이후 앙심을 품은 그분은 건너편 건물에서 매일 날짜별로 사진을 찍어 '안전모 미착용'으로 구청과 노동부에 지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합니다. 소음이나 기타 다른 것들은 법적으로 크게 문제 되는 것이 없기에 '건설안전규정'을 들어 복수(?)를 하는 것이죠. 현장 안전관리자로 그분을 임명해야 할 판입니다. 어제는 구청 담당자에게 또 전화를 받았습니다.


"계속 민원을 넣으시는 분이 '동영상'을 촬영해서 보내옵니다. 저도 봤는데 작업자들은 모두 안전모를 착용하는데 도면을 갖고 다니시는 분이 모자를 안 쓰셨네요. 관리자도 꼭 안전모 착용이 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세요."

"네, 잘 알겠습니다. 요즘 특히 현장지도를 잘하고 있는데 관리 팀장이나 하도급 업체에서 모자를 안 쓰고 현장에 들어가셨던 것 같습니다. 더욱 주의해서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도 셜록홈즈는 카메라를 켜고 단서(端緖)를 잡기 위해 동영상을 찍고 있습니다. 저는 조그마한 단초(端初)도 제공할 수 없습니다.

어릴 때는 '셜록 홈즈'였는데......
지금은 '괴도 루팡'이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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