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도구 : 철학과 문학 - 구조주의 역사와 관점에서 비평하기
고려시대 한문수필인 『괴토실설』을 읽다가 문득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떠올렸다. 시대와 장르조차 전혀 관련 없는 두 작품이 도대체 어떻게 연결된다는 말인가?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토실'과 '지하실'이라는 공간에 주목해 보았다. 우선 그동안 몰랐던 구조주의에 대해 더 공부하고, 이를 통해 두 작품의 연결고리를 이어보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현상의 이면에는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데아’를 찾으려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는 것에는 목적이 있으며,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다. 기독교에서도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는 것을 선이라고 한다. 기독교 외에 모든 종교도 본질적인 진리를 전제하고 이를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생각은 중세와 근대를 거치며 매우 긴 역사를 이어왔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 이성을 중심으로 개인의 합리적 판단을 강조하는 철학이 중심이 된다. 특히 20세기 초반에는 "모든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주장처럼,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스스로 삶의 의미를 선택한다고 믿게 되었다. 이렇게 유물론적인 실존주의 철학이 유행하면서 불변하는 본질을 찾기보다는 개인의 실존적 선택과 책임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해도, 인간이 언어와 문화라는 틀을 벗어나 완전히 독립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주장이었다. 이에 따라 일부 철학자들은 본질은 아니더라도,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는 구조가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것이 바로 구조주의가 시작된 이유이다.
구조주의는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언어 이론에서 시작되었다. 소쉬르는 언어를 기호(sign)의 체계로 보았고, 기호는 '기표(signifier, 소리나 문자)'와 '기의(signified, 의미나 개념)'가 결합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 결합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속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어, 어떤 나무를 가리키는 개념(기의)은 한국어로는 ‘나무’, 영어로는 ‘tree’라고 부르지만, 이 말들이 처음부터 정해졌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언어는 자의적(arbitrary)이라고 말한다.
또한 언어의 의미도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의 차이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이 ‘차이’라는 개념은 소쉬르의 언어학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예를 들어 ‘발’과 ‘팔’은 단 한 글자 차이이지만, /b/와 /p/라는 자음 차이로 완전히 다른 뜻이 된다. 이런 원리는 단어의 체계에서도 뚜렷하다. ‘남자’라는 단어는 ‘여자’가 있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지고, ‘선(善)’이라는 말도 ‘악(惡)’이라는 말과 대비될 때 의미가 드러난다. 즉, 어떤 말의 의미는 다른 말과의 상대적인 차이를 통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쉬르는 “언어는 기호의 체계이며, 그 의미는 기호들 간의 차이와 구조 속에서만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생각은 하이데거가 말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과 비슷한 점이 있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기 때문에 언어가 생긴 것이 아니라, 먼저 언어가 만들어지고, 그 언어 안에서 사고와 인식이 형성된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한국어는 ‘나비’와 ‘나방’이라는 단어가 있어서 둘을 구별하지만, 영어에서는 ‘butterfly’로만 부르기 때문에 두 존재를 따로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예는 많다. 농경 사회에서는 비의 종류를 표현하는 말이 다양하고, 에스키모인들은 눈의 종류를 아주 자세히 구별하는 단어를 갖고 있다.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보'라고 7가지 색으로 구분해서 부르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보인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틀 속에서 사물을 인식하고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소쉬르는 언어를 이해할 때 두 가지 시간 개념을 구분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나는 통시적 관점으로 언어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시적 관점으로 어떤 한 시점의 언어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는 공시적 관점을 더 중시했고, 이 생각은 나중에 구조주의 연구자들의 방법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의 언어와 문화를 분석할 때, 그것이 나타난 특정 시점의 구조와 차이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연구했다. 이는 바로 소쉬르가 언어를 공시적으로 분석했던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소쉬르의 언어학은 단순히 언어를 이해하는 도구가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만든 사회 구조를 분석하는 방법이 되었다. 특정 시대와 지역의 언어 구조를 연구하면, 그 사회의 문화와 사고방식도 이해할 수 있고, 다른 문화와 비교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소쉬르의 생각은 이후에 등장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 자크 라캉의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미셸 푸코의 권력과 지식 이론 등으로 이어지며, 구조주의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여러 학문에 영향을 주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2009)이다. 그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자라면서 철학과 법학을 공부했고, 1935년 브라질 상파울루 대학교에서 사회학 교수로 일하게 되면서 브라질 주변의 현지 조사를 시작하여 그들의 문화, 신화, 가족 구조, 언어 등을 살펴보았다. 문화의 다양한 요소들을 언어와 같은 규칙이 있는 구조로 보고, 그 속에 담긴 구조와 차이를 분석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인류학이 단순한 현장 보고를 넘어, 문화 속에 숨어 있는 규칙을 찾는 이론 중심의 학문으로 발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원주민 사회의 친족어를 분석하고 서구 사회의 친족어와 비교하여, 이들의 언어 구조와 사고방식이 서구 사회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 주목했다. 표현 방식은 달라도, 의미를 만들어가는 방식은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인류학은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서양은 ‘진화한 문명’이고 식민지는 ‘미개한 사회’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었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생각에 반대했다. 그는 문화의 차이는 진화에 따른 우열이 아니라, 서로 다른 구조의 표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문명과 미개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해체하고, 모든 문화를 동등하게 보려는 파격적인 시각을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구조주의 인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흐름을 만들었고, 그 시작을 알리는 책이 1955년에 나온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이다.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문명 비판, 철학적 사유, 언어에 대한 통찰 등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책으로 평가된다.
구조주의는 언어학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문 분야로 확장되었다. 구조주의 사회학, 구조주의 심리학, 구조주의 경제학, 구조주의 생물학 등으로 영향력을 넓힌 것이다.
구조주의 사회학에서는 특히 마르크스주의와 연결되어, 사회의 계급 구조와 이데올로기(생각이나 신념의 체계)가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를 분석했다. 심리학에서는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 구조주의적 정신분석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프로이트의 이론에 구조주의의 생각을 더해, 인간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구조 안에서 거울단계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거치면서 자아를 형성한다고 설명했다.
경제학에서도 구조주의적인 시각이 등장했다. 경제 활동 역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구조와 규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점을 강조했다. 심지어 구조주의 생물학이나 사회생물학에서는 인간의 행동과 사회 제도까지도 진화나 생존을 위한 구조 안에서 생겨났다고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런 흐름들을 종합하면, 구조주의는 ‘본질이 무엇이냐’를 묻기보다는, 우리 사회를 이루는 보이지 않는 틀과 규칙을 찾아내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구조는 한 번 정해지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그래서 구조를 알아내고 그것을 분석하거나 해체하면, 사람들은 새로운 시각이나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푸코는 현대 철학에서 구조주의의 영향력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철학자로 꼽힌다.
미셸 푸코와 권력의 구조
미셸 푸코(1926~1984)는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다. 그는 지식, 권력, 감시와 처벌같은 개념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인문학과 사회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구조주의자로서, 기존 철학이 '진리'와 '본질'을 찾는 데 집중했다면, 자신은 보이지 않는 규칙과 구조, 특히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대표작 『감시와 처벌』에서는 예전에 사용하던 공개 처형과 형벌 대신, 근대 사회에서는 감옥이나 학교, 병원, 군대처럼 사람들을 조용히, 하지만 강력히 통제하는 제도가 생겨났다고 말한다. 겉으로는 사람들을 교육하고 치료하는 곳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개인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제레미 벤담이 설계했던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감옥 모델을 예로 들었다. 이 구조는 감시자가 한가운데에서 모든 죄수를 볼 수 있지만, 죄수는 자신이 감시당하는지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죄수는 스스로 감시받는다고 느끼며 자율적으로 행동을 조심하게 된다. 푸코는 이런 구조가 권력을 더욱 효과적이고 강화한다고 설명했다. 우리주변에 널린 CCTV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현대 사회의 권력은 더 이상 눈에 보이는 폭력과 명령이 아니라, 규칙, 공간처럼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것이다. 푸코는 이런 생각을 소쉬르의 언어학과 구조주의 방법론과 연결했다. 소쉬르가 언어를 단지 말의 모음이 아니라 차이와 규칙의 체계로 보았듯, 푸코도 사회 구조가 표면 아래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 것이다.
결국 푸코는 우리가 보고 듣는 현실이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진 권력이 만들어 놓은 결과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푸코는 구조주의 철학자로 분류되기도 하고, 동시에 이후 포스트구조주의의 시작점이 된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구조주의적 관점은 표면적인 현상 아래에 숨어 있는 질서와 구조를 파악하려는 시도다. 이 관점은 인간의 행동이나 생각을 개인의 선택으로 설명하지 않고, 그 사람이 속한 사회와 문화의 구조 속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이러한 접근은 문학이나 영화처럼 이야기를 담고 있는 텍스트를 분석할 때 유용하게 쓰인다. 이러한 예로 이규보의 한문 수필 『괴토실설』과 영화 『기생충』을 활용해서 설명해 보자.
먼저 『괴토실설』을 살펴보자. '괴토실설'은 고려 무신정권의 문인관료였던 이규보의 한문수필이다. 일명 '설(說)'이라는 장르로 분류된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규보의 설(說)이 여러 개 소개되는데, '이옥설', '슬견설', '경설'과 같은 작품이 더 있다. 설(說)은 경험을 토대로 일반적인 깨달음을 드러내는 2단 구조로 이루어지는데, 이야기 구조가 간단하지만 자칫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가능성도 높다.
10월 초하루에 이자(李子)가 외출했다가 돌아오니 어린 종들이 땅을 파서 움막을 만들고 있었다. 그 모양이 무덤 같았다. 이자는 아무것도 모른 체하고 말했다. "어인 일로 집에 무덤을 짓느냐?" 어린 종들이 말했다. "이건 무덤이 아니고 움집입니다." "움집은 무얼 하려고?" "겨울에 화초나 채소를 갈무리하기에 좋고 또 길쌈을 하는 부녀자들이 비록 혹독하게 추운 때라도 이곳에서는 봄 날씨같이 따뜻해서 손이 얼어 터지지 않으니 참 좋습니다."
이자가 더욱 노해서 말했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것은 사계절의 한결같은 이치이다. 만일 이에 반하면 괴이한 일이 된다. 옛 성인이 만든 제도는 추우면 갖옷을 입고 더우면 베옷을 입도록 마련하였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또다시 움집을 만들어서 추위를 더위로 돌린다면 이는 하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다. 사람은 뱀이나 두꺼비가 아닌데 겨울에 굴에 엎드려 지낸다는 것은 이보다 상서롭지 않은 것이 없다. 길쌈은 제 때가 있는데 하필 겨울에 하느냐? 또 봄에 꽃이 피고 겨울에 시드는 것은 초목의 한결같은 성질인데 만일 이에 반한다면 또한 철을 어긴 물건이다. 철을 어긴 물건을 길러서 때에 맞지 않게 즐긴다면 이는 하늘의 권리를 빼앗는 일이다.
이는 모두 내 뜻에 맞지 않는다. 너희가 빨리 헐어버리지 않는다면 내 너희를 용서하지 않고 때리겠다." 어린 종들은 두려워서 얼른 헐어버렸다. 그 재목으로 땔감에 쓴 뒤에야 마음이 비로소 편안해졌다.
이규보『괴토실설(토실을 허문 이야기)』
우선『괴토실설』의 본문을 의미 대립의 구조로 도식화 보자. 이렇게 보면 『괴토실설』은 명확한 대비구조를 통해 노장사상에 기반한 자연 순응의 철학을 주장하는 듯 보인다. 실제 이규보는 노장사상에도 상당히 깊은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이 수필은 현대 과학기술의 급발진을 비판하고 성찰하자는 주제로 교과서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요즘 같은 인공지능의 시대, 특이점에 대한 두려움이 많아지는 시대에는 이와 같은 글이 현대사회에 던지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러한 표면적인 주제 외에도, 고려시대 무인정권의 폭력적인 지배구조를 정당화하는, 지배층의 통치구조를 내면화하는 수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규보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은 추운 것이 자연의 순리이며, 이를 거스르는 것은 하늘의 질서를 어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움막을 짓는 종들과 부녀자들의 적극적인 행위를 강하게 꾸짖고는 급기야 "때리겠다"는 위협도 서슴지 않는다.
이 무슨 꼰대같은 짓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자연친화적 태도를 가장한 권위주의적 태도이며, 하층민들의 생존과 변화에 대한 의지를 억압하는 정치적인 의도로 읽힌다.
우선 『괴토실설』은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 간의 구분과 착취가 드러난다. 이 글에서 등장하는 ‘토실’은 단순한 겨울 움막이 아니라 하층민의 생존 공간이자 노동 공간이다. 그러나 이 공간은 상층계급의 명령에 의해 철거되고, 그 재료는 지배자의 난방을 위한 땔감으로 전용된다. 이는 하층민의 생존 수단이 지배계층의 안락을 위한 자원으로 ‘전유’되는 노동력과 자원의 착취구조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괴토실설』은 당대의 권력 구조를 재생산하고 내면화하는 텍스트(기호)로 해석될 수 있다. 무신정권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군대식 권위와 복종, 상명하복의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내면화시키고 무신정권의 권위주의적 질서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괴토실설』은 바로 그 ‘권력 구조의 언어’로 기능하며, ‘질서’라는 이름 아래 무신들의 지배 권력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포장된다. 즉, "자연의 이치"라는 논리는 실제로는 지배 권력의 질서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였던 셈이다.
이를 다시 '기표'와 '기의'의 관점으로 확대 해석하면, 표면적 주제(기표)로는 '자연의 이치를 따르자'는 노장사상의 본질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면적 주제(기의)로는, 작가 이규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고려 무인정권 시대의 잔인학고 폭력적인 지배구조를 스스로 정당화하는데 일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의 관점에서 보면, 『괴토실설』의 감시와 처벌은 고전적이다. 이자(이규보)는 자신의 권위를 전면에 드러내어 명령하고, 따르지 않으면 매를 들겠다고 말한다. 이는 권력이 물리적 폭력을 통해 피지배층을 통제하는 전통적인 규율 권력의 형태를 보여준다. 하지만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처벌 방식은 부작용을 낳는다. 이규보와 같은 명령과 처벌 방식은 오히려 권력자의 위선과 잔인함을 폭로하고, 억압받는 자의 저항 정신을 드러내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이에 처벌의 방식은 은밀하게 변해간다. 바로 '감옥'과 같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감옥은 지배층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대리인을 고용함으로써 오히려 자신들은 관대하다고 포장하며, 장기적으로는 정신적인 개조도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감시와 처벌의 구조는 현대로 올수록 더욱 치밀해지고 있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구분이 어떻게 공간적으로, 상징적으로 체화되어 있는지를 정교하게 보여준다. 특히 이 영화는 구조주의의 핵심 명제인 '보이는 것 이면에 작동하는 구조의 질서'를 탁월하게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영화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치는 바로 공간이다. 박 사장의 가족은 햇볕 잘 드는 언덕 위에 있는 고급 저택에 살고, 기택의 가족은 빛이 거의 들지 않는 반지하에 거주한다. 이 수직적 공간의 구도는 곧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구조를 물리적 거리와 시각적 심상으로 보여준다. 지배층은 위에 있고, 피지배층은 아래에 있다. 이러한 공간적 구도는 관객에게 직관적으로 계층 간 단절과 위계적 질서를 느끼게 하며, 이들이 결코 섞일 수 없다는 구조적 현실을 시각화한다.
또한 『기생충』은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의 구조를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화려한 저택의 숨겨진 지하실은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밑바닥의 인생, 곧 감옥을 상징하는 공간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공간은 은밀하게 은폐되어 안전한 공간이다. 권력층이 설계한 공간이었지만, 의도했던 그렇지 않든 간에, 가장 하층민들이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마치 『괴토실설』의 '토실'과 같은 공간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괴토실설』의 공간은 지배층에 의해 직접적으로 파괴되지만, 『기생충』에서는 하층민들끼리의 투쟁 속에서 뺏고 빼앗기는 공간이 된다. 이러는 사이에 반대로 권력층의 공간과 삶은 순진하리만치 아름답게 미화되고, 지하실에 갇혀 사는 자(근세)에게는 심지어 리스펙(Respet)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영화 『기생충』은 단순한 흥행작을 넘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심층적 구조를 날카롭게 해부하는 구조주의적 서사라는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보아도 흥미롭다. 『기생충』은 현대 사회에서 노동력과 생존의 권리를 제한당한 하층민의 삶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기택의 가족은 상류층의 삶에 기생하면서, 가진 자의 삶을 부러워하는 허위의식에 물들어 있다. 그들의 노동은 진짜가 아닌 허위로 만든 것이며, 따라서 언제든 대체 가능하기에 위태롭다. 또한 그들 가족이 부자들의 공간에서 누리는 호사는, 부자들이 잠시 모른 체하며 허락한 '카니발'과 같은 하룻밤의 꿈같은 축제일 뿐이다. 이러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한다. 잠시 허락된 일탈일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순간의 호사조차 영화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투쟁의 시공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가난한 사람들끼리의 처절한 싸움 이면에는 부자들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싸움 때문에 피해를 당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사실은 현대 권력의 치밀한 구조라고 영화는 말하는 것이다.
그나마 영화 곳곳에는 가진 자들의 은밀한 억압을 냄새와 거리 등으로 상징화하며 폭로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오히려 더 기분 나쁘게 하고 내면의 상처가 되는 폭력들이 영화 곳곳에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차라리 대놓고 말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덜 상처가 될 수도 있다. 박사장이 지속적으로 기택을 보면서, 코를 막거나 얼굴을 찌푸리고, 은밀히 뒷담화 하며 무시하는 시선을 주는 행위들은 더 큰 폭력과 상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끝에서 기택이, 자신의 냄새를 혐오하는 박 사장을 찌르는 것은 순간의 충동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누적된 분노의 결과일 것이다. 기택은 은밀하게 자신에게 가해졌던, 은밀한 차별과 멸시를 감지하고, 억눌린 분노를 폭발시킨 것이다. 이 장면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하층민이 억압받는 구조에 대한 비명과 저항의 표현인 것이다.
하지만, 하층민의 감정적인 저항은 사회에서 쉽게 용납되지 못한다. 매우 위험한 행동인 것이다. 그래서 기택은 언제 나올지 모르는 지하실에 철저히 갇히고 만다. 과연 기택은 아들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는 날이 올 것인가? 사실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종합적으로 보면, 『기생충』은 단순한 불평등 묘사를 넘어, 사회 구조 속에 내재된 권력의 작동 방식과 계급 간의 위계적 고착화를 구조주의적으로 해부하는 작품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영화 속에서의 경제적 불평등과 노동력의 착취를 분석하는 틀을 제공하고, 푸코는 권력이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게, 하지만 치명적으로 작동하는지를 설명한다.
이 두 관점이 만날 때, 우리는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단지 흥미로운 드라마가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그 내면화된 구조의 폭력을 고발하는 강력한 텍스트임을 깨닫게 된다.
최근 대중문화 비평을 위해 다양한 비평의 관점을 배우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구조주의적 관점이었다. 소쉬르의 언어학이야 국어를 전공한 사람이니 대충 풍월은 읊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레비스트로스부터 미셸 푸코에 이르기까지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구조주의 비평과 관련한 책들을 찾아보고 유튜브 강의도 한 두 개 들어보면서 대충은 개요는 이해했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들이 쓴 『슬픈 열대』나 『감시와 처벌』를 사서 '수박 겉핥기'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철학의 주류인 구조주의에 대해 아주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계기는 되었던 것 같다.
아직 먼 길이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하니 어설픈 비평문이나마 일단은 올려 본다. 그럼에도 한참 철지난 『기생충』이라니 .... 최근 영화나 드라마의 이면에 담긴 구조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