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밤』,『이처럼 사소한 것들』

독서모임 6 : 도덕적으로 선한 삶이 쉬운가?

by 양심냉장고

이번 독서모임에서 읽을 책은 루리의 『긴긴밤』과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다.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이지만, 깊이 있는 토론이 가능한 책이기에 선정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9장은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라는 주제이다.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자들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공동체에 대한 책임 회피를 옹호하지만 샌델은 다분히 이러한 생각에 회의적이다. 샌델은 책의 말미에 가면서 자신이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람임을 밝힌다. 그러면서 샌델은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이야기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인용한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한 사회의 정체성을 지닌 자로서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이해한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 또는 사촌이거나 삼촌이다. 나는 이런저런 도시의 시민이며, 이런저런 조합 또는 전문가 집단의 일원이다. 나는 이런저런 친족, 부족, 나라에 속한다. 그러므로 내게 좋은 것은 소속집단 사람들에게도 좋아야 한다. 이처럼 나는 내 가족, 내 도시, 내 친족, 내 나라의 과거로부터 다양한 빛, 유산, 정당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이런 것들이 내 삶의 기정사실을 구성하며 내 도덕의 출발점이다. 또한 이는 부분적으로 내 삶에 도덕적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p.328


이 말은 내가 여기 존재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연대 속에서 성장해 왔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역사적인 이야기의 맥락 속에서 자신이 놓여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에게만 좋은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며 서로가 서로에게 일정한 의무와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루리의 『긴긴밤』


루리의 『긴긴밤』은 바로 이러한 연대의식을 잘 보여주는 동화이다. 이야기 안에서 말하는 서술자는 이름 없는 '어린 펭귄'이다. 펭귄은 자신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윔보와 치쿠', 그리고 '노든'이라는 아버지들의 이야기 안에서 성장했다. 어린 펭귄은 이름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준 아버지들의 이야기 덕분에 바다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어린 펭귄은 원래 동물원의 ‘검은 반점이 있던 알’이었다. 다른 펭귄들이 얼씬도 하지 않는 버려진 알이었다. 그런데 치쿠와 윔보라는 두 아빠가 이 불길한 알을 돌보기 시작한다. 윔보는 원래 남을 잘 돕는다. 윔보는 오른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치쿠를 돌보아 준다. 항상 오른쪽에 서서 치쿠의 오른쪽 눈을 보완해 주는 일을 행한다. 그런 마음으로 검은 반점의 알도 책임을 지고 돌보았을 것이다. 사실 돌보아 주지 않는다고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들은 아주 어설프고 힘들지만, 버려진 알을 품게 되면서 오만가지 걱정이 생기지만, 자신들이 책임지기로 한 이상 최선을 다한다.


그러다가 인간들이 일으킨 ‘전쟁’의 피해자가 된다. 치쿠를 대신해, 치쿠의 오른쪽에서 알을 품던 윔보는 철봉에 깔려 죽는다. 치쿠에게 이 사건은 매우 큰 상처였다. 하지만 그는 윔보의 마음을 이어받아 자신의 목숨을 바쳐 '알'을 지켜내려고 한다. 그러다가 치쿠는 ‘노든’을 만났다.


그리고 치쿠는 노든과 함께 '긴긴밤' 함께 길을 걸었다.


노든은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동물(인물)이다. 노든의 인생은 비극 자체이다. 노든의 인생이 비극으로 점철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들의 욕심 때문이다. 노든은 ‘흰바위코뿔소’이다. 인간들은 흰바위코뿔소의 뿔을 탐낸다. 아마도 매우 비싸게 팔 수 있는 물건일 것이다.


노든이 왜 동물 고아원의 코끼리들 속에서 살게 되었을지는 분명치 않으나, 노든의 부모도 인간들의 욕심에 의해 희생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노든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고 코끼리들의 사랑으로 잘 성장한다. 노든은 코끼리들 속에서, 자신도 코끼리라고 생각할 정도로 어려움 없이 잘 자란다. 코끼리들은 노든에게 사랑 이상의 꿈과 도전정신을 심어준다. 고아원을 나갈지 망설이는 노든에게 다정한 할머니 코끼리는 말한다.


“하지만 너에게는 궁금한 것들이 있잖아. 네 눈을 보면 알아.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 직접 가서 그 담을 찾아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그리고 노든은 코끼리의 사랑에 용기를 내어 넓은 세상으로 나간다. 세상은 힘들고 상처 투성이 사건의 연속이지만, 그는 바깥세상을 나온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노든은 훌륭한 아내와 딸을 얻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장 완벽하고 행복한 밤에 그의 불행이 다시 시작되었다.


탐욕스러운 인간들은, 다시 노든에게서 아내와 딸을 죽이고 뿔을 잘라갔다. 다행히 살아남은 노든은 ‘파라다이스 동물원’에서 산다. 그는 천국의 동물원에서 지옥 같은 삶을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곳에는 ‘앙가부’라는 친구가 있었다. 매일 복수를 꿈꾸며 악몽을 꾸는 노든에게 앙가부는 매우 좋은 친구였다.


“악몽을 안 꾸는 방법을 내가 알고 있긴 한데 말이야..... (중략)
노든은 그 말을 무시하려고 했다. 그 무렵 그는 숨을 위는 매 순간 화가 나 있었고 다 부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앙가부에게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고 한다. 코끼리들에 대해서, 아내에 대해서, 딸에 대해서 그리고 그날 저녁은 정말로 악몽을 꾸지 않았다.”


『책만 보는 바보』에서 이덕무와 유득공의 우정을 말한 바 있다. 그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다. 트라우마를 벗는 방법은 말을 하고 공감을 받는 경험이라고 했다. 가난한 삶을 견디지 못해 『맹자』를 팔아야 했던 마음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득공은 깊이 공감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춘추좌씨전』을 팔아서 이덕무를 위로했다. 그런 친구들이 있어서 이덕무는 트라우마 없이 행복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노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던 ‘앙가부’조차도, 다시 인간의 욕심 때문에 죽임을 당한다. 너무 잔인한 사건의 연속인지라, 도대체 인간의 욕심이 어디까지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노든은 이제 세상에서 유일한 흰바위코뿔소가 되었다.


자기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 속에서, 설상가상으로 전쟁이 터지고, 설상가상의 상황에서 동물원의 담장이 무너진다. 그리고 노든은 다시 용기를 내어 동물원 담장을 넘는다. 그리고 알을 가지고 달아나던 펭귄, '치쿠'를 만난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긴긴밤’을 함께 하며 같은 목표가 생겼고, ‘우리’라는 연대의식이 생겼다.


“치쿠와 함께 다니는 날들은 노든이 가족과 함께 다니던 날들을 떠올리게 했다. 노든은 부쩍 아내와 딸이 자주 생각났다. 그 기억은 괴로우면서도 행복했다. (중략) 처음에 노든과 치쿠는 그저 앞을 향해 걷기만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곧 목적지가 생겼다. 바다. 치쿠는 바다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노든은 치쿠와 연대하면서 괴롭지만 행복했다고 한다. 고통을 함께하고 공감하는 가운데 트라우마의 공포도 서서히 이겨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노든과 함께 긴긴밤, 밤길을 걷던 치쿠가 허약해진 몸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죽었다. 그리고 치쿠의 죽음과 함께 어린 펭귄이 태어났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느라 노든은 알이 살짝 움직이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조금씩 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부리가 껍질을 깨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렇게 내가 태어났다.”


그렇게 태어난 펭귄을 위해, 노든은 복수심도 내려놓고, 바다를 향해 다시 긴긴밤을 걷는다. 그리고 펭귄이 아프거나 무서워서 잠들지 못하는 밤에는 악몽을 꾸지 않는 방법이라며 옛날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리 와. 안아줄게. 그리고 이야기를 해 줄게. 오늘 밤 내내 말이야. 오늘 밤은 길거든. 네 아빠들의 이야기를 해 줄게. 너는 파란 지평선을 찾아서. 바다를 찾아서. 친구들을 만나고. 우리 이야기를 전해 줘. 그리고 노든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펭귄은 결국 노든의 헌신과 이야기를 들으며 바다를 찾았고 누구보다 악착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노든 이전의 윔보와 치쿠의 역사를 통해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도 있었다.


“나는 내가 본 적도 없는 치쿠와 윔보의 몫까지 살기 위해 살아 냈다기보다는 나 스스로가 살고 싶어서 악착같이 살아냈다. 그들의 몫까지 산다는 노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그 후로도 꽤 시간이 지나고 나서의 일이다.”


노든은 어린 펭귄이 잘 살 수 있도록,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주었다.


다시 『정의란 무엇인가』로 돌아가 보자.

그리고 다시 질문을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 노든과 윔보와 치쿠는 무엇 때문에, 어린 펭귄을 위해 그토록 헌신했을까? 아마도 그들은 자신의 삶도 누군가의 헌신의 결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펭귄이 노든에게 이야기를 들었듯이, 그들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이 있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다시 한번 강조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떻게 해야 정의롭고 아름다운 곳이 될 수 있을까? "내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정체성의 기원이 된 공동체의 이야기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이다. 그러한 공동체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사회적, 역사적 역할과 책임'에서 벗어난 존재로 사는 것은 도덕적으로 천박한 것이라고 직설한다.


한편으로 이러한 주장은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올바른 역사교육을 통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삶에 왜 기여하며 살아야 하는지, 반대로는 나의 공동체가 범한 잘못이 있다면 이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왜곡하고 책임지지 않으려는 일본에 대해서도 비판하는 논거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긴긴밤』을 쓴 작가가 『정의란 무엇인가』의 9장에 깊은 이해를 하고 이야기를 썼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긴긴밤』의 이야기(역사)는 노든의 입을 통해 계속된다. 그건 자연스럽게 '어린 펭귄'이 현재 있기까지의 생생한 역사(History)였다. 역사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삶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관심을 가지고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독립된 혼자만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밤, 나는 노든의 이야기를 들으며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다가 문득, 오늘이 노든과의 마지막 밤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나의 바다를 찾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노든의 눈을 쳐다보며, 눈으로 그것을 노든에게 말했다. 노든도 그것을 알았다. 우리는 오래도록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이러한 노든의 이야기는 다시 이름 없는 펭귄에게 전수되어 다시 어딘가에서 이타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매킨타이어가 말한 것처럼, 자신을 사회적 역할과 지위와 분리 가능하다는 추론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사회 안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아무 책임이 없이 자신의 길을 가면 된다는 생각은 도덕적으로 천박한 것이라고 지적을 한다.


『성경』에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마리아 인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매우 심한 차별과 모욕을 받으면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길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을 끝까지 책임을 지며 돕는 사람은 바리새인도 사두개인도 아닌 바로 그들 사마리아인들이었다.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이야기(모욕과 차별당함) 안에서 강도만난 자의 이야기(강도만난 처지)에 공감하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야기의 끝에 '누가 진정으로 강도를 만난 자의 이웃이냐'라고 묻는다. 『긴긴밤』에서도 역시 우리에게 묻는 듯하다. 너는 윔보와 치쿠, 그리고 노든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느냐고 묻는다. 누군가의 도움과 연대 안에서 지금 내가 있듯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공감해주며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아름다운 이야기이긴 한데, 과연 타인에게 아무 조건 없이 관심을 갖고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이냐는 것이다. 좋은 일이지만, 사실 노든처럼 산다는 것은 어려운 결정이며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하는 딜레마 상황에 처하는 일이다.


도덕적으로 선한 삶이 쉬운 일인가?


클레어 키건의『이처럼 사소한 것들』


이러한 어려움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클레어 키건의『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다. 이 소설은 '펄롱'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펄롱의 성장과정은 불우했다. 그는 빈주먹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끝내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죽었다. 그의 어머니는 '미시즈 윌슨'의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였다. 다행히 미시즈 윌슨은 펄롱의 어머니가 처한 불행을 외면하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주었다. 자식이 없는 미시즈 윌슨은 펄롱도 거두어 주고 글도 가르쳐주었다. 여기까지 보면 루리의 『긴긴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주제이다.


그러한 타인들의 도움으로, 펄롱은 비웃음과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다행히 건실하게 잘 자라 석탄이나 장작과 같은 난방연료를 판매하는 사업가가 되었다. 물론 펄롱이 도덕적으로 완벽하거나 흠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때로는 아내와 가족을 두고 다른 여인과의 삶을 꿈꾸는 속물적인 생각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의 삶은 사실 아주 순탄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조금은 위태롭다. 한편 그는 아내 아일린과 다섯 명의 딸이 있는 가장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가족을 거느리는 삶이기에 현실순응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혹독한 시기였지만, 그럴수록 펄롱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현실순응적이고 평범한 삶의 가치관을 흔드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가장 큰 고객이자 마을에서 영향력이 있는 수녀원에 배달을 갔다가 힘들게 노동하는 아이들의 처첨한 모습과 폭력에 노출된 상황을 목격한 것이다. 양심으로 갈등하던 펄롱은 다시 수녀원을 찾아갔고 같은 장소에서 심각한 학대와 폭력을 당하는 여자 아이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 여자 아이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성폭력에 노출되어 임신에 출산을 하고 차가운 지하실에 갇혀 고문에 가까운 상황에 놓여있었다. 수녀원에서 아동 학대와 폭력은 일상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다시 『정의란 무엇인가』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책의 본문에서 『아주 사소한 것들』과 아주 유사한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어슐러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아주 짧고 간단하다.


오멜라스 사람들은 아이가 그곳에 있음을 모두 알고 있다. (......) 그 아이가 왜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 자신들의 행복, 도시의 아름다움,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정, 아이들의 건강, 학자들의 지혜, 장인들의 기술, 그리고 심지어는 풍성한 수확과 온화한 날씨조차 전적으로 그 아이의 혐오스러울 만큼 비참한 처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 물론 아이를 그 지독한 곳에서 밝은 햇살이 비치는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다면, 아이를 깨끗하게 씻기고 잘 먹이고 편안하게 해 준다면, 그것은 정말로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당장 그날 그 시간부터 지금껏 오멜라스가 누렸던 모든 행복과 아름다움과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계약인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p.72

두 개의 이야기를 살폈다. 두 이야기 모두 공통점이 있다.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다. 나라면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아이의 불행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의 상황인 것이다. 이런 선택의 상황에서 펄롱의 아내 아일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웠을 때 펄롱은 수녀원에서 본 것을 아일린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려다가 어쩌다 말을 하게 됐는데, 아일린은 몸을 일으며 꼿꼿하게 앉더니 그런 일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거기 있는 여자애들도 누구나 그렇듯 몸을 더럽히면 땔감이 필요하지 않겠냐고 했다. 그리고 수녀들은 줄 돈을 늘 제때 주지 않냐, 항상 외상을 달라고 하고 돈을 갚으라고 쪼기 전에는 절대 안 주고 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지 않냐고 했다.
긴 연설이었다.


만약에 내가 펄롱과 같은 상황에 놓여있다면 나는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아마도 나는 펄롱의 아내 ’아일린‘의 입장에 훨씬 더 이해가 잘 될 것이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로 그냥 모른 체하고 사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그냥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합리화하면서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을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산다.

이는 이미 훌륭한 심리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 다 증명한 사실이 아닌가?


인간의 무관심, 방관자 효과, 악의 평범성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를 보면 아파트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현장을 목격하면서도 제대로 신고조차 하지 않은 ‘제노비스 사건’을 소개한다. 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사건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자기와 관계없는 일에 휘말리기 싫은 것은 당연한 사람들의 심리이다.


2013년 이그노벨상 수상작인 로랑 베그의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와 같은 책은 아예 한술 더 떠서, 오히려 도덕적이고 순종적인 인간이, 악에 저항하지 못하는 성향 때문에 더 나쁜 사회를 만들 수도 있음을 경고하기도 했다. 도덕적으로 착한 인간이 더 나쁜 사회를 만든다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 논리란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설득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재판의 경험을 토대로,『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아주 평범하지만 생각을 하지 않는 인간이 얼마나 거대한 악을 실행할 수 있는지’를 통찰하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은 연대하고 남을 돕는 일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일인지 잘 안다. 그래서 『긴긴밤』의 노든과 치쿠에게 감동한다.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해 감동하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처럼 사소한 것들』과 같은, 아주 사소하지 않은 현실 앞에서 과연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


방법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침묵하는 것이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나『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상황에서도 침묵하는 명분은 충분하다. 자신만 침묵하면 당장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양심의 소리는 조금 지나면 곧 잊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양심의 소리를 잊거나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고 저항할 용기도 쉽지 않다. 이런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선택을 한다.


둘째는 도시를 떠나는 것이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서 그나마 양심이 있는 사람들은 어린아이의 비극 앞에서 전체 공익적 측면에서 침묵을 하지만, 양심 때문에 버티지 못하고 도시를 떠나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자신은 악한 일에 동참은 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양심으로 보아야 할지 의문이 되기는 한다. 사실 어쩌면 이게 더 비겁한 일인지도 모른다.


셋째는 수도원에서 지하 감옥에서 어린 소녀를 데리고 나오는 것이다. 가장 용기 있고 도덕적인 행동이기는 하지만, 사실 공리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당장 펄롱은 그의 아내와 갈등을 하게 될 것이고 수도원에서도 계약은 끊어질 것이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라면 모든 불행의 원인을 짊어진 범죄행위라는 비난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자 그렇다면, 펄롱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그리고 나와 당신이라면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하게 될 것인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우리에게 생각을 한번 해보라고 말한다.

많은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분명 비슷한 결정을 내릴 것이다.


다만 생각은 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인간은,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아주 쉽게 악에 노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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