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도구 : 문학 10 '찬기파랑사뇌가'는 어떤 노래인가?
『삼국유사』에 실린 '찬기파랑가'는 '찬기파랑사뇌가(讚耆婆郞詞腦歌)'로도 불린다. 제목의 뜻은 '기파랑'을 '찬양'하는 '사뇌가'라는 뜻이다.
찬기파랑가는 뛰어난 문학성을 인정받는 최고의 향가인만큼 논란도 많은 작품이다. 첫째는 해석상의 차이, 둘째는 기파랑의 정체, 세 번째는 '사뇌가'에 대한 견해차이다. 이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문학을 전공하는 분이 아닌 경우는, 이 제목이 흥미가 떨어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고등학교 시절에 한번은 들어보았을 것이고, 한국문화의 뿌리이자 전통으로서 한번 살펴봄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찬기파랑가 해석은 양주동의 견해를 우선으로 하지만, 최근에는 김완진의 해석도 소개하며 두 해석의 차이를 비교하는 문제가 시험에 출제되기도 한다. 두 해석의 차이를 보면 김완진 해석은 독백체로 '기파랑'을 찬양하는 내용이고, 양주동은 화자와 달의 대화체로 '기파랑'의 인품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과연 '기파랑'이 누구냐는 논란이 생겼다.
전통적으로 문학계는 기파랑을 신라의 화랑 중 한 명으로 보아왔다. '모죽지랑가'에서 '죽지랑'이라는 화랑을 추모한 것처럼, 찬기파랑가는 당연히 '기파랑'이라는 화랑을 찬양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근거가 매우 부족하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물론, '찬기피랑가'외에는 어디에도 ‘기파랑’이라는 이름의 화랑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기파랑의 정체에 대한 다양한 가설이 제시되었다. 역사적 인물의 다른 별명일 수도 있다는 말부터, 석가모니의 제자이자 주치의였던 '지바카'라는 설도 제기되었다.
한편, 가장 최근에는 연세대 사학과의 지배선 교수가, 서역의 고승 구마라지바(Kumārajīva)를 기파랑과 동일한 인물일 가능성을 제기했는데 매우 신빙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학계에서는 이 견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지 않다.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향가 연구의 방향이나 지평도 상당히 다양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폐쇄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지배선 교수의 견해가 실린 기사문을 인용한다.
“구마라습은 유마경이나 법화경처럼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로 돼 있던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최초의 인물이다. 학계에선 구(舊) 번역의 대가로 구마라습을 꼽고 신(新) 번역의 대가로는 현장을 꼽고 있다. 그만큼 구마라습은 불교를 연구하고 수행하는 사람들로부터 추앙받는 인물인 것이다. 구마라습에 관한 대표적 기록으로는 진서(晉書)를 들 수 있다. 이 책 권 95 구마라습전(鳩摩羅什傳)에는 ‘구마라습의 아버지는 구마염(鳩摩炎)으로 천축(天竺·인도) 사람’이라고 기록돼 있다. 또 신강(新疆) 인민출판사가 펴낸 장평(張平)의 구자-역사문화심비에는 ‘구마라습의 어머니는 구차국의 임금 구자왕(龜玆王)의 누이동생이며 이름은 기파(耆婆)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구차국은 지금의 타클라마칸 사막 위쪽에 존재했던 고대 왕국이다.) 그리고 진서에는 ‘기파는 라습의 별명이다(耆婆卽羅什之別名也)’라고 돼 있다. 명백한 것은 양(梁·1500년 전 중국 남조시대에 존재했던 국가)나라 때의 승려 혜교(慧皎)가 쓴 고승전(高僧傳)의 기록이다. 혜교는 이 글에서 ‘습(什)의 이름은 원래 구마라기파(鳩摩羅耆婆)였다. 서역에서 이름을 지을 때는 대개 부모를 본으로 삼는다. 습의 아버지는 구마염(鳩摩炎)이고 어머니의 자(字)는 기파(耆婆)였기 때문에 아울러 취해서 이름으로 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구마라습을 왜 구마라기파라고 불렀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이 된다.”
구마라지바는 4세기 서역 쿠차국 출신의 고승으로, 전진의 여광(呂光)에게 억류된 뒤 장안으로 이주하여, 300권 이상의 불교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한 인물이다. 주목할 것은 진서에 ‘기파는 라습의 별명이다(耆婆卽羅什之別名也)’라는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후는 구마라지바를 '기파'로 통칭한다.
'기파'는 어린 시절부터 천재적인 인물이었다. 다양한 언어 구사 능력과 불교 철학에 능통하여 여러 곳에서 인재로 등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기파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기파가 40세가 되던 해 중국 전진의 왕 부견은, 그의 명성을 듣고 여광 장군에게 서역정벌의 명을 내리면서, 기파를 잡아오라고 명령한다. 기파는 이후에 강제로 파계를 당하고, 여광에게 온갖 수모를 겪지만, 양주와 장안에 머물면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한다. 극락, 지옥,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불교의 핵심 용어가 모두 그가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하며, 이러한 노력으로 중국은 물론 한반도와 일본에까지 불교문화를 확장한 고승으로 평가받는다.
충담사는 바로 이러한 '기파랑'의 삶을 찬양하며 ‘찬기파랑가’를 지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실제 찬기파랑가의 내용을 보면, 기파의 일생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구절들이 많다. ‘일오천’(逸烏川)은 우리나라에 없는 강인데, 이는 '기파가 살았던 쿠차 근방의 하천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실제 천산산맥 주변에 흐르는 이리
하(伊犁河)를 음차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KBS에서 2006년에 제작한 다큐인 '실크로드'를 보면, 구마라지바(기파)의 삶을 소개하면서, 암벽 사이에서 흘러나온 강물의 이름을 '일오파스케', 일명 '신비의 샘'이라고 발음하는 장면이 나온다. 고대 쿠차어라고 하는데, 더 정확한 발음과 의미는 찾지 못했지만, ‘일오천’(逸烏川)과의 연관성이 순간적으로 떠올라서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일오천 내 자갈밭에서 낭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이라는 말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 지역은 지금도 파란색을 매우 신성하게 여기고 벽화의 염료로 흔하게 사용한다. '찬기파랑가'의 구절에 '새파란 냇물에 기랑의 모습이 있다'는 말도 분명 '기파'와의 연관성을 짐작하게 한다. 이외에도 '조약돌'과 '잣나무'는 '눈'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파의 정신을 형상화한 것으로 읽힌다. 이러한 정황들을 종합해서 보면, 찬기파랑가는 구마라지바(기파)의 고난과 역경, 그리고 굴하지 않는 정신을 예찬한 깨달음의 노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눈이라도 덮지 못할 고깔이여
(찬기파랑가 김완진의 해독)
『삼국유사』에는 '찬기파랑가'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가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좀 길어도 내용을 인용한다. 이 내용을 보면, 경덕왕은 불교와 거리가 먼 도덕경과 같은 책을 수입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일연의 입장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경덕왕의 이러한 사상적인 혼란은 결과적으로 오악과 삼산의 신들이 대궐에 나타나 왕에게 경고하는 장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 속에서 경덕왕은 또 한편으로는 위의 있는 승려 한 사람을 데려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가 바로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사이다.
[당나라에서 보낸] ≪도덕경(德經)≫ 등을 대왕[경덕왕]이 예를 갖추어 받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과 삼산(三山)의 신들이 때로는 혹 대궐 뜰에 나타나 [왕을] 모셨다.
3월 3일(765년)에 왕이 귀정문(歸正門)의 누 위에 나가서 좌우의 측근에게 말하기를, “누가 길거리에서 위의(威儀) 있는 승려 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때 마침 위의가 깨끗한 고승 한 분이 배회하고 있었다. 좌우 측근들이 그를 보고 데려다 보이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위의 있는 승려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를 물리쳤다. 다시 한 승려가 납의(衲衣)를 입고 앵통(櫻筒)을 지고서또는 삼태기를 졌다고도 한다. 남쪽에서 왔다. 왕이 그를 보고 기뻐하면서 누 위로 맞아서 그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왕이 묻기를, “그대는 누구요?”라고 하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충담(忠談)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묻기를, “어디서 오시오?”라고 하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소승은 3월 3일(重三)과 9월 9일(重九)에는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차를 다려 공양하는데, 지금도 차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에게도 차 한 잔을 줄 수 있소?”라고 하니, 승려가 곧 차를 다려 왕에게 드렸는데, 차의 맛이 이상하고 찻잔 속에는 특이한 향이 풍겼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듣기로는 스님이 기파랑(耆婆郞)을 찬양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던데, 과연 그러하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러하옵니다” 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짐을 위해 백성을 편안히 다스릴 노래를 지어주시오”라고 하니, 승려가 즉시 칙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그를 아름답게 여겨 왕사(王師)로 봉하니, 승려는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삼국유사』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그런데, 경덕왕의 이러한 모습은 쿠차왕국의 왕 '백선'이 기파의 아버지 '구마라염'을 국사로 모시는 장면과 흡사하다. 또한 전진의 부견이 여광을 시켜 '구마라집(기파)를 데려오라고 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다.
가까이 다가온 무리 중에 말을 타고 있던 관원이 내려 서서 구마라염에게 예를 갖추고 말문을 열었다.
"묻겠습니다. 혹시 천축에서 오시는 구마라염 대덕이 아니십니까?"
"빈도가 구마라염입니다. 그런데 장관께서는 누구신지요."
구마라염이 대답하면서 눈으로는 호화로운 마차를 응시했다. 관원이 말했다.
"우리 왕께서 대덕을 맞으러 직접 나오셨습니다."
구마라염은 몹시 놀랐다. '구자 국왕이 내가 온 것을 어찌 알았단 말인가?'
『구마라집 평전』
'찬기파랑가'의 '기파랑'이 구마라지바(기파)라고 가정하면, 당연히 기파의 아버지 '구마라염'과 관련된 고사도 경덕왕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경덕왕은 국가의 혼란 상황에서 구차왕국의 백선이나 전진의 부견처럼, 자신에게 도움을 줄 현명한 스승을 찾았을 것이다.
경덕왕은 충담사를 만나기 전에 이미 '기파랑'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충담사가 '찬기파랑가'를 지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납의와 앵통을 지고 온 초라한 고승이었지만, 이름이 '충담'이라고 하자 바로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찬기파랑사뇌가'를 언급하며 그 뜻이 심히 높으니, 자신에게도 그와 같은 '안민가'를 지어달라고 부탁을 한다.
충담사는 중국이나 서역에 다니며 '구마라집(기파)'의 삶을 배운 승려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깨달음의 결과물로 '찬기파랑가'를 지었을 것이고, 그 노래가 신라에도 널리 퍼져 유명해졌을 것이다. 이미 찬기파랑가와 '기파랑'의 정체는 그렇게 신라사회에 잘 알려진 것이다.
경덕왕은 처음부터 '충담'을 국사로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처음에 데리고 온 대덕 고승을 맘에 들지 않아 했다. 그리고 오히려 허름한 옷을 입은 승려를 찾았다. 허름한 옷을 입었다는 것과 앵통을 짊어졌다는 것은 먼거리를 오가며 수도하는 승려였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충담이 먼 이국을 돌아다닌 승려라는 단서는 그가 가지고 다니는 차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가 앵통에 가지고 다닌 차는 신라에서 맛보기 힘든 특유한 향과 맛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차문화가 발달한 중국에서 재료를 가져오거나 차 달이는 법을 익힌 사람임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미 당시에도 혜초와 같은 승려는 인도를 다녀와 『왕오천축국전』을 쓰지 않았는가? 충담사는 혜초와 같이 서역을 탐방하면서, 구마라지바(기파)의 삶을 추적하고 흠모하면서 얻은 깨달음을 '찬기파랑가'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경덕왕은 충담사가 '찬기파랑가'와 같은 깊은 깨달음의 노래를 지은 것처럼, 구마라지바(기파)가 구차와 전진의 왕들에게 도움을 준 준것처럼, 자신에게도 나라를 안정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노래'를 지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안민가는 다음과 같은 노래이다.
'안민가'는 백성을 가족같이 대하면서,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먹여 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노래이다. 충담은 승려였지만, 매우 현실적인 조언을 한다. 나라를 위해 불국사를 중건하고 국사를 모시는 일보다 먼저 할 일은 백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충담사는 승려였지만, 지극히 유교적인 현실 이념으로 경덕왕에게 충고를 한 것이다. 이렇게 충담이 말한 이유는 당시 경덕왕은 자기의 왕권을 강화하는 데 치중하며 나라의 안위를 크게 염려하지 않은 왕이었기 때문이다.
'찬기파랑가' 가사를 소개하고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아주 신비로운 내용이 소개된다. 그건 바로 '표훈대덕'이라는 승려의 이야기이다. 표훈대덕은 경덕왕의 부탁을 받고 하늘을 오가며 옥황상제를 만난다. 경덕왕의 아들을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딸은 가능하지만 아들은 불가하다는 답을 받아 온다. 굳이 아들을 원하면 나라가 위태롭다는 말까지 듣게 된다. 하지만 경덕왕은 나라가 위태로와져도 좋으니 아들로 바꾸어 달라고 말한다.
왕이 하루는 표훈(表訓)대덕(大德)을 불러 말하기를, “짐이 복이 없어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원컨대 대덕께서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해주시오”라고 하였다. 표훈이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딸을 구한다면 가능하나 아들은 합당하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길, “원컨대 딸을 바꿔 아들로 해주시오.”라고 하였다. 표훈이 다시 하늘에 올라가 청하니, 상제가 말하기를, “될 수는 있지만,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표훈이 내려오려 할 때 상제가 다시 불러 말하기를, “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할 수는 없는데, 지금 스님은 마치 이웃 마을처럼 왕래하면서 천기(天機)를 누설했으니, 이후로는 다시 다니지 말라”라고 하였다. 표훈이 돌아와 천제의 말로써 왕을 깨우쳤으나, 왕은 말하기를, “나라는 비록 위태로울지라도 아들을 얻어서 뒤를 잇는다면 족하겠소”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니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삼국유사』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이러한 경덕왕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나라보다 자기의 권력과 왕실의 유지에 급급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조급한 마음에 불교 외에도 도교의 『도덕경』 도 받아들인다. 불국사도 만들며 국가의 안녕을 빌고 안민가도 짓게 하지만 사실 온갖 잡다한 행위를 다 한 것이다. 충담은 그래서 경덕왕의 부탁을 거절했을 것이다.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한 불국정토를 염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권력과 이익을 탐하며 온갖 더러운 면모를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일연의 입장에서 경덕왕조를 설명하면서 '찬기파랑가'를 자세하게 소개한 이유는, 당시 고려의 경우도 사상적인 혼란을 버리고 '구마라지바(기파)'의 순수했던 불교 사상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염원을 표현한 것일 수 있다.
일연의 입장에서는 그래서 '찬기파랑가'를 자세하게 그 가사까지 따로 소개했을 것이다.
‘사뇌가(詞腦歌)’라는 명칭은 신라시대의 향가를 지칭하는 말로 알려져 있으나, 이 용어가 지닌 정확한 의미와 범위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우선, ‘사뇌가’가 10구체 향가만을 가리키는 것인지, 혹은 향가 전체를 포괄하는 또 다른 이름인지를 두고 의견이 나뉘며, 일부에서는 그것이 특정한 내용을 담은, 특히 찬양의 형식이나 불교적 의미를 중심으로 한 시가로 이해하기도 한다.
『삼국유사』에 ‘사뇌가’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예는 단 두 번에 불과한데, 바로 찬기파랑사뇌가(讚耆婆郞詞腦歌)와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가 그것이다. 이중에 '찬기파랑사뇌가'는 '사뇌가'라는 말이 쓰인 노래로서 가사까지 전하는 유일한 노래이다. 「신공사뇌가」의 경우는 노랫말이 전하지는 않는다. 다만『삼국유사』 원성왕대 기록에 따르면 '대왕은 진실로 인생 궁달의 변화를 알았다'고 하며 이로 인해 신공사뇌가를 지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사뇌가’라는 명칭은, 심오한 깨달음을 담은 노래라는 의미가 된다. 특히 '사뇌가'라는 명칭이 '찬기파랑가'와 연결지어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번뇌(煩惱)'라는 말은 '구마리지바(기파)'가 한문으로 번역한 불교 용어이다. 사뇌(詞腦)와 연결지어 '번뇌(煩惱)'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불교 수행에서는 '화두'를 던지고 이러한 '번뇌'를 깨치는 것을 수련의 큰 목적으로 한다. 아마도 '사뇌가'는 승려나 그에 준하는 사람이 자신의 번뇌를 해결하고 얻은 깨달음을 노래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찬기파랑가'는 충담이 기파랑을 찬양하며 얻은 번뇌를 깨친 깨달음을 드러낸 노래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찬기파랑가'는 여전히 해석 논란이 있다. 향가 해석은 사실 누구도 무엇이 정확하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추정할 뿐이다. 그렇기에 '기파랑'이 누구인지에 대해 아는 것은 해석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기파랑은 누구인가? 신라의 역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데, 당시 승려와 왕이 잘 알고 존경하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화랑이라고 하면 보통 평범한 일개 화랑일 수는 없다. 그런데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화랑이 아닐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렇게 보면, '기파랑'은 분명 서역의 승려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동북아 지역 불교전파에 크게 기여한 '구마라지바(기파)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당시 경덕왕은 구마라지바(기파)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고승, 대덕을 통해 나라를 융성하게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래서 불국사도 중건을 한 것이다. 그리고 충담이 중국과 서역을 다니며 '구마라지바(기파)'에 대해서도 열심히 연구한 고승임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경덕왕은 충담을 기다린 것이다. 그가 찬기파랑가를 지은 고승임을 기뻐하며, 자신의 왕사가 되어 안민의 도를 알려달라고 부탁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고대 쿠차국의 왕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경덕왕은 불교뿐 아니라 도교의 도덕경에도 너그러운 입장을 취하며 사상적으로 혼란한 모습을 보이고, 국가의 안녕보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욕이 많은 왕이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의 입장에서는 그런 경덕왕의 모습에 아쉬움을 느끼며 고려왕실에 대해서도 동일한 충고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진심으로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길이 무엇임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끝으로, '사뇌가'라는 명칭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이 말이 쓰인 맥락을 잘 고려하면, 이 말은 '깨달음'을 표현한 말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사뇌가'라는 말이 쓰인 맥락에 모두 '그 뜻이 매우 높다'는 말이나 '궁달의 이치를 알아'와 같은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바탕으로, 찬기파랑가에 대해 더 깊이 있는 논문으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