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쓸모 : 인문학의 부재가 만들 디스토피아
대학에 진학할 때, 문학을 전공하겠다고 하니, 아버지가 “밥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라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문과는 찬밥이다. 그래도 그때는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결정했다. 국어 선생님을 좋아하고 윤동주가 좋아서 선택했다. 글을 잘 쓴다는 칭찬도 가끔 들어서 택한 전공이었다. 다행히 적성에 맞았고 평생의 직업이 되었다. 다행히 ‘밥’도 나온다.
하지만 문학, 역사, 철학은 여전히 배고픈 학문이다. 내가 이름이라도 알고 있는 시인은 대개 ‘투잡’을 한다. 시만 쓰고 소설만 써서는 가족을 굶긴다. 그래서 요즘 고등학생들은 밥이 되는 이과를 선택한다. 현실적인 선택이다.
대학에서도 철학과와 같은 순수 학문 학과들이 사라진다. 대학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다. 수요도 없고 취직도 잘 안되기 때문이다. 대학 입장에서 이윤이 발생하지 않으니 구조조정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솔직히 요즘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기보다는 이윤을 남기고 살아남아야 하는 기업에 더 가깝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인문학이 중요하고 더 중요해진다고 말한다. 특히 기업들이 더 나서서 그런 말을 한다. 문과 출신 학생들을 채용하지도 않으면서 말만 요란하게 하는 것 같아 얄밉긴 하지만, 사실 그들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여 물건을 잘 파는 이론과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 문학, 역사, 철학을 전공한 사람을 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인문학의 위기는 관련 학과를 폐지했다고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냥 상징적인 사건은 될지언정 근본적인 위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의 실제 위기는 사람들이 읽고 쓰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진짜 위기이다. 대한민국 성인의 절반 이상이 1년에 책 한 권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먹고 살기 바빠서 그렇다고 하는데, 이렇게 먹고 살기 바빠서 제대로 생각하고 토론하지 않는 상황이 진정한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문학의 근본적인 위기는 장기적으로 서너 가지의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만드는 나쁜 사회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인문학이 철저히 기업의 이윤추구에 종속되어 욕망 추구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인공지능 시대에 새롭게 도래할 인간 존재 자체의 위기이다.
최근 현대인들은 OTT서비스나 유튜브 안에서 필요한 정보를 가장 많이 습득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긴 내용은 외면하고 짧은 숏츠 영상에 몰입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정보의 생산자가 아닌 충실한 정보소비자로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고, 필요한 정보만 선택적으로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게 됨으로써 이전보다 극단적이고 편향적인 상태에 빠져들기 쉽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양극화되고 서로를 적대시하는 일이 더 많아질 것 같다. 이런 상태라면 대화와 타협은 사라지고 극단적인 혐오 속에서 권력자들의 아바타로 전락될 수도 있게 된다. 그리고 또다시 무서운 편견과 광기의 역사가 재현될 수도 있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위협받을 때, 사람들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려 해소하려는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로마의 네로가 그랬고, 히틀러와 모택동이 그러했다. 과거에 그렇게 했다면 또다시 미래의 어느 권력자가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바로 이런 것이다. 앞에서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그리고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를 통해 살핀 것처럼, 생각하지 않고 살다보면, 악을 행하기는 쉽고 선을 행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악은 너무 평범하게 우리 주변을 맴돌다가,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 중의 하나는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다. 특히 근대 자본주의의 전개와 제국주의, 그리고 1,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장면은 너무나 간결하고 명료하여 소름이 돋았다. 공급이 수요보다 많은 자본주의의 특성으로 인해, 물건을 소비할 식민지가 필요했으며, 식민지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치열하게 세계대전을 벌였던 세계사의 흐름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현대 자본주의는 '전쟁과 유행'이라는 두 바퀴를 축으로 유지된다는 말에도 공감이 되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공산주의와 치열하게 경쟁하며 더 단단해졌고, 이후로 지금까지는 인간의 욕망을 최대로 자극하면서 과소비 사회를 만들어 왔다. 그래서 10년 주기로 전쟁이 일어나며, 끊임없이 욕망을 자극하는 광고가 흘러나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장 보들리야르는 이러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소비의 사회』라는 책을 통해 해부했다. 현대사회는 이제 소비가 생산보다 더 중요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의 삶을 증명한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것을 패러디하여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이 진리처럼 회자되고 있다.
옛날 H자동차 광고에서는 요즘 어떻게 사느냐는 질문에 자동차를 보여주는 콘셉트를 만들었다. 조그만 아이들도 자신들이 사는 아파트 평수나 소비하는 물건에 따라 자신의 계급을 나누기도 한다. 상품은 이제 필요해서 사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기호로서 소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문학은 본래의 의미를 잃고, 기업의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의 욕망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자극할 수 있는지 활용되는 도구로 전락해 왔다. 그래서 기업에서는 광고 마케팅의 수단이나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문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역사와 문학, 그리고 심리학을 이용해 왔다. 아예 심리학은 '마케팅 심리학'이나 '소비 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특화되기도 했다. 대학에서도 그나마 취업에 유리한 학과로 심리학과가 입결이 상승하는 일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인문학이 철저히 자본주의에 종속되고 타인의 부조리한 삶에는 더욱 무감각해진 현대인의 상황을 김광규 시인은 『상행』이라는 시에서 반어적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문제는 인공지능 시대가 생각보다 더 빠르게 오고 있다는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이런 미래의 상황을 『노동의 종말』을 통해 예견하고 있다. 최첨단 인공지능 사회는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한다.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것은 상품의 소비자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제는 전쟁과 과소비도 어느 정도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며, 지나친 소비는 환경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생산수단을 가진 기업인들은 당장은 인공지능을 활용하면서 생산비를 더욱 줄이며 부를 축적할 것이다. 반대로 평범한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더욱 가난해 질 것이다. 이렇게 사회가 양극화가 되면, 생산자들은 최상위 부자들을 위한 욕망을 더욱 자극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욕망에 욕망을 자극하며 최상위층 안에서도 계급을 나누며 차별화하는 전략을 취할 것이다. 가진 자들의 소비는 지금보다 더욱더 규모가 커지고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화려해질지도 모른다. 차도 식량도 집도 극단의 극단을 달릴지 모른다.
한편, 권력자나 가진자들은 생산을 하지 않으며 소비자로만 전락하여, 세금이나 기본소득을 받아가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여길지 모른다. 로봇세를 걷어 기본소득제를 나누어준다지만, 생산은 하지 않는 인간이 얼마나 존엄한 존재로 대우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만약 소비자로서의 가치마저 희미해진다면 인간은 로봇이나 애완동물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받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네로나 히틀러 모택동과 같은 폭군들이 등장할지 모른다. 잔인하지만 어쩌면 충분히 그런 사회를 예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이 부재하는 현실에서는『1984』나 『멋진 신세계』와 같은 디스토피아의 세계가 어쩌면 생각보다 더 빨리 도래할 수도 있다.
읽고 생각하고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만드는 사회는 분명 인문학의 위기이다. 바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문학의 위기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로 진입할 확률을 더욱 높인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만드는 사회는 악에 침묵하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 그리고 후기 자본주의는 인간을 철저히 소비자로 만들었고, 그 소비의 한계가 도래하자 다시 인문학을 호출하여 인간의 욕망을 자극할 방법을 찾으라고 독촉하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은 결코 자본의 도구로만 남아선 안 된다. 인문학은 다시 인간을 사유해야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이야말로 인문학의 본질이다. 그렇기에 인문학은 대학 밖에서, 자본의 논리 밖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것은 개인의 자발적 실천으로, 공동체의 공적 대화로, 그리고 삶 자체를 성찰하는 행위로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완전한 소비자로의 전락, 곧 철저한 인간소외의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지성은 『리딩으로 리드하라』에서 세계적인 철학자, 과학자, 기업가들이 모두 인문고전을 철저히 읽은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인문고전에서 자본주의가 나왔으니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그 시스템 안에서 성공하려면 인문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한다. 일리가 있다. 이러한 논리는 앞으로 다가올 인공지능 시대에도 유효할 것이다. 예상되는 디스토피아 사회가 있다면, 어떻게 하면 방지하거나 최소한 속도를 늦출 수 있는지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생각하는 인문학은 그 길에 작은 등불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