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큰아버지

인문학의 쓸모 : 문학과 역사, 심리학의 만남

by 양심냉장고

문학 교과서에 간혹 등장하는 월산대군의 시조 하나를 소개한다. 강호한정가로서 안빈낙도의 삶을 예찬하는 정도로 소개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으나, 이 작품을 지은 사람이, 연산군의 큰아버지인 '월산대군'이라는 사실이 호기심을 자아낸다.


작품을 깊이 이해하려면 작가의 삶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작가의 삶을 꿰뚫는 심리까지 추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마더' 청주 한씨 (소혜왕후, 인수대비)


월산대군은 세조의 큰아들인 의경세자의 아들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세조는 계유정난을 일으켜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세조는 아들이 둘인데, 첫째인 '의경세자'와 훗날 예종에 오르는 '해양대군'이다.

의경세자는 당연히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20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의경세자의 부인은 청주 한씨로 대학자였던 한확의 딸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돈이었던 세조의 사은사로서 중국에 다녀오다가 병사했다. 한 씨의 입장에서는 불과 1년 사이에 아버지와 남편을 다 잃은 것이다. 의경세자가 죽던 해에 청주 한씨에게는 4살의 월산대군과 2살의 어린 딸, 그리고 유복자인 자을산군이 있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남편이 죽으면서 그녀는 궁궐에서 나가 살아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


그녀는 이러한 시련 앞에서 매우 강인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자녀를 얼마나 엄격하게 훈육했는지 이를 본 세조와 정희왕후는 그녀를 '폭빈'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고 궁 밖으로 나가 산 지 10년이 다 되었을 무렵에 자녀들을 잘 키워 혼인시켰다. 월산군은 판서를 지낸 박중선의 딸을, 자을산군은 그 유명한 권신, 계유정난의 주역인 한명회의 딸과 결혼한다.


자녀들을 출가시킨 후 청주 한씨는 '빈둥지 증후군'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 일을 다 끝냈다는 안도였는지 모르지만, 심각한 마음의 병을 얻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또다시 큰 일이 벌어진다. 예종이 병약하여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예종도 그의 형처럼 20살에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몰아낸 죗값을 치르는 거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좌고우면 할 시간이 없었다. 시어머니인 정희왕후가 대리청정을 한다고 하지만 청주 한씨는 갑자기 왕이 된 아들인 자을산군(성종)을 도와 정계의 실세로 떠올랐다. 이후 청주 한씨는 '인수대비'의 칭호를 얻어, 궁궐의 기강을 엄격히 하면서 직접 내훈(內訓)을 집필하기도 한다. 다시 그 강인한 어머니의 면모를 보이며 엄격하게 아들의 삶에 개입했다. 그리고 궁궐의 기강을 엄격히 잡았던 것이다.


심리학에는 '마더콤플렉스'라는 용어가 있다.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어머니에게 심리적으로 지배당한 아들이 마마보이 기질을 보이는 것이 대표적이다. 청주 한씨는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남편의 역할까지 하면서 자녀들을 엄격하게 길렀다. 자녀들에게 어머니는 자애로운 어머니이기 전에 엄격한 아버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서 아들들에게 어머니는 두려운 존재인 동시에 사랑을 갈구하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어머니에 대한 양가감정의 상태를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환경에서는, 권신인 한명회의 딸이었던 공혜왕후도 힘들었던 것 같다. 역사에서는 그녀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19세에 요절한 것을 두고 시어머니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이후 성종은 후궁이었던 윤기견의 딸을 왕후로 맞이한다. 그런데 윤씨도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결국 폐비가 된다. 왕자(연산군)까지 낳은 윤씨였기에 성종이나 신하들이 반대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인수대비 한씨는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폐비가 된 윤씨는 이후 사약을 먹고 죽는다. 아무래도 성종은 강인한 어머니 아래, 부인과 아들을 지키지 못한 ‘마마보이’라는 소리를 피할 길은 없을 듯 하다.


영화 마더

조금 과장하면, 청주 한씨(소혜왕후, 인수대비)의 모습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에 나오는 엄마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런 '엄마'의 맹목적인 모습이 살인의 비극을 만들어 낸 것처럼, 인수대비의 집착은 연산군이라는 희대의 폭군을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다.


뜻밖의 인물이 왕위에 올랐다.


예종이 승하한 다음날, 정희왕후는 새로운 왕을 선포한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인물이 왕이 된다. 예종에게는 4살의 어린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그렇다면 바로 다음 순위는 월산군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왕의 자리에는 동생인 자을산군(성종)이 올랐다.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아무래도 당대의 권신이었던 한명회의 영향력이 많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결국 월산군은 왕의 자리를 눈 앞에서 놓쳤다. 왕정시대에 왕이 되지 못한 왕자의 운명은 사실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었다. 이미 왕권에 강력한 위협이 되는 구성군(세종대왕의 4남 임영대군의 아들, 당시 영의정)은 유배의 길에 올랐다. 당연히 월산군의 운명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풍전등화의 위기였다.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고 아버지인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면서 월산군은 월산대군이 되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월산대군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너무 무서운 어머니인지라 대놓고 원망하지는 않았겠지만 월산대군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의 마음이 자리잡았을 것이다. 아버지 없는 집안의 장남으로서 어머니를 도와 열심히 살았을 텐데, 그런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후 월산대군은 지금의 경기도 고양 지방에 '풍월정'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그곳에서 시주(詩酒)를 즐기며, 서예와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추강에 밤이 드니’라는 시조를 남겼다. 교과서에서는 이 시를 자연 속에 은거하며 욕심없는 삶을 예찬한 노래로 말하지만, 사실 꼭 그렇게 보고 넘기기에는 아쉬움이 많다. 이 시를 월산대군의 처지에 감정이입을 하여 보면, 무욕의 삶보다는 자기가 이루지 못한 욕망에 대한 진한 아쉬움이 더 많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다’는 초장은 그에게 닥친 몸과 마음의 시련이 느껴진다. 그리고 ‘낚시를 드리웠지만 고기가 아니 문다’는 말에서는 왕위에 오를 수 있었지만 좌절된 슬픔이 묻어난다. 물론 현실을 받아들이고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를 저어 돌아오지만, 만족감보다는 마음 속 깊은 서러움이 어쩔 수 없이 배어나오는 것이다.


월산대군이 모든 욕심을 버리고, 세종의 형이었던 양녕대군처럼 살았다면 그도 어쩌면 오랫동안 장수의 복을 누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월산대군은 자기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행복하게 산 것 같지는 않다. 공교롭게도 몸이 아픈 어머니를 돌보다가 34살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었다.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다가 죽은 효자라고 포장할지는 모르나, 어머니와 함께 지낸 그 짧은 기간 동안 모자(母子) 지간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공교롭게도, 월산대군이 죽은 다음 해 동생인 성종도 죽었다.


이후 두 아들의 어머니 인수대비는 오래 살아서, 손자인 연산군이 저지르는 온갖 만행과 폭정을 눈으로 지켜보다가 죽어야 했다.


월산대군은 죽어서도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월산대군은 죽어서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무슨 운명의 장난처럼 그의 부인이었던 박씨는 성종의 아들 연산군과도 악연으로 엮여있기 때문이다. 연산군 일기 63권, 연산군 12년 7월 20일자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월산대군 이정의 처 박씨가 죽었다.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


참으로 놀라운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연산군은 왜 큰어머니를 총애하여 잉태까지 시켰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이게 진실인지 아니면 훗날 연산군을 몰아낸 정당성을 위해 과장된 것인지는 모르나, 어쨋든 그런 소문이 있을 정도로 연산군과 박씨의 관계가 돈독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연산군은 연상의 여인들에게서 강한 모성애을 갈구하는 심리를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10살이나 연상인 장녹수에게 어린 아이처럼 매달렸다는 기록도 있다. 이전에 '왕의 남자'라는 영화에는 그런 연산군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니 엄마 없는 자신을 돌봐준 박씨를 특별히 아낀 연산군이었다. 그래서 그런 소문이 날만도 했을 것이다. 설마 진짜로, 아무리 패륜의 임금이라고 해도, 자기의 큰어머니를 연인으로 여겼다는 건 과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록은 기록이다. 박씨는 그런 소문에 휘말려 자결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박씨의 남동생인 박원종은 훗날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의 주역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월산대군은 남부러울 것 없는 왕자였지만, 참 불운한 왕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에게는 버림을 당했고

동생에게는 왕위를 빼앗기고

조카에게는 아내가 욕을 당하는,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다음에는 성종과 그의 아들 연산군의 삶과 정신세계에 대해서도 알아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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