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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압축된 삶

화양연화(花樣年華)

내 마음에 명령하기

by 위엔디

실용음악을 전공하는 아들이 요즘 한창 물이 올랐다. 밴드 정기공연에 개인 레슨,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초청받아 공연하느라 눈코 뜰 새 없다. 청소년 캠프 찬양팀 사역에도 열심히 뛰고 있는데, 그 와중에 이번 학기 학점까지 챙기며 장학금도 받아냈다. 며칠 전 인스타그램에 올린 연주 영상은 조회수 3,000을 넘어섰고, '멋지다'는 말을 귀에 닳도록 듣고 있다. 요즘 녀석의 등짝에는 날개가 활짝, 그야말로 뿜뿜이다.


"오~ 요즘 우리 아들 인생의 황금기네!"
가족 단톡방에 그렇게 찬사를 날렸더니, 아들 녀석 답장이 걸작이다.
"아직 황금기는 시작도 안 했어요! 앞으로의 여정을 기대해 주세요. 이제 한 발자국입니다."
"오~ 젊음의 패기!"



금요일 저녁이면 교회 청년들이 하나둘 주보사로 모여들었다. 컴퓨터가 흔하지 않던 시절, 우리는 청년예배 시간에 나눠줄 주보를 손글씨로 만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 도안을 꾸미는 사람, 원고를 준비하는 사람, 그리고 정성스레 글씨를 써 내려가는 사람들까지—각자 맡은 역할이 분명했고,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그 가운데 28살의 나는 기자팀장이었다. 주보에 실릴 원고를 모으고 정리하며, 직접 글을 쓰는 일이 내 몫이었다.


가끔은 마음대로 상상하고 꿈을 꾸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처음 만나는 자연 앞에서 눈을 반짝이던 그때, 나의 자아가 움트기 시작하던 유년시절—그 시간이 내 첫 번째 화양연화(花樣年華)였다면, 두 번째 화양연화는 단연코 교회에서 청춘의 대부분을 보냈던 20대의 청년 시절이 아닐까 싶다. 썸도 있고, 쌈도 있지만 풋풋한 청춘자체가 아름다운 시기다. 얼마 전 아내와 중국영화《첫사랑 엔딩 ; 원제: 念念相忘》이라는 영화를 봤다. 오글거리는 멜로드라마는 잘 안 보는 편이지만, 여주인공이 예쁘니 일단 몰입(?)이 잘 되긴 한다. 과연 청춘은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때로는 아프고 넘어져도, 순수함과 설렘이 그 모든 순간을 빛나게 하는 시기가 아닐까.


아내를 위해 영화관도 통째로 빌렸다. ㅎㅎ 그 증거 사진을 올려본다.


인생에는 누구에게나 화양연화 같은 계절이 있다. 청춘의 날개가 활짝 펼쳐질 때도 있고, 날갯짓이 무겁게 느껴지는 시절도 있다. 빛나는 시간은 찬란해서 좋지만, 그늘진 시간 또한 우리를 깊어지게 한다. 어쩌면 황금기는 찬란함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지나며 꺼내 드는 소망 속에도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인생은 늘 한쪽 면만 보여주지 않는다. 아들이 지금 누리는 황금기를 바라보며, 나는 청춘의 화양연화를 떠올렸지만, 그 시간의 뒤편에는 언제나 현실의 무게가 함께 있었다. 날개가 활짝 펼쳐질 때가 있었듯, 다시는 펴지지 않을 것만 같은 순간도 있었다.


결혼 후, '가난'이라는 단어는 내게 자주 '굴레'를 떠올리게 한다. 벗어나고 싶어도, 그 족쇄는 생각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질겼다. 마치 한강의 『채식주의자』 속 영혜처럼, 혹은 영화 《빠삐용(Papillon, 1973)》의 스티브 맥퀸처럼,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지만 끝내 부서지지 않는 감옥과도 같다. 때론 삶이, 그토록 질긴 굴레를 견디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무게 속에서, 나는 무엇을 붙들어야 할까? 내 마음 속에서 불안과 낙심이 일어날 때, 나는 시편의 저자처럼 내 영혼에게 말해본다


我的心哪!你为何忧闷?为何在我里面烦躁?应当仰望神,因我还要称赞他。他是我脸上的光荣(原文作 “帮助”),是我的神。(诗篇43: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편 43:5)

'살아가는 것'과 '살아 내는 것'의 모호한 경계 속에 아무 낙이 없다고 여겨질 때, 다시 한번 시편의 저자처럼 내(我)가 내 마음(我的心)에게 명령하고 외칠 수 있기를 소원한다. "他是我脸上的光荣,是我的神 그는 내 얼굴의 영광이며 나의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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