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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Dec 16. 2021

21세기 귀족(29)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4세기. 부동산제도는 이제 노예제도다)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29) :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4세기. 부동산제도는 이제 노예제도다) -


4세기


4세기에 이르러 지주계층의 경제사회적 지위는 더 높아져서 로마 정무관 및 원로원 의원들의 정책에 막대한 입김을 불어넣었을 정도에 이르렀다.[1] 더불어 기독교를 공인하고 본격적으로 성직자와 교회의 공권면제특권[2]을 주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후에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재위 364~375)는 예속농 등의 민중에겐 억압적 정책과 법을 베풀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인 332년에 지주는 예속농이 도주할 의심만 들어도 쇠고랑을 채울 수 있는 처벌권을 부여받았고, 365년에는 지주의 허락 없는 예속농의 재산양도가 금지되었으며, 371년에는 지주가 예속농의 세금을 징수할 의무 겸 권리가 부여되었다. 그에 더불어 396년에는 예속농이 지대인상의 문제 외에는 지주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412년의 한 법률은 이단으로 규정된 도나투스파를 근절하기 위한 수단이기는 했지만 지주에게 콜로누스를 구타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다.[3]


또한 발렌티니아누스는 지주가 토지와 소작인들을 분리하여 매매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하기도 했다. 지주들은 그들에게 농경 이외의 군사 및 행정업무 또한 떠넘기기도 했다. 자신이 내야할 세금을 예속농에게 전가시키기도 했다.[4] 이로써 토지의 매매가는 해당 토지와, 그 토지를 소작하고 있는 예속농들의 몸값까지 합하여 전보다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자연스레 지주권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지고 강화되었다. 약 천년 전 그들의 로마 선조들의 토지사상으로도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폭거였지만 농노들이 이를 거부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들의 생계가 지주들의 토지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었다.(오늘날 21세기도 그러하다) 이로써 토지 없는 로마 시민은 그나마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었던 권리도 사라졌다. 타인과 외부로부터 독립되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권마저 박탈당한 것이다.


민족만 바뀌었을 뿐 사상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강력하고 자유로운 지주권의 행사는 합법이다, 정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는 로마적 토지사상은 계속 이어졌다. 시간이 흘러 유럽의 농노들이 받았던 대우 방식은 게르만 지배 계층과 지주들이 이러한 로마 사회상에서 배운 것들이었다.[5] 언급했듯 396년에는 통상적인 수준을 크게 벗어난 지대를 요구하는 경우에는 농노가 지주에게 민사소송을 걸 수 없는 법이 만들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은 409년부터는 위 법이 일반적인 소작인에게도 적용되었다.[6]


구체적으로 당대의 인민들의 생활상을 두 눈으로 보았던 사람들의 증언도 많이 있다. 당대를 살았던 학자 테미스티우스(Themistius, 317~390)는 4세기 중에 40년 간 세금이 2배 늘었다고 했는데, 지주들은 징세관리인들과 은밀히 손잡고 탈세를 할 수 있었으나 힘없는 하층민들은 신음했다.[7] 4세기 대표적인 교부이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크리소스토무스(347?~407)는 이렇게 말했다.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12세기 모자이크화(Anderson—Alinari/Art Resource, New York.)


지주들은 농민들에게 점점 계속되는 견딜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소작료를 부과했고, 고된 노동을 요구했다. (중략) 농민들이 서리와 비가 내리는 추운 겨우내 온 종일 고생하면서도 빈손으로 돌아오며 일과를 보낼 때보다 더 비참한 장면이 어디 있겠는가! 또한, 부채로 인해 이러한 비참함이나 굶주림보다 더한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토지 관리인들, 압류, 독촉창, 체포,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강제노동으로 고통받았다.[8]


7세기까지 로마-유럽 사회는 노예제가 중심적인 생산양식이었으나,[9] 농노제도가 노예제도의 공백을 착실하게 메우고 있었다. 게다가 농노제는 명백하게 노예제만큼이나 지주들에게 지배 계층에게 유리한 제도였고 더욱 유리하게 변형도 가능했으니 그들도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크리소스토무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교부 암브로시우스는 이런 그의 저술 『나봇이야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스테인드글라스로 그려낸 암브로시우스 (photo : jorisvo/Fotolia.)


나봇 이야기는 옛날 일이지만 날마다 벌어지고 있습니다. (중략) 어떤 재벌이 가난한 사람을 그 작은 밭에서 내쫓지 않으며, 궁핍한 자를 조상의 땅 끝자락에서 몰아내지 않습니까?. (중략) 어떤 부자의 영혼이 이웃의 재산을 차지하려는 열망으로 불타오르지 않습니까?...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기 땅을 넘겨주고 (중략) 드넓은 저택이 그대를 우쭐하게 만듭니까? (중략) 이 부끄러운 저택조자 그대들을 일꺠우지 못합니다. 그대들은 집을 지음으로써 그대들의 재산을 더 불리고 싶겠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중략) 다른 사람들은 끼니를 이어 갈 양식조차 없는데, 그대는 값비싼 장신구들을 끔찍이도 좋아합니다. (하략)[10]


 과거 3세기에는 빈자들이 외적과 군사⋅정치적 혼란을 피해 땅을 버리고 제국 지방 곳곳에서 공권력을 사적으로 휘두른 실력자들의 그늘 밑으로 들어갔지만, 이 시대 4세기부터는 국가의 막대한 징세를 피해 땅을 버리고 대도시로 향했고, 일부 대농장은 자경단을 만들어서 정부의 군사력에 의존하지 않고 자력으로 외적에 대비했다.[11]


 4세기 말에는 그동안의 부패 관료의 횡포 등으로 인해 생계유지가 더욱 힘들어진 인민들은 군의 지휘관, 행정관 등에게 자신들의 토지를 바치고 스스로 소작인의 지위로 낮아지려는 경우가 잦아졌다.[12]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예속되어 있는 계층이 지주 등의 그늘 밖으로 벗어나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힘든 일이 되었는데, 그나마 지주에게 예속되어 사는 것이 외적 칩임으로 로마의 망국을 한 세기 앞둔 극도로 혼란한 시대에 목숨을 담보로 자작농으로 사는 것보다 안전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먼 과거에는 국가 공유지 임차인에게는 10%여서 사실상 자작농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이 시대에는 예속농이 임차인이나 국가에게 바치는 지대 및 세금의 비율은 계속 커져서 이 시대에는 공유지나 사유지의 임차인은 50% 정도까지, 자작농은 25~30% 정도를 내게 되었다.[13]


 결국 지주 1인이 수많은 농노를 거느리는 사회가 도래했다. 이렇게 로마에서 인민들이 떠나고 버려진 땅은 주변 대지주들이 흡수했고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토지양극화는 더 심화되었다. 공화정 성립 때의 토지 소유는 부를 불렀고, 그 부는 만족을 모르고 수백 년이 지나서도 몸집 불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한때 그라쿠스 형제와 카이사르 등이 토지양극화를 해소하여 자작농과 중산층 육성하려 했던 로마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꿈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독일의 중세 교회가 한때는 독일 국토의 1/3을 차지할 정도의 대지주였다는 것이 잘 알려진 데 반해, 그 전에 이미 이 로마시대에 몇몇 인민들은 대지주 교회의 토지에 자발적으로 예속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역사다. 재차 확인하겠지만, 중세의 여러 사회상은 위와 같이 로마 제정기 및 말기에서 배우고 답습한 것이었다. 물론 로마 이전에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의 성직자 계층도 막대한 지주였으니, 정도의 차이일 뿐 이는 토지양극화로 인한 역사의 반복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로써 지방의 실력자들은 그 영향력이 커지고 황제를 중심으로 한 제국의 중앙권력은 그 힘이 약해져 갔으며 결국 395년, 동서로 완전히 분할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로마 4세기를 살펴보았다.


(1) 부동산 임차인들을 농노/노예로 여기는 것도 모자라, 부동산 소유주들은 그들을 자신의 부동산 가격을 올리는 상품으로 여겼다. 오늘날 부동산 가격을 올리기 위해 임차인들의 임대료를 더 올리고 쥐어짜내는 행위와 다를 바 무엇인가?


(2) 서양사 최강의 국방력을 자랑했던 과거는 사라졌다. 올바르고 평등하고 정의로운 토지사상이 소멸됨에 따라 로마는 외적의 침입에도 쉽게 흔들리고 백성들은 허덕이며 흩어졌다. 로마의 동서분할의 핵심 원인은 이에 있었다.


이제 로마의 부동산제도는 노예제도다. 이 제도를 중세 게르만인들이, 근대 유럽인들이, 그리고 당신이 상속 받았을까? 계속되는 글에서 명백하게 확인하게 될 것이다.


References


[1] Max Kaser/윤철홍 옮김, 『로마법제사』(법원사, 1998), 115쪽.

[2] 공권면제특권(immunitas) : 중앙정부에 대하여 납세의 의무 등을 면제받을 수 있는 특권.

[3] 이기영, 『고전장원제와 봉건적 부역노동제도의 형성』(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151쪽.

[4] Perry Anderson/유재건 & 한정숙 옮김, 『고대에서 봉건제로의 이행』(현실문화연구, 2014), 143쪽.

[5] 이기영, 『고대에서 봉건사회로의 이행』(사회평론아카데미), 2017, 94쪽; 이기영, 『고전장원제와 봉건적 부역노동제도의 형성』, 188쪽.

[6] A. H. M. Jones, The later Roman Empire, 284-602: A Social Economic and Administrative Survey, 2 vols, (Norman, Oklahoma: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1964) 1:358; 김유준,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제사상 연구』(희망사업단, 2015), 38~39쪽에서 재인용.

[7] 김진경, 김봉철, 최자영, 백경옥, 송문현, 오흥식, 차전환, 김경현, 신미숙, 최혜영,『서양고대사강의』(한울아카데미, 2008), 377쪽.

[8] John, Chrysostomus, In Matthaeum Homilia 61-63, PG58: 630, 김유준, “크리소스토무스의 경제사상”, 「신학사상」(2016), 180쪽에서 재인용.

[9] 이기영, 『고전장원제와 봉건적 부역노동제도의 형성』, 188쪽.

[10] Ambrosius, 『나봇이야기』, 1.1; 김유준, “암브로시우스의 사회교리”, 「신학전망」(2018), 79쪽에서 재인용.

[11] 시오노 나나미/심석희 옮김, 『로마인 이야기 13』(한길사, 2004), 119쪽; 시오노, 『로마인 이야기 15』(힌길사, 2007), 83쪽.

[12] 김진경 외, 전게서, 379쪽.

[13] 시오노/심석희 옮김, 『로마인 이야기 15』(힌길사, 2007),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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