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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오스 이비 Apr 09. 2022

옆집에 누가 살고 있나요?

늦은 밤 집으로 귀가하는 한 젊은 여성을 지하철 역에서부터 따라오는 남자가 있었다. 복도식 아파트에 사는 여성의 복도까지. 위협을 느낀 여성은 다급하게 초인종을 누르며 문을 열려고 하는데 문은 잘 열리지 않았다. 그 순간 "쾅" 소리와 함께 옆집에서 '아빠야~'하고 그 남자를 반갑게 맞이했던 예전 공익 광고가 생각난다.


당신의 옆집에는 누가 살고 있나요? 

그들과 잘 지내고 있나요?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통상적으로, 대도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시골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비해 이웃 간에 유대 관계가 약하다. 분명 같은 공간에 인구 밀도는 대도시가 훨씬 높은데도 말이다. 


도시에는 다양한 직업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매우 다양한 출신들의 사람들이 모여서 살고 있다. 글로벌 시대에 걸맞게 외국인이 옆집에 사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더군다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일하는 장소도 다 제각각이다. 일하는 시간도 365일 24시간 업종이나 업무 특성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그러다 보니 출퇴근 시간에 마주치는 사람 또한 제한적이다.  


그에 반해 시골은 대부분 아버지가 살던 집에서 살고 있으며, 옆집 뒷집 앞집과는 어렸을 적부터 잘 알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같은 학교에 다녔고 또 상당수는 직업도 같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웃 주민이 곧 학교 동문이자 직장 동료다. 그만큼 끈끈한 관계로 얽혀있어 이웃과 잘 지낼 수밖에 없는 정말로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그런 관계이다.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도시는 직업과 하는 일이 다르고 출신이 달라도 이웃 간에 접촉할 일이 많았다. 담을 사이에 두고 살다 보니 담장 너머로 옆집에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빨래 줄에 널린 이불이나 옷 등을 보고 연령 대나 가구 수를 유추할 수 있었고 가끔 마당에서 활동하면서 서로 눈이 마주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담벼락이 높고 마당이 없더라도 눈이 오면 집 앞에 쌓인 눈을 쓸면서 자연스럽게 접촉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의 아파트에서는 담장이 없어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잘 모른다. 눈이 와도 경비아저씨가 쓸어 옆집 사람들과 접촉할 일도 별로  없다. 그래서 도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 내 이웃이 누구인지 잘 모른 채 그냥 사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이웃과 안면을 트고 지내는 경우는 아이들이 있는 경우다. 영유아 때 유모차를 끌고 산책을 하며 

자연스럽게 얼굴을 익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학교에서 본격적으로 누구 엄마, 누구 아빠, 누구 할머니, 누구 할아버지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들의 부모 모임 등을 통해 직접 친목을 다지기도 한다.  


하지만 저조한 출산율로 아이들을 통한 이웃과 친목 도모 역시 그들만의 모임이 되고 있다.  명절이 되더라도 부모 집에 가거나 국내나 해외로 여행을 떠나 이웃 간 명절놀이를 할 사람도 없다. 예전에는 초등학교 운동회가 마을 잔치였는데 그마저도 사라졌다. 


이처럼 우리는 이웃과 소통할 거리가 사라지면서 이웃 간 연대도 약해지고 있다.  


급하게 아이를 잠깐 돌봐주는 일이나 여행을 갈 때 반려동물에 밥을 주는 일 등 예전에는 옆집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부탁하던 일도 이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상황에 발맞춰 각종 돌봄 서비스들이 늘어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이웃 간 연대를 더욱 약화시킨 하나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웃 간의 연대가 약해지고 이웃 간의 소통을 하지 않으면 이웃은 더 이상 이웃이 아닌 그냥 내 주위에 사는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상관없지만 나에게 피해를 주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그냥 내 주위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된다.


같은 아이의 울음소리라도 내가 알고 있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내가 모르는 나와 아무 상관없는 아이의 울음소리와는 내가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정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만약 내가 잘 아는 심지어 내가 귀여워하는 ‘개똥이’라는 아이가 운다면 ‘개똥이가 오늘은 유난히 더 우네, 어디 아픈가?’라고 조금은 걱정하며 측은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가 운다면 나에게는 그냥 시끄러운 소음이 될 뿐이다. 


그래서 심심찮게 9시 뉴스나 포털 사이트의 메인을 장식하는 기사로 이웃 간의 갈등을 통한 사건사고들이 차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사들로 우리들은 현관문을 더욱 굳건히 닫으며 초인종이 울려도 아무도 없는 것처럼 대답도 하지 않고 아이들에게는 집에서 절대로 뛰지 말라고 하며 놀이터에서 안면이 있더라도 절대로 따라가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우리들의 마음에 벽을 견고히 쌓으면서 이웃 간의 거리를 벌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즐겁고 행복한 삶일까?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사는 것이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방해받지 않아 그리 나쁘다거나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정말 아주 가끔 외롭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인간미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이는 아마도 우리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지만 혼자서는 매우 약한 존재.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회를 구성하는...


그래서 아무리 이웃 간의 연대가 약해지고 애써 노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혼자서는 절대로 잘 살 수 없다. 특히 이웃 간에 불편한 관계라면 더욱더 잘 살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이웃과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살갑게 먼저 다가갈 필요는 없다. 그냥 엘리베이터에서 복도에서 계단에서 마주쳤을 때 가볍게 인사를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최소한 옆집에 누가 사는지는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얼굴이라도. 물론 코로나 시대에 마스크를 쓰고 다녀서 온전히 얼굴을 알기 어렵지만... 그래도 이웃은 이웃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알고 지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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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kka5seb/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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