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2

최열, '이중섭 평전' - 이중섭의 미술 세계

by 양심냉장고

이번에는 이중섭의 미술세계를 말해보자. 나는 미술에 문외한이라 되도록 '이중섭 평전'의 내용에 충실하기로 한다. 다만 책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다양한 자료나 해석을 첨가했다.


강렬한 인상 - 고구려 고분벽화 '사신도'와 '견우'


이중섭의 그림에 가장 먼저 영향을 끼친 것은 고구려의 고분벽화라고 한다.


고분벽화와의 만남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중섭도 직접 보았을 김찬영 수집품의 경이로움도 굉장한 것이었지만 어린 소년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것은 고분벽화 이야기였다. 실제로 평양부립박물관의 고분벽화를 가장 중시하는 진열방식을 취한 데서 보듯 당시 누구나 무덤에서 나온 저 괴이한 그림을 주목했고 그것은 천년의 신비와 매혹의 감동을 뿌려주고 있었다.

'이중섭 평전'에서


아래 그림은 고구려 강서대묘에 있는 '사신도'이다. 앞에서 '음양오행과 오방색'에 대해 말한 것을 참조해도 이해가 더 잘 될 것이다. 오방색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의 삶과 깊은 연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서남북 사방에 무덤을 지키는 푸른 청룡, 하얀 백호, 붉은 주작, 검은 거북이와 뱀을 그렸다. 아래 그림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남쪽은 문 양쪽에 두 마리의 주작을 그렸기에, 북쪽에는 거북이와 뱀을 그려 균형을 맞춘 섬세함도 보여주고 있다.


사신도.jpg 고구려 고분 강서대묘 사신도

이러한 사신도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이중섭은 그의 그림에 지속적인 흔적을 남겼다고 한다. 아래의 그림이나 이중섭 1에서 본 '부부'에 나오는 '닭'은 벽화 속의 주작을 닮았다. 이외에도 이중섭의 그림에는 전통적이고 동양적인 이미지나 사상을 그림으로 형상화한 것들이 많다.

이중섭 환희.jpg 이중섭 환희


다음은 덕흥리의 고구려 벽화이다. 아래 그림을 보면 가장 인상적인 것이 '견우와 직녀'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중섭이 고구려 벽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면 아마도 이 그림의 영향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견우와 직녀.jpg 덕흥리의 고구려 벽화 - 견우와 직녀

'견우'와 '소'의 모습은 이후 이중섭의 미술세계는 물론 그의 삶과도 맞닿아 있어 매우 흥미롭다. 일본에 있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소를 그리는 이중섭의 모습은 견우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직녀인 '마사코'를 그리워하며 만날 것을 기다리는 견우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중섭 '소' 그림은 이중섭의 자화상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진주 붉은 소.jpg
이중섭 흰소.jpg

오산 고등보통학교에서 만난 임용련 선생


이중섭은 일찍이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을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민족의 정신과 함께 서양미술의 흐름에 대해 배우고 영향을 받는다. 특히 '오산고보'의 교사로 부임한 '임용련'에게 많은 배움을 입었다.


1931년 봄 2학년에 진급한 이중섭과 미술부원들에게 임용련, 백남순 부부의 교사 부임은 경이로운 사건이었다. 임용련은 일찍이 중국 난징 진링대학과 미국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유학하고 1929년에 1년 동안 유럽을 여행하다가 1930년 파리에서 화가 백남순을 만났다.
당시 임용련 백남순 부부의 화풍은 인상파 화풍을 기본으로 삼았지만 1930년 부부전에 출품한 임용련의 <십자가와 초상>과 백남순의 병풍 형식에 그린 대작 <낙원>을 보면 인상파와 사실 묘사를 훌쩍 건너뛰어 야수파나 구성파 그리고 환상세계를 추구하는 자유로움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중섭 평전'에서



임용령 십자가.jpg 임용련 데생화 - 십자가의 상

이중섭은 이러한 임용련 선생으로부터 데생의 방법과 끊임없는 노력의 중요성을 배웠다고 한다. 동시에 서구 미술의 흐름과 다양한 기법을 흡수했을 것이다. 특히 고흐의 그림이나 피카소, 샤갈이나 루오의 그림에 대해 배우며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런 관심의 결과로 그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려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세 사람.jpg 이중섭의 데생화 ' 세 사람'


결과적으로 이중섭의 그림에 동양과 서양의 조화가 절묘하게 융합하는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일본 유학 시절 - 루오 같은 조선 청년이 나타났다.


신입생 이중섭의 데생(소묘)은 모두의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일본인 교수가 이중섭의 데생을 보고 '루오처럼 시커멓게 데생하는 조선 청년이 나타났다'라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조르주 루오'는 누구인가?


조르주 루오.jpeg



조르주 루오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종교화를 많이 그렸다. 조르주 루오는 1900년을 기점으로 야수파의 화풍을 보임과 함께, 검은 윤곽선으로 독창적인 작품을 선보인 화가라는 평가를 받는 작가이다.


그렇다고 이중섭이 기독교적인 작품을 그린 것은 아니다. 시인이자 친구였던 구상은 이중섭이 가톨릭에 귀의했다고 증언하기도 하지만, 이중섭의 그림을 보면 오히려 범신론적인 면이 많이 보인다고 한다.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도록 선으로 연결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이중섭은 이렇게 저렇게 다양한 작가들의 화풍에 영향을 받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중섭 소1.jpg 이중섭의 '소' 초기 그림
통영앞바다.jpg 이중섭 '통영 앞바다'

전설이 된 은지화 -새로운 소재와 기법


이중섭은 새로운 재료로 이전에 없던 기법의 그림도 그렸다. 그것은 바로 은지화, 담배를 싸는 은박지에 날카로운 도구로 새기는 것이었다. 자신이 즐겨 피던 담배 종이에 즉흥적으로 남긴 듯한 이 그림들은,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담긴 또 다른 편지였다. 이렇게 그린 그림이 적어도 120여 점 이상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 그림들 중에 뉴욕 MoMA 미술관에, 잭슨 폴락의 그림 옆에, 3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의 예술적 상상력과 서정성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모마 미술관 1.jpg



아를의 고흐처럼 - 통영의 이중섭


그 외에도 이중섭의 그림에서는 이전의 유명한 화가들의 영향이 여기저기 조금씩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중섭의 그림은 결국 이중섭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이루어낸다. 특히 이중섭은 통영에서 그의 예술세계를 완성하는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혼신을 다해 나간 끝에 이중섭은 드디어 통영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양식을 획득했다. 이 시절 이룩한 이중섭의 화풍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하나는 선과 면이 뚜렷이 나뉘는 구성계열이고, 또 하나는 선과 면이 뭉개지며 뒤섞이는 표현계열이다. 구성계열은 소묘와 삽화, 은지화에서 끝없이 반복하는 섬세 정교 한 선묘를 바탕으로 삼는 것이고, 표현계열은 묽은 물감을 요란하고 풍부하게 쏟아내 조야산만한 색묘를 바탕으로 삼는 것이다.

'이중섭 평전'에서


자신을 '조선의 정직한 화공'이라고 부른 이중섭은, 그림 하나를 허투루 그려내지 않았다고 한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중섭은 가족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통영에 들어가 가장 열정적인 태도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 새로운 회화예술을 창작하고 완성해 가겠다고 선언을 한다.


더욱더 시야를 넓혀 유유히 세상을 바라보면서 나의 새로운 회화예술을 창작하고 완성해 가겠소.

'이중섭 평전'에서


그는 스스로 '예술은 진실의 힘이 비바람을 이긴 기록이다'라고 말하면서 가장 힘든 시간에 가장 열정적으로 그의 그림 세계를 완성한 것이다.


고흐가 프랑스의 남부 아를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와 '꽃피는 아몬드 나무'와 같은 그림을 완성했듯이, 이중섭은 통영에서 가장 걸작으로 평가받는 '도원'이나 '벚꽃 위의 새'와 같은 작품을 남겼다.


통영벚꽃.jfif 이중섭 '통영 벚꽃 위의 새'



예술은 진실의 힘이 비바람을 이긴 기록이다.


이중섭과 고흐. 두 사람은 시대도 국적도 표현 방식도 다르지만, 그들의 그림은 고통을 견디는 방식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듯하다. 그 외에도 그에게 영향을 준 수많은 화가들의 마음과 붓들이 이중섭의 그림 속으로 녹아들어 왔다.


이중섭과 마사코는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지만, 이중섭은 그의 그림 속에 언제나 함께하는 소망을 담아, 하나의 선으로 이으려고 노력했다. 이별하여 그리워하면서도 언제나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 이중섭은 자신을 한 마리 '소'로 표현하면서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천상계의 이야기인 '견우'처럼 '직녀'를 기다리며 그러한 그리움을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시켰다.


두 마리 새를 하나로 연결하여 변함없는 사랑을 표현하고자 했고, 까마귀를 통해서는 오작교를 건너고 싶은 마음도 드러냈다. 그의 그림은 이처럼 하나로 흘러 아름다운 예술의 바다를 만들었다.


부유하게 태어났지만 가장 처절한 가난의 굴레에 떨어지고,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별한 상황에서 그는 가난과 슬픔을 승화하여 가장 아름다운 그림들을 그렸다.


그가 남긴 말과 사진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예술은 진실의 힘이 비바람을 이긴 기록이다"


이중섭 사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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